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56화 (75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6)

95. 도룡지기 (10)

백룡궁의 백견청(白䶬廳).

용의 등 갈기, 지느러미를 의미하는 견(䶬)이 들어간 이곳은 백룡궁에서 접객용으로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백룡궁 앞에서 마주친 이들은 유황의 안내를 받아 백견청으로 들어왔다.

손님을 모시는 곳답게 잘 정돈된 곳이었으나 벽이나 기둥에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흰색 기조의 건물이라서 그런가. 흠집이 많이 보여.’

앞서 걷던 황룡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렸나 보다.

황룡이 그리움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이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백룡과 흑룡은 용제건 못지않게 말썽을 피워 그 영향이 용궁 전체에 미치곤 했지. 이건 흑룡이 백룡궁을 얼음으로 뒤덮었을 때의 흔적이란다.”

용제건 못지않게 말썽을 피웠다니.

저런 비유를 쓸 정도면 백룡과 흑룡은 상당한 수준의 트러블 메이커였나 보다.

그런데 상징색이 같은 진족끼리 닮았다면 백호군도 백룡 같은 문제아라는 뜻이 되지 않나?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럴 리가 없으므로 같은 상징색이라 해도 닮지는 않는 것 같다.

“백룡궁도 멋지네요! 무녀 언니, 저기 그려진 건 백룡 님이 진족이었던 시절의 초상화인가요?”

“……그럴 듯요.”

“와, 역시 그랬군요. 초상화에서도 백룡 님의 기백과 힘이 느껴져요. 얼른 백룡궁을 돌아보고 싶어요!”

막내 무녀가 ‘그럴 듯요’라고 말할 때 ‘요’를 유독 작게 발음했는데, 마지못해서 윤여랑에게 끌려다니는 티가 났다.

막내 무녀로부터는 의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룡과 유황이 만나는 자리에 끌려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 자리에서 탈출할 구실을 찾는 것 같았다.

윤여랑이 놔줄 리가 없으니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저 막내 무녀는 배신자가 아닌 것 같아.’

무서운 배신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따돌림이 발생하다니 말도 안 된다.

따돌림을 당한 피해자가 앙심을 품고 모든 것을 밝히면 오랜 시간 걸쳐 계획한 배신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따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철저히 감시를 붙여 입단속을 시키거나 아예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이다.

‘막내 무녀를 무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따돌림은 없어. 그리고 누구나 쉽게 눈치챌 만큼 노골적으로 따돌리고 있지. 게다가 용궁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이 커.’

막내 무녀는 배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도 무녀 쪽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우선 지켜보기로만 했다.

따돌림을 중단하고 보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무녀 편을 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한편, 먼저 자리를 잡아 앉은 유황과 황룡이 흐뭇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정말 소문대로 밝은 아이네요.”

“그렇구나. 저 아이 덕분에 용궁이 한층 밝아진 것 같다.”

척 보기에는 아름다운 용궁에서 무녀가 용에게 말을 건네는 그림 같은 상황이었으나, 실상은 구유밀복유검(口有蜜腹有劒)이라 오래 응시하기 꺼려졌다.

유황을 관찰해야 하니 계속 눈을 돌릴 수는 없기에 마음을 다잡고 표정을 감췄다.

“황룡궁에서 시험 준비를 돕는다고 들었다. 말이 잘못 전해진 것 같군.”

“어머, 그런가요? 다들 경황이 없나 보군요. 부디 말을 전한 무녀를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너희가 용궁을 위해 애써 주는 것을 아는데 어찌 탓하겠느냐. 호족의 손님이 좋은 찻잎을 선물했다. 함께 들자꾸나.”

유황이 저리 변명하고 황룡도 굳이 더 캐 보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이라는 건 뻔했다.

윤여랑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황을 보니 대략 짐작이 갔다.

‘시험이 가까워졌으니 후보생들의 자질을 확인해 보려는 거야.’

유황의 목적은 이번 시험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모든 후보생을 떨어뜨릴 수는 마련되어 있으나 만약을 대비해 직접 유황이 확인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들이 상정한 것보다 자질이 뛰어나면 수가 어그러질 테니까.

하지만 황룡이 이 자리에 있는 탓에 유황은 대화 주도권을 가져가지 못했다.

‘황룡이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대화의 흐름을 계속 바꾸고 있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

황룡의 심계와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윤여랑에 대해 캐내지 못하도록 다양한 화젯거리를 준비했는데, 여기에서 그걸 다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황룡이 우려낸 차를 한 잔 비울 때쯤, 화제의 중심은 유황이 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유황이 윤여랑에 관해 캐내는 대신, 다른 이들이 유황을 알아 가는 자리가 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너는 무녀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해 보았느냐?”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려 합니다.”

용왕신의 무녀가 된 자들의 시간은 멈춘다.

그들이 용왕신과 이어져 있는 한, 불로를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무녀들이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다.

무녀로서의 힘이 쇠하면 용왕신과 이어질 수 없게 되고, 다음 무녀를 뽑게 된다.

물론, 은퇴한 무녀들의 생활은 용족이 보장한다고 한다.

‘유황은 길어야 10년이라고 했지. 그 기간이 지나면 용왕신의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다음 무녀를 뽑는 게 좋을 거라고도 들었어.’

유황은 이 시험을 무효로 만들어 시간을 번 후, 그사이에 일을 치를 생각이었던 거다.

황룡이 다시 말했다.

“유황, 무녀가 되며 멈췄던 너의 시간은 곧 움직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황룡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용족이 추측 중인 무녀들이 배신을 한 이유를 생각하면 그렇지 못했다.

용족 측에서는 그것이 ‘수명’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불로불사를 얻겠다며 역사 속에서 인류가 벌인 짓들을 떠올리면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그렇지요. 인간의 삶은 몹시 짧거늘, 무녀로 지내는 동안 잊을 뻔했어요.”

유황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동요도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황룡 못지않게 심계가 깊다는 게 느껴졌다.

유황색의 면사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면사 뒤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룡 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겠어요.”

이야기를 마친 후, 황룡과 유황은 황룡궁으로 향했다.

황룡은 유황에게 물 흐르듯이 시험 준비를 하는 무녀들을 살펴보자며 권했고, 유황은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자리를 뜨기 전, 유황이 막내 무녀에게 말을 걸었다.

“후보생을 잘 살펴 주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하렴.”

“네에.”

유황의 말에 막내 무녀가 성의 없이 답하자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래도 황룡 앞에서 이를 티 낼 수 없었기에 그대로 물러갔다.

그렇게 윤여랑의 백룡궁 탐험이 재개되었다.

윤여랑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있던 건지 막내 무녀에게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무녀가 되면 시간이 멈춘다고 했죠? 저는 중학생 때 키 클 만큼 커서 멈춰도 돼요. 어차피 무녀 은퇴하면 다시 키 자라는 거죠?”

“네에.”

“아, 용궁의 무녀분들의 시간도 멈췄다고 들었어요. 용궁에서 벗어나면 다시 시간이 움직인다는 것도요. 그럼 무녀 언니의 시간도 멈춰 있는 거죠?”

“네에…….”

막내 무녀는 영혼 없이 답했지만, 부족한 영혼은 윤여랑이 열과 성을 다해 채웠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했다.

막내 무녀는 윤여랑의 말에 대답하고, 가끔 막다른 길, 숨겨진 계단 등이 있는 장소를 안내하는 것 외에는 별말이 없었다.

나도 가끔 대화에 끼어들긴 했지만, 막내 무녀와 윤여랑의 관찰을 우선시하느라 대체로 말을 아꼈다.

어느 정도 관찰을 마쳤을 때는 백룡궁 탐험이 일단락된 후였다.

“아, 오늘도 재밌었다! 좀 아쉽지만요.”

막내 무녀와 운룡은 윤여랑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묻지 않았다.

탐험에 지쳐 물어볼 여유가 생기지 않나 보다.

그래서 내가 묻기로 했다.

“뭐가 아쉬웠어?”

“용왕신님이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 없던 거요. 용궁을 구경할 겸, 용왕신님을 찾을 겸 탐험하고 있었거든요.”

막내 무녀와 운룡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야 신의 세계와 이어진 입구는 백룡궁에 없으니까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윤여랑은 용왕신을 찾아다니고 있구나. 하지만 지금 용왕신은 용궁 주변에 올 수 없는 상황이겠지.’

윤여랑이 탐험에 열심인 이유 중 하나가 용왕신 때문이라니까 더욱 의욕이 솟았다.

윤여랑은 용왕신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반드시 무녀가 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청룡궁으로 향하기 전, 윤여랑에게 아이템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전서구 아이템이야. 여기에서는 디바이스를 못 쓰잖아.”

내가 윤여랑에게 준 건 SR---급 소모형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네!”

윤여랑은 위기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활기차게 답했다.

어쩌면 같이 간식을 먹자든가, 탐험을 같이 하자든가 하는 평화로운 구실로 나를 불러낼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다시 전서구 아이템을 주면 돼.’

정말 필요한 순간에 나를 부를 수 있도록 전서구 아이템을 계속 건넬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다.

윤여랑이 흑룡궁 탐험에 실패했다고 한탄한 다음 날.

무녀 선정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무녀와 후보생들을 황룡궁에 소집했다.

“다들 모였구나.”

황룡이 황색의 용좌에서 일어나 무녀들과 후보생들을 맞이했다.

황룡을 며칠 만에 본 후보생들이 황룡의 안색을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룡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황룡 님, 괜찮으신 걸까……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

“목소리에도 힘이 없는 것 같아.”

눈이 좋은 후보생, 귀가 밝은 후보생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윤여랑은 후보생들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여랑이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의외네.”

“그치만 여기에 와서 황룡 님을 처음 뵈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용다워 보이는걸요!”

목소리가 조금 커서 그런지, 아니면 그 내용 때문에 그런지 미리 와 있던 용들이 윤여랑을 돌아봤다.

다들 티는 크게 못 내도 자못 감탄하는 눈치였다.

언뜻 듣기에는 윤여랑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황룡은 용다워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른 무녀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윤여랑만 알아본 건가.’

황룡은 후보생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용답다니, 좋은 말이로구나.”

무녀들은 윤여랑의 발언을 두고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복잡한 용궁을 탐험한다고 들쑤시고 다니는 괴짜가 이상한 소리를 했을 뿐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시험에 관해 설명하기 전, 무녀들에게 말할 게 있다. 용제건, 앞으로 오도록.”

“응.”

용제건이 생글생글 웃으며 황룡 옆으로 훌쩍 날아갔다.

나란히 세워 놓고 보니 둘의 차이가 잘 느껴졌다.

용제건과 황룡은 비슷한 디자인의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데도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무녀들이 의심과 긴장이 섞인 태도로 낮게 날아 착지한 용제건을 바라봤다.

시험을 앞두고 장난질을 하는 걸까 걱정되나 보다.

“그동안 무녀들이 수고가 많았는데, 우리 용족이 해 준 게 없잖아? 마침 나는 승천을 앞두고 있고 용궁에 며칠 체재한 덕에 힘이 넘쳐.”

용제건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승천하기 전, 무녀들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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