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1)
94. 용반호거 (3)
촉룡이 부탁에 관해 설명을 마쳤을 때였다.
염준열이 나를 찾고 있었는지 이쪽으로 왔다.
“의신아, 외할머니랑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준열이 왔구나! 생일 축하한다. 정말 잘 컸구나, 우리 손주.”
“외할머니가 축하해 주셔서 기뻐요. 늘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촉룡이 따뜻하게 맞이하고, 염준열은 기쁜 마음을 담아 공손하게 답인사했다.
그런데 염준열은 축하받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그 와중에도 나를 챙기려 한 건가?
염준열의 배려심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촉룡과 대화를 마친 염준열이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 의신이가 우리 집에 방문했을 때에는 경황이 없어서 금방 왔다 갔잖아. 소개하고 싶은 분이 많아.”
그 말을 시작으로 염준열은 회장에 있는 모든 참석자들을 소개하였다.
정말로 소개하고 싶은 이가 많았나 보다.
이름만 들어도 그 유례나 전승이 떠오르는 용족부터 이계 공략에서 대활약하여 신문 1면을 장식한 경력이 있는 붉은 사자의 유력 플레이어 등등.
염준열이 회장을 한 바퀴 돌았을 즈음엔 내 디바이스 코드 주소록에 거물들이 잔뜩 추가되었다.
‘출세욕, 인맥에 목숨을 거는 놈들이 왜 이 세 번째 파티를 노리는지 알겠다.’
이 파티의 참석객들은 면식도 없는 나에게 몹시 다정하게 대했다.
내가 이능을 받은 은광고 학생이긴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는 수준의 프로 플레이어 팀 멤버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용족들에 비해선 풋내기다.
방송국 사건에 관해 자세히 아는 간부급 인선은 은인이네 뭐네 하면서 잘 대해 주긴 했지만, 내 의향도 있어 그 사건의 전모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 생일 파티에 출석할 정도로 염준열 일가와 가까워도 내가 방송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다.
즉, 대다수의 참석객들은 내가 염준열의 친한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다정하게 대하고 있는 거다.
‘염준열은 사랑받고 있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과거에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을 경험했던 탓일 거다.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도 나를 초대한 게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고, 나는 가진 게 없다는 것 외에는 유사한 점이 없지.’
이전 세계에서 천성헌은 은박 처리된 초대장을 내밀며 내게 차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딱히 차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고 천성헌이 부를 이들과 인맥을 다지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천성헌의 초대에 응했다.
‘성헌이는 평소에 나한테 뭘 부탁하는 후배가 아니었어. 하지만 초대장을 내밀 때 많이 힘들어 보였지. 그래서 간 건데.’
그렇게 초대받아 참석했던 천성헌 주최의 사교 모임, 다과회는 마치 바늘 위를 걷고 가시로 된 소파에 앉아 독을 삼키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그 자리에 출석한 자제들은 대부분 서로 안면을 트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나는 매우 눈에 띄었다.
각오를 다지고, 철저하게 매너를 익혀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망신을 당하고 천성헌의 얼굴과 이름에 먹칠을 했을 것이다.
―조의신? 몇 년 전에 은퇴한 체스 신동하고 같은 이름이잖아.
―본인 같군요. 반갑습니다, 팬이었어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요.
―그 조의신이 천 회장님과 연이 있었나? 스폰서 명단에는 없던 걸로 기억한다만.
내가 그 자리에 초대받은 건 천성헌과 같은 대학에 다니는 그럭저럭 친한 선배였던 탓이다.
그것 외에 나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에 그것만으로는 재계, 정계의 자제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건 불가능했다.
체스 기사였던 나를 알아보고 호의를 표한 이도 있었으나, 내가 더는 체스를 두지 못하는 걸 알고 업신여기던 이도 있었다.
대놓고 적의를 표하며 독설을 퍼붓던 인물이 있어 천성헌이 사과할 정도였다.
―의신이 형, 죄송해요. 다시는 형과 저분이 뵐 일이 없도록 할게요.
도가 지나친 인물은 천성헌이 개인적으로 불러내 이야기했다.
천성헌이 온화하게 웃으며 몇 마디 말하니 뒤늦게 자신의 폭언에 수치심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얼굴이 파랗게 변해 급히 회장을 나섰고, 천성헌의 말대로 다시는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천성헌은 다과회의 질을 고려한 건지 분위기를 망친 이를 또 초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명이 사라졌으나 나는 끝까지 섞이지 못했고, 한 번도 마음을 놓고 차를 마시지 못했다.
지금과 다르게 말이다.
“우리 준열이 후배라서 그런지 예의 바르구나. 학교생활은 잘 하고 있지? 준열이가 학생회장인데 당연히 잘 하고 있겠지. 그럼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니?”
“그럼요. 의신이는 작년에 계속 저와 같은 등수였어요.”
“차석이었구나! 똑똑하게 생겨서 공부 잘할 줄 알았다. 이번엔 우리 준열이랑 같이 수석을 노리는 게 어떠냐. 나란히 수석을 하면 보기 좋겠구나.”
“그렇게 되면 기쁠 것 같아요.”
남의 성적에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꼰대들이 할 것 같은 발언이었으나, 분위기, 말투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마치 친한 친척 아이에게 명절 덕담이라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염준열이 블러드 오렌지 에이드를 권해서 잘 마시고 있었는데, 천성헌의 다과회 때와 다른 의미로 체할 것 같았다.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서 미안하지만, 염준열은 몰라도 졸업할 때까지 내가 수석을 할 일은 없을 거다.
불세출의 천재 주수혁과 안다인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 둘을 제치고 1등을 하겠는가.
“의신아, 내년에는 꼭 동하를 제치고 1등을 할게.”
염준열은 의욕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 향상심에 새삼 감탄했다.
작년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석 자리에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 3학년 때에도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수석 자리를 이미 마음속에 정해 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들 준열이가 착하고 똑똑하고 예의 바른 후배를 데려왔다고 신났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실실거리며 염준열을 따라다니던 용제건이 말을 걸었다.
염준열이 내 소개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건 것 같다.
용제건 옆에는 청룡도 서 있었는데 어째 표정이 복잡했다.
‘내가 단순한 후배가 아니라 ‘그 단어’에 염준열의 스승이라는 걸 알아서 저러는 걸까.’
하지만 내 생각이 잘못된 건지 청룡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이대로 용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도 잘 지낼 것 같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호족하고 동맹을 깨야 될걸?”
“그건 곤란하다. 용족과 호족에서 동시에 받아들이는 건 어떤가. 그러면 둘의 동맹 관계가 더 공고해지지 않겠는가.”
“재밌겠네요, 청룡. 내가 승천하기 전까지 추진해 줘.”
용제건은 뭐가 재밌는 건지 헛소리를 하는 청룡을 부추겼다.
염준열의 생일을 맞아 과하게 들뜬 나머지 머리에 열이 오른 게 아닐까.
약간 이상해진 용들이 하는 소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염준열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건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용제건이 말을 건 타이밍을 생각하면 이미 소개할 상대는 없는 것 같다만, 누굴 찾는 걸까?
“아버지, 어머니는 쉬고 계시는 중인가요?”
“그래, 예정보다 사람이 늘어났지 않았느냐. 내가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미안하구나.”
염방열이 아쉬움과 미안함이 그득한 얼굴로 말했다.
염방열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염준열의 어머니인 용족의 후예는 깜짝 파티에 출석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무나 이계 공략 등의 원인으로 참석 여부가 불투명했던 이들이 참석을 확정 지으며 초대객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났다.
인원수가 늘어나자 염준열의 어머니가 곤혹스러워하고, 염방열은 그녀를 배려해 쉴 것을 권했다고 한다.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파티를 준비할 때 계속 도와주었단다. 나중에 같이 인사하러 가자꾸나.”
“네, 아버지.”
염방열의 짧은 말에서 아내를 향한 애정이 짙게 느껴졌다.
염방열은 아들 바보로 유명했지만, 애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은광고에서 어느 용족의 후예에게 첫눈에 반한 염방열은 졸업 후 결혼하여 죽 아내 사랑을 이어 오고 있다.
염방열이 은광고에 재학하던 때 그가 벌인 장렬한 구애극은 아직도 학교에서 전래되고 있을 정도다.
‘외부와 교류가 적던 용족이 염방열과 붉은 사자를 받아들일 만큼 그 사랑이 극진했지.’
처음에 용족들은 후예에게 들이대는 염방열을 곱게 보지 않았고, 청룡은 몇 번 실력 행사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염방열은 청룡에게 불꽃과 물로 얻어맞아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염방열은 인간 중에서 최강의 플레이어를 꼽을 때마다 후보로서 빠짐없이 언급될 정도로 강하니, 고등학생 시절에도 용족의 견제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을 거다.
결과적으로 염방열의 사랑은 결실을 맺었고, 훌륭하고 겸손하고 우수하고 다정한 아들 염준열이 태어났다.
‘이번엔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쉽네.’
그런데 염준열의 어머니는 왜 사람이 많은 곳에 있기가 힘든 걸까.
재적 학생수, 교원수가 상당한 수준의 은광고에 다닐 정도면 10대 시절에는 별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은광고를 졸업한 후에는 뭔가 트라우마가 될 사건이라도 있던 걸까?
용족과 염방열의 보호를 뚫고 뭔가를 당한 거라면 엄청나게 큰 사건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또한, 용족의 후예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용족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고 염방열도 미쳐 날뛰었을 거다.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내적인 문제인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머릿속에 넣어 두고만 있기로 했다.
“의신아, 어머니는 다음에 소개할게.”
염준열은 미안해하며 말했다.
어쩌면 이대로 염준열의 어머니가 머무는 곳을 방문해 인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하지만 염준열이 굳이 다음에 소개하겠다 말하는 걸 보면, 염준열의 어머니는 낯선 이를 좀 꺼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염준열의 가족사를 파고드는 건 뭣해서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생일 파티를 즐겼다.
파티의 절정에서는 염준열의 홍룡을 공개했다.
최근 김신록과 훈련을 몇 번 더 하며 성장한 홍룡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쏟는 참석객들이 몇 명 있었다.
“세상에, 그 작고 귀엽던 홍룡이 저렇게…….”
“하루가 다르게 우리 준열이와 홍룡이 성장하고 있구나! 다 컸어!”
염준열이 홍룡을 거두었을 때에는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리고 황지호의 말대로 호족 측의 마중이 왔다.
저번에 나를 마중 왔다가 실패한 호랑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염준열 군, 생일 축하합니다.”
“선생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김신록의 뻣뻣한 인사에 염준열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몇 번 광림 강화 훈련을 한 덕에 염준열이 김신록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쑥스러워 말수가 적은 김신록을 두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김신록을 알아본 이들이 말을 걸었다.
“용제건의 호랑이 친구가 왔다.”
“오랜만이네. 자주 좀 놀러 오지!”
“보나 마나 용제건 때문에 안 오는 거겠죠.”
김신록을 환영하는 용족들이 용제건을 흘겨보았다.
용제건은 시선을 받으며 웃었다.
그러자 용족들이 흘겨보던 눈을 거두었다.
승천 직전인데도 용제건은 여전히 기피 대상인가 보다.
“신록아, 의신이 마중 온 거야? 기왕이면 자고 가지 그래. 파티 뒤풀이도 있는데.”
“안 돼.”
“신록이 방 청소도 해 놨는데.”
“안 된다고.”
저러다가 나랑 김신록이 또 붙잡히는 거 아닌가?
뭐라 끼어들려고 하기 전에 다른 호랑이가 등장했다.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제 아들을 자고 가게 한 겁니까?”
적호였다.
이번엔 황지호가 김신록을 그냥 붙잡히게 둘 생각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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