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57)
95. 도룡지기 (11)
무녀들은 플마고에서 용제건이 죽을 때, 오색 채운을 이용해 여의보주의 잔해를 모아 갔다.
즉, 무녀들이 노리는 것 중 하나는 여의보주다.
무녀들은 그저 여의보주의 남은 조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죽은 여의보주의 잔해보다는 살아 있는 용제건의 힘이 더 쓸모 있지 않을까?
‘반응을 보니 내 생각대로인 것 같네.’
겉으로 보기에 무녀들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면사를 쓰고 있었기에 표정을 읽기 어려웠을 뿐이지, 저마다 깊게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용제건의 소원이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면 저렇게 숙고할 필요가 없었을 거다.
“이룰 수 있는 소원은 하나야. 소원은 무녀들끼리 상의해서 정해. 내 힘이 닿는 범위에서, 내가 불쾌해지지 않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게.”
“……무엇이든지.”
무녀 중 하나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용제건이 불쾌해지지 않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렸나 보다.
용왕신과 용족을 배신한다는 위험한 길 대신 안전한 대안이 제시되었으니 구미가 당길 것이다.
설령 그들의 배신이 실패로 돌아가 모든 게 무산될지라도, 용제건의 소원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한 이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용제건의 힘은 무한하지 않아. 무녀들 모두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건 불가능해.’
그건 무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일 거다.
하지만 나는 무녀들이 망설이거나 사양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서 다음 수를 둘 차례였다.
약속한 대로 용제건 옆에 서 있던 황룡이 입을 열었다.
“용제건, 오랜 기간 우리와 머무른 유황이 은퇴를 앞두고 있다. 마침 그렇게 됐으니 유황을 위한 소원을 들어주는 게 어떻겠느냐.”
휘이.
황룡의 말이 끝나자 면사를 쓴 무녀들이 일제히 유황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동시에 면사를 휘날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황룡궁에 잠시 바람이 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돌린 용왕신의 무녀, 용궁의 무녀들은 모두 유황을 응시한 상태로 뻣뻣하게 굳었다.
황룡은 유황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족이 네게 건넬 금은보화보다 큰 재화를 청해도 좋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들의 이능에 준하는 힘을 달라 해도 좋겠구나. 아, 그것도 아니면 불로불사(不老不死)는 어떻느냐.”
불로불사라는 말이 나오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무녀들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황룡은 무녀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는 데에 열중하느라 이를 눈치채지 못한 척 용제건과 대화를 나눴다.
“용제건, 가능하겠느냐?”
“불사(不死)는 어려워. 나보다 더 강한 힘으로 목을 베려고 들면 막을 수 없거든.”
“네가 이루어 주는 소원보다 강한 힘은 많지 않다. 거의 불사에 가깝겠구나.”
“그럴걸? 아, 불사에 비해 불로(不老)는 어렵지 않게 가능해.”
불로가 어렵지 않다니.
노화를 막기 위해 인류가 기울이는 노력을 생각하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시간이 오래도록 멈춘 무녀들에게 있어서 늙는다는 건 몹시 무서운 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가볍게 내뱉는 게 참 용제건다웠다.
고개를 끄덕이며 용제건의 말을 듣던 황룡이 유황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 시간 용왕신의 무녀로 지내 인간의 세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유황에게 있어 좋은 소원이 되겠구나. 유황, 어떻느냐.”
“저는…….”
유황의 목소리에서 차마 다 억누르지 못한 환희가 느껴졌다.
여기서 기꺼이 그 소원을 받겠다고 하면 유황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유황의 목적이 불로불사가 아니라 해도, 용제건의 힘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황이 말을 다 마치기 전, 용제건이 끼어들었다.
유황이 자기의 뜻을 말하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기다리던 용제건이 아주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황룡. 내가 이루어 주고 싶은 건 무녀들의 소원이야. 유황과 다른 무녀들의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그렇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유황이 다른 무녀들의 뜻을 저버릴 리가 없거늘.”
용제건에 이어 황룡까지 나서서 쐐기를 박자 유황이 나설 틈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황이 다른 무녀의 뜻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 소원을 이루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원을 이루는 순간까지 단 한 걸음이 남았는데 그게 무너지고 말았다.
용제건은 유황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건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에 차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갑작스레 과분한 제안을 받아 다른 무녀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유황은 무너지지 않았다.
긴 시간 배신을 준비하며 자신을 감춘 무녀답게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용제건에 대한 감사와 다른 무녀들을 향한 배려심이 묻어나기까지 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완벽한 위장이었다.
용제건은 그런 유황의 위장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운지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잘 얘기해 봐.”
“미안하구나. 내가 유황을 심려한 나머지 다른 무녀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내 말은 잊고 모든 건 너희가 정하길 바란다.”
황룡은 무녀에게 성심성의껏 사죄의 말을 전했다.
그 후엔 황룡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후보생들이 치를 시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녀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황룡의 전언이 끝나고 자리가 파할 때에도 무녀들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가벼운 잡담 하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수는 제대로 먹힌 것 같네.’
이번 후보생 시험을 망치는 데에 실패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건 유황이다.
용왕신의 무녀직을 그만둔 후에도 수작을 부릴 수는 있겠지만, 현직에 있을 때만큼 수월하게 가진 못할 테니까.
가장 적극적으로 수를 두어야 할 유황에게 소원이라는 미끼를 던지면 무녀들 전체가 흔들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윤여랑에게 날아갈 화살이 조금이라도 유황 쪽을 향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시험 직전에 무녀들을 뒤흔들면 윤여랑에게 미칠 위험이 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지금 둔 수 하나만으로는 모든 수작을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윤여랑의 안전을 확보하고 적의 수를 뒤흔드는 기반이 될 것이다.
무녀들이 모두 물러간 후,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을 후보생들을 격려하고 청룡궁에 식사 초대를 하기 위해 윤여랑에게 말을 걸었다.
윤여랑은 나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그게 그 표정이었군요!”
“표정?”
윤여랑은 내 쪽에 시선을 자주 주고 있었는데, 나를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윤여랑은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명의 초신성 특유의 수상하다는 표정이요!”
대체 나에 관해 어디서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 *
황룡의 소집이 끝난 후, 무녀들이 모인 백룡궁.
무녀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서로 바삐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용궁으로의 전이를 준비할 때처럼 여러 힘이 요동쳐 다중 전음을 감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 한, 용족들 앞에서는 전음을 쓸 수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백룡궁에 도착하고 난 이후였다.
―유황 님, 여의보주가 이루어 준다는 소원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로를 떠보는 대화를 한창 주고받고 있을 때, 현재 용왕신의 무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녹(綠)이 대표로 유황에게 말을 걸었다.
녹의 무녀는 타고난 힘이 출중하여 유황 다음으로 발언권이 컸기에 유황에게 하기 어려운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녹의 무녀가 유황에게 말을 걸자 여기저기에서 주고받던 전음이 일시에 끊겼다.
유황은 깊이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답했다.
―나는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내가 불로불사를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단다.
유황이 은퇴를 핑계로 혼자서 불로불사가 되겠다는 답변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무녀들은 대놓고 티를 못 내도 울컥했다.
지금 유황의 은퇴를 막기 위해 청룡을 비롯한 용족들 앞에서 위험한 줄을 타고 있는데, 정작 유황이 저런 말을 하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번 계승식을 두고 여러 무녀님들이 고생했지요. 유황 님이 은퇴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요, 유황 님을 위해서 용궁의 무녀들이 하나 되어 많은 일들을 준비했답니다.
녹의 무녀와 용궁의 무녀 중 최고참이 속내를 감추며 간접적으로 유황을 규탄했다.
너 때문에 고생하는데 혼자 빠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황은 만만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선 서툴게 변명하고 자신의 흠을 보안하는 것보다는 상대를 공격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오랜 시간 고여 있는 사회의 먹이사슬 최정상에 있었던 유황은 즉시 상대의 약점을 잡아 공격했다.
―우리 모두가 수고한 건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 마음이 몹시 불안하단다. 용궁에 와서 보니 ‘모든 무녀들이’ 하나가 된 건 아닌 것 같더구나.
―용궁의 무녀들을 의심하는 건가요?
용궁의 무녀 최고참이 면사 뒤에서 눈을 부라렸다.
유황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돌린 고개 쪽에는 전음에 끼지 못한 채 혼자 멍하니 창밖을 보는 막내 무녀가 있었다.
―막내 무녀가 지켜보는 후보생은 여의보주의 손님과도 아는 사이더구나. 은광고는 용족이 자랑하는 후예, 준열이의 학교이기도 해. 그런 학교에 입학할 예정인 뛰어난 아이이지.
용궁의 무녀 최고참이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막내 무녀를 괴롭히기 위해 가장 성가실 것 같은 후보생에게 붙여 뒀는데,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입을 다문 용궁의 무녀 최고참을 상대로 유황은 애달픈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그런 후보생에 관해 우리는 아는 게 거의 없단다. 내 불안을 이해해 다오.
자칫하다간 이대로 유황이 혼자 불로불사가 되고 만다.
그런 긴장감이 돌고 있을 때, 용왕신의 음성을 가장 자주 들었던 벽(碧)이 말했다.
―계승식을 무사히 마무리 짓고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여의보주가 승천하기 전까지만 우리의 소원을 정하면 되는 거잖아요?
벽의 무녀는 ‘우리의 소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유황은 여기서 과하게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날 거라고 판단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용을 죽이기 위해 오랜 세월 준비해 왔다.
유황은 편법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지만, 용을 죽여야만 자신의 온전한 안전이 확보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녀들의 지지를 잃게 되면 용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수단은 말 그대로 쓸모없는 도룡지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 급할 건 없단다. 여의보주를 이용해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의 소원을 이루었으면 좋겠구나.
유황은 자신이 불로불사가 된다는 소원을 포기하지 않고, 여지를 남기면서도 무녀 전체를 위하는 것처럼 들리는 교묘한 말을 했다.
유황은 이 화제를 매듭짓고 무녀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킬 겸 말을 덧붙였다.
―저 아이는 참 뛰어난 무녀 후보생이었지. 안 그렇니, 홍이야?
―……!
갑자기 지적당한 홍(紅)의 무녀가 몸을 떨었다.
유황은 홍의 무녀와 용궁의 막내 무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정식 무녀가 되지 못한 게 충격이 컸는지, 저 아이는 도통 우리와 어울리지 못하게 됐구나. 만약 저 아이가 정식 무녀가 되었다면 지금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홍의 무녀는 그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이례적으로 무녀가 된 홍의 무녀는 염준열과 동갑으로, 한참 어려 유황의 따뜻하면서도 칼 같은 언변에 대항하는 방법을 몰랐다.
유황은 홍의 무녀를 어르듯이 말했다.
―네가 어떻게 무녀로 뽑혔는지 잊어서는 아니 된다.
말없이 서 있는 게 지루한 건지 가만히 창문을 보던 막내 무녀는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보았다.
홍의 무녀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어 막내 무녀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네, 유황 님.
홍의 무녀는 유황의 말에 긍정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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