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92)
99. 새로운 1학년 0반 (3)
내가 향하는 목적지는 비밀 통로 끝에 있는 구형 시뮬레이터 앞이었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 앞서서 길을 걷자 천동하가 말을 걸었다.
“익숙해 보이네. 여러 번 왔나 봐.”
“네, 가는 길에 뭐가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이 앞으로는 인간만 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호족들도 알고 있어?”
“호족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옛 한국 지부장으로부터 얻은 정보 대부분은 호족과 공유했지만, 정보를 얻게 된 과정이나 비밀 통로에 관한 것은 밝히지 않은 상태다.
여태까지 수많은 정보를 공유해서 그런지 호랑이들은 모든 정보의 출처를 전부 확인하지 않았다.
호랑이들이 묻지 않고 믿어 준다는 것을 핑계로 말을 아꼈다.
‘정보의 출처를 알게 되면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해.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싶어.’
이 앞에는 황보윤이 고안한 어떤 공격 수단이 있다.
바로 ‘진명’을 가진 존재의 혼을 공격해 수면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이 그러했다.
진족과 후예는 지력에 노출되면 무의식이 흔들리고 진명이 미미하게 반응하는데, 이를 이용해 대상을 스캔하면 심중의 진명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위력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지력을 끌어다 쓰는 것에 비해 줄 수 있는 타격이 적었기에 다소 비효율적이다.
‘이건 흑막도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해. 만약 알았다면 여태까지 벌어진 사건에서 호족이나 용족과 대치할 때 한 번쯤은 그 힘을 썼겠지.’
흑막이 그 힘을 활용했다면 내 수가 크게 흔들렸을 거다.
하지만 여태까지 흑막은 진명의 존재를 이용한 공격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구나. 지력이라…….”
호족에게는 밝히지 않았다는 것과 힘의 원리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자 천동하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진족을 동생으로 삼기로 한 입장에서 이걸 밝히지 않는다는 건 꽤 고민될 거다.
하지만 이 비밀 통로를 만든 제작자가 진족에게 숨기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말해도 되는지 갈등이 되기도 할 거다.
나는 천동하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말했다.
“호족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응?”
“나중에 이 공격 수단이 드러나 호족들이 추궁하면 제 요청으로 비밀로 했다고 말씀해 주세요.”
“후배 핑계를 대라는 소리야?”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실제로 지금 부탁드리고 있으니까요.”
천동하는 내 말을 듣고 아주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 친 0반이나 마진승을 상대로 할 때마다 보이는 얼굴이었다.
“의신아, 나중에 내가 이 통로에 대해 숨긴 게 드러나 추궁당하면 내가 책임진다. 네 이름을 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 동생이 네 걱정을 하는 이유를 알겠다.”
천동하는 엄하게 말하고 다시는 그 화제를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
이동 중에 비밀 통로나 앞에 있는 구형 시뮬레이터에 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책임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여기가 막다른 길인데, 소개하고 싶다는 분은 어디에서 뵐 수 있어?”
“구형 시뮬레이터의 보스 에리어에 계세요.”
“가끔 훈련을 할 겸 이곳에 남은 수수께끼를 풀 겸 이용한 적이 있지만, 보스 룸에서 뭔가를 발견한 적은 없었는데…… 그 조건에 관해 알아냈나 보구나.”
천동하의 눈으로도 못 찾을 정도면 옛 한국 지부장이 정말 철저하게 단서를 감춘 듯하다.
이곳은 ‘이무기의 귀천’ 아이템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아이템을 소지하지 않고 보스 룸에 들어가면, 다음 같은 노이즈 섞인 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우수한 학생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면…… 숨겨진 스테이지로…….
하지만 아이템과 함께 입장하면 거의 온전한 모습을 한 옛 한국 지부장의 AI를 만날 수 있다.
한 번 입장하는 데에 성공하면 자동으로 등록이 되는 건지, 나중엔 성시완이 아이템 없이도 입장해 옛 한국 지부장과 대련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나와 함께 가면 천동하도 그를 만날 수 있겠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천동하에게 말했다.
“일단 보스 룸까지 가죠.”
파티에는 나와 천동하 둘 뿐이었지만 보스 룸까지 돌파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SSR---급의 하강형 타워 시뮬레이션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구형 시뮬레이터가 구현 가능한 기믹에는 한계가 있고, 나와 천동하는 이미 이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클리어해 봤다.
그리고 나는 플마고의 고인물로서 천동하의 이능에 관한 이해가 깊었다.
천동하의 공격 수단과 타이밍에 맞춰서 정확하게 보조하니 공략은 금방이었다.
“처음 파티를 짠 것 같지 않아! 굉장하다.”
보스 룸에 가까워지자 천동하가 그렇게 말하며 칭찬했다.
나야말로 천동하와 함께 공략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마침내 최하층의 경계, 보스 에리어로 이어지는 문 앞에 도착했다.
우우웅……!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간뿐.]
문 위에 손을 올리자 기계음과 함께 문 위로 문구가 떠올랐다.
열리기 시작하는 문을 보며 천동하가 말했다.
“의신이 너는 진짜 인간이구나.”
“네?”
“네 활약상을 보면서 어쩌면, 하고 생각했거든. 애초에 그 통로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인간인 게 확실한데.”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진작에 다른 상위 존재나 진족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하지 않았을까?
이윽고 문이 열리고 빛이 보였다.
빛 너머에 보이는 인영을 발견하고 천동하가 이능을 발동해 그 인물의 존재를 시야에 담았다.
“성국언 국회의원과 닮은 분이지만, 달라. 그분의 혈연을 기반으로 한 AI구나.”
성시완과 ‘계’새끼는 처음엔 성국언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는데, 과연 우수한 눈을 가진 천동하는 옛 한국 지부장을 바로 알아봤다.
굵직한 인상의 얼굴로 이쪽을 보는 옛 한국 지부장은 지금 봐도 성국언과 몹시 닮아 있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나와 천동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을 찾은 후배가 늘었군. 환영한다.]
천동하는 긴장한 얼굴로 옛 한국 지부장을 바라봤다.
학생회와 선도부는 비밀 결사에 관한 수수께끼를 두고 오래도록 답을 찾아 왔을 거다.
그러다 갑자기 답을 얻게 되었으니 긴장할 만도 했다.
“저 외에도 다른 후배가 왔었나 보군요.”
[그렇다. 네가 네 번째다.]
“의신이 외에도 둘이 있었구나…….”
천동하는 옛 한국 지부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보 공유를 위해 이 자리에 온 건데, 내가 끼어들기 어려운 분위기라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옛 한국 지부장은 척 봐도 통찰력이 넘쳐 보이는 천동하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듯했다.
“저는 제힘으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한반도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제가 답을 얻어도 괜찮겠습니까?”
[왜 고등학교 지하에 한반도의 명운이 걸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옛 한국 지부장이 건네준 정보들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플레이어SAT-K로는 감지가 불가능한 높은 희귀도의 동결형 이계의 위치, 용궁을 잠식하던 이무기의 존재 등 그 정보가 없었다면 대처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천동하는 옛 한국 지부장을 만난 것만으로 어떻게 거기까지 파악한 걸까?
은광고 괴담으로 취급받는 비밀 결사에 그런 정보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상했다.
“비밀 결사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본 취지가 잊히고 있죠. 그래도 그 중요성에 관해선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비밀 결사가 생긴 건 어둠의 시대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라고 들었습니다. 그때 은광고의 지하에 이런 시설을 학교 측에 숨기고 만들었다면 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동하는 얼마 되지 않는 정보를 바탕으로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천동하는 옛 한국 지부장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즈음에 사망한 분들 중, 성국언 국회의원의 혈육이 있습니다. 그분은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가 생각한 분이라면 분명 중요한 것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계신 거겠죠.”
고작 저 정도의 단서로 여기까지 정리해서 말하다니!
과연 천동하다웠다.
옛 한국 지부장의 정보를 공유할 상대로 천동하를 택한 건 실수가 아니었다.
옛 한국 지부장도 그렇게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하군.]
거기까지 하면 좋았을 텐데, 옛 한국 지부장은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나를 찾은 세 명은 1대1로 시험을 치렀다. 너도 치겠는가?]
그렇기야 하지만, 천동하는 그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는데!
천동하에게 그 고통을 맛보여 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천동하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중요한 비밀은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져야 옳게 쓰일 수 있습니다.”
옛 한국 지부장의 능력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둘의 성격을 고려하면 천동하가 옛 한국 지부장의 시험에 응하겠다고 하는 건 당연한 결과인데.
‘아니, 그래도 고레벨의 정신 공격 이능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상대의 정신을 파고들어 과거와 후회, 미래와 공포를 보여 주는 능력을 생각하니 천동하가 매우 걱정되었다.
정신적으로 몹시 건강한 성시완도 저 힘을 극복하는 데에 한참 걸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국 붙잡지 못했다.
둘이 시험을 위해 사라진 지 얼마 후.
얼굴색이 사라진 천동하가 나타났다.
“천동하 선배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천동하가 비틀거려 부축하려고 했지만, 부드럽게 거절했다.
천동하는 심호흡을 하고 홀로 섰다.
그 모습을 본 옛 한국 지부장이 말했다.
[내 손주보다는 낫지만, 나약하구나. 알고 있는 게 많은 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많다.]
“……나중에 재도전해도 괜찮겠습니까?”
[좋다. 네 생체 정보를 기억해 뒀으니 혼자 와도 이 문은 열릴 것이다.]
“감사합니다.”
천동하는 될 때까지 재도전할 생각이구나.
마음이 아팠지만, 한 번 결심한 천동하의 마음은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말을 얹는 걸 삼갔다.
“의신아, 너는 저 시험을 통과했다고 했지?”
“네.”
“너는 몇 번 만에…….”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옛 한국 지부장이 끼어들어서 발언했다.
[조의신은 한 번에 내 시험을 통과했다.]
“한 번에……!”
천동하가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내가 옛 한국 지부장을 곁눈질했지만, 저자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AI가 뭐 저렇지 싶었다.
“이능뿐만 아니라 정신도 강하구나. 나도 정진할게.”
결국 오늘은 정보 공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한 것이라곤 지하에서 끔찍한 이능을 쓰는 AI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정신 공격을 받은 천동하가 걱정됐지만, 헤어질 때까지 천동하는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려 들지 않았다.
“후배한테 걱정받을 정도라니. 이래서야 동생이 의지할 만한 형이 못 되겠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천동하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게 더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휴일이 끝나고, 입학식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