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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합숙 (3)
‘일어난 것 같은데.’
다시 잠든 건가 싶었으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사실 최악의 경우가 닥치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깨워서 낙제를 면하게 할 생각도 했다.
이능을 활용한 강행돌파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도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관종들의 행동 패턴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의도가 짐작이 갔던 탓이다.
잠시 후, 예상대로의 전개가 이어졌다.
“……왜 안 놀라지.”
“마치 우리의 천재적인 환영을 예상한 것 같군.”
평범한 외관의 현관이 오로라색 장식으로 덮이고, 화단에서는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나 핀다는 플루메리아가 피었다.
전자는 옹길동의 광림 ‘마술사의 비단 모자’로 소환한 장식품이고, 후자는 구슬비의 광림인 ‘녹색 손의 은혜’로 피운 꽃이었다.
막 자다 일어난 관종들은 시험을 앞둔 주제에 광림으로 힘을 낭비했다.
하지만 그냥 한심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장식품은 옹길동이 직접 만든 거겠지. 꽃은 구슬비가 직접 고른 거고…….’
오로라색 비단 위에는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온갖 나라의 언어로 수놓아져 있었다.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점을 빼면 비단과 비즈와 실로 엮어 낸 예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플루메리아의 꽃말 중에 환영의 의미가 있으니 방문객을 반기고자 하는 구슬비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다.
자다 깬 기색이 역력한 관종들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놀랐어.”
“……정말로?”
“……정말인가?”
“응, 들어가도 돼?”
너무 뻔한 짓을 한 점, 작은 장난질에 섞인 진심 어린 환영의 마음에 놀라긴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님을 짐작한 건지 관종들은 순식간에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
“물론이지! 들어오도록.”
“어제 청소하고 자길 잘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기껏 평범하게 꾸며도 우리의 특별함은 감출 수 없나 봐!”
“그야 괴도의 소양이 있다면 아지트를 찾아내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
옹길동의 괴도 타령이 시작되기 전에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김유리가 집 주소 알려 줬어.”
“아…….”
별거 아닌 말에 시무룩해하는 둘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니 생활감이 넘치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구슬비와 옹길동은 거실을 공동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은 자칭 위대한 드루이디스 구슬비의 공간으로, 말린 식물이 올라간 저울과 화로, 씨앗이 담긴 떡갈나무 상자 등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쪽은 마술사이자 디자이너인 옹길동의 작업장이었다.
시침핀이 여러 개 꽂혀 있는 천을 두른 마네킹, 재봉틀과 반짇고리, 메모가 적혀 있는 트럼프 카드가 보였다.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이라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건 상상이 안 갔는데, 이걸 보니 친하게 지내는 것 같네.’
두 작업 공간의 경계는 모호했지만, 경계선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거실 벽 중간에 놓인 장식장이었다.
장식장 안에는 유원지에서 구매한 듯한 공룡 마스코트 굿즈가 잔뜩 놓여 있었다.
유원지에 여러 번 같이 갔는지, 시즌 한정 상품이 여럿 보였다.
둘이 사이좋게 공룡 마스코트를 장식하고,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흐뭇해지는 광경이었으나 새삼스러운 의문이 솟았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이 사나? 짐의 양을 보면 단기 합숙은 아닌 것 같은데.’
늘 붙어 다니면서 사고를 치는 금찬솔과 왕찬솔도 같이 살지는 않는다.
옹길동과 구슬비는 대체 언제부터 함께 행동한 걸까.
저 둘이 작년 핼러윈에 처음 만났고, 그때는 서로 티격태격하지 않았나?
지금이 6월 말이니 그 시점에서 8개월 정도 지난 셈인데, 만난 직후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같이 살기로 마음먹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일단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언제부터 같이 지내고 있었어? 사이가 좋아 보인다.”
“사,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당연하긴 한 건데…….”
“그야 우리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괴도니까 같이 지내는 건 당연하다!”
구슬비는 질문보다는 사이가 좋다는 말이 더 관심을 보였고, 옹길동은 말 같지도 않은 답변을 했다.
다시 질문을 하기 전에 옹길동이 이어서 말했다.
“슬비는 고등학교에 합격한 후부터 집을 나와 야산을 전전하며 살았다더군. 내 파트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지.”
뭐라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런 고생을 하며 지냈단 말인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멀쩡한 은광고 기숙사를 놔두고 야생의 삶을 택한 건 구슬비 본인이지만, 어쨌든 그 상황을 모르고 대처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컸다.
플마고에서 구슬비가 야산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나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행적을 감추기 위해 밖에서 지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슬비는 진짜로 돌아갈 집이 없었던 거다.
죄책감으로 눈이 아득해져 있을 때, 구슬비가 끼어들었다.
“드루이디스가 자연과 하나 되어 지내는 건 수행의 일부야. 산속은 나와 어울리는 곳이었어. 위대한 내 힘이 있으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설령 그렇다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켈트에서 가장 위대한 드루이드인 멀린은 펜드래곤 왕가의 보좌로서 브리튼의 왕성에 머무르지 않았나. 굳이 자연 속에서 위험과 불편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옹길동의 다정한 말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둘이 관종이고, 한쪽은 집이 없다고 해도 이성의 동급생에게 같이 살자고 권하는 건 매우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옹길동은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진실된 눈을 하고 있었다.
옹길동은 구슬비를 곧게 응시하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애석하게도 나의 힘이 부족하여 파트너를 왕성에 체류시키는 건 어렵지만, 괴도의 아지트에서 함께할 수는 있다. 부디 오래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막 잠에서 깨어난 티가 역력한 차림에 과장된 어조로 저리 말하니 희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옹길동의 진심이 느껴져 우습지는 않았다.
구슬비에게도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볼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옹길동의 사고회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모르겠다만, 구슬비는 저 괴도 파트너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런 비유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지금 구슬비는 주수혁이 사격 훈련을 마친 안다인을 보았을 때와 닮아 있었다.
가을 소풍 중, 보물찾기를 하던 때에 민그린과 친하게 지내는 옹길동을 보고 구슬비가 서운해하긴 했었는데, 지금 표정을 보니 그때보다 마음이 커진 것 같았다.
‘정말 많은 게 변했구나.’
플마고 속에서 둘이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둘이 만나서 관종 파트너가 되고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게 놀랍게 느껴졌다.
둘이 내가 존경하고 아끼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게 느껴져 아주 기뻤다.
기쁜 마음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을 때, 뒤늦게 시선을 느낀 구슬비가 정신을 차렸다.
“……난 쟤 파트너지만 괴도는 아니거든? 화려하고 눈에 띄는 파트너인 건 맞지만.”
구슬비는 지금 본인이 옹길동의 파트너임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옹길동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종들은 서로 파트너라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둘을 깨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사이좋은 둘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갑작스러운 충격 탓에 곧바로 사라졌다.
“내 파트너의 상황을 알고, 같이 지내게 된 건 다 네 덕분이다. 적벽괴도를 찾기 위해서 협력하던 게 계기가 되었으니까.”
손발이 오그라드는 감각과 함께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런 상황이 올까 봐 깨우러 오기 싫었는데…… 그래도 오글거림과 반 아이들의 낙제를 저울질한 결과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둘이 같이 살게된 건 나 때문이었나……!
‘그 단어’ 소리에 잠시 머리가 아득해져 있을 때,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말했다면, 이미 눈치챘을 것 같군.”
“뭐를?”
“이곳은 괴도의 아지트이고, 너는 적벽괴도다. 그럼 뭐가 있을지 뻔히 보이지 않는가!”
“맞아, 쟤보다 한참 일찍 활약한 적벽괴도잖아. 그게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하긴 해.”
‘그 단어’에 머리가 아득해져 있는 사이, 옹길동이 계단 너머로 보이는 2층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조금 보이는 문은 붉은색이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관종들다운 색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붉은색의 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연호하고 있는 ‘그 단어’와 엮여 있는 색이라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내가 회피하고자 하는 어느 사실을 두고 옹길동이 못을 박았다.
“그렇다, 이 괴도의 아지트에는 적벽괴도 네 방도 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 단어’를 위한 방이 생겼다…….
그런 게 이 세상에, 그것도 은광구 안에 존재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를 위해 공간을 준비했다는 건 참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 단어’가 붙은 방의 존재가 달갑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용궁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용궁에서는 그냥 방이 생긴 정도가 아니라 궁 세 개가 내 소유가 되고, 내 이름이 붙은 누각이 생겼지만 말이다.
둘은 방 소개를 할 기세로 흥분하여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동료를 맞이하기 위해 비워 둔 방이 있었는데, 적벽괴도 네 방의 옆에…….”
“……아침 식사를 포장해 왔어. 식기 전에 먹자.”
‘그 단어’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꿨다.
처음 왔을 때보다 매우 오그라든 내 손이 종이봉투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저 둘을 위해 준비한 아침 식사가 들어 있었다.
관종들은 드디어 ‘그 단어’의 연호를 멈추고, 감동 어린 눈으로 말했다.
“뭣, 우리가 대접하려고 했는데!”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면 지각할 거야. 식당에 준비해 두고 있을게. 학교 갈 준비하고 와.”
“앗, 그러고 보니 우리는 또 지각할 뻔했지!”
“쟤가 왔는데 지각할 수는 없어!”
둘은 허둥지둥 몸단장을 하기 위해 2층에 있는 각자의 방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나는 종이봉투를 열어 식사를 준비했다.
저 관종들이 또 늦잠을 잔다면 아침을 준비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사 온 아침 식사였다.
소풍 때나 간식 시간에 둘이 잘 먹던 것들을 생각하며 메뉴를 고르긴 했는데, 아침 식사 취향까지는 알지 못해 한식과 양식 둘 다 준비했다.
‘둘을 깨우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더 늦어질 걸 대비해서 교실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골랐는데.’
검은깨를 뿌린 소불고기 장조림 주먹밥과 호밀 빵 터키 샌드위치를 냅킨과 함께 식탁 위에 세팅하고, 따뜻한 음료와 찬 음료를 같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2층의 어느 방문이 열렸다.
끼이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열린 방문은 구슬비의 방도, 옹길동의 방도 아니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단어’의 방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선 이가 2층 계단 위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게 누구인지 알아챘다.
악몽을 찾고 있다는 등교 거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