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12화 (12/273)

특별한 무인도 (2)

‘아버지가 어제 그렇게 신신당부하셨는데···. 지금 상황 보시면 까무러치시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에 몬스터가 없다는 거다.

던전의 덫에 걸렸음을 인지한 순간, 바로 매직로브의 내장 스킬인 ‘중급 방어막’을 펼쳐서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만큼 얼른 안전 텐트를 꺼내 들었다.

‘설마, 던전 안에서는 설치가 안 되는 거 아니지?’

안전 텐트가 설치되냐 안 되냐에 따라 생존능력이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치 버튼을 눌렀고.

[안전 텐트가 설치되었습니다.]

[설치된 안전 텐트는 10분간 해체할 수 없습니다.]

무사히 설치되었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란스런 머릿속을 정리하잔 생각에 일단 텐트 안에 기어들어가 대자로 누웠다.

“하하···.”

고요한 텐트 속, 가만히 누워서 텐트의 박음질 상태를 살피던 나는 돌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분 전.

나는 운 좋게 마력탄으로 잡은 꿩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솔잎을 넣어 쪄먹어도 좋고, 단순하게 구워 먹어도 좋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갑자기 멧돼지가 나타나 내가 사냥한 꿩을 물고 산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에 단단히 빡친 나는 녀석의 뒤를 따랐고, 끝내 마력탄을 멧돼지 뒷다리에 맞히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렇게 아침밥이 꿩고기에서 멧돼지 고기로 업그레이드되기 직전.

어디서 나타난 건지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내게 몸통 박치기를 가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죽이려던 개체의 새끼 같았다.

보통 사람이면 어미를 살리겠다는 새끼의 발악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지만···.

‘성체보다 새끼가 부드럽고 맛있겠지?’

내겐 고기 1인분 추가의 상황일 뿐이다.

단백질의 대량 수확을 기뻐하며 새끼멧돼지를 제압하려던 그때.

나는 보았다.

새끼멧돼지 너머에 위치한 산속의 우물을.

‘어? 여기 우물이 있었나?’

[몽마의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하루 동안 던전 내에서 얻은 경험치와 아이템 습득량이 2배 증가합니다.]

[몽마의 던전으로 전송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이어진 거다.

짧은 회상을 끝낸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멧돼지를 쫓던 길이 황금 고블린을 잡으러 갔던 길이라 너무 방심했다.

새끼 멧돼지의 박치기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원래의 길을 살짝 이탈했고, 고작 그 몇 걸음 차이로 던전에 빨려 들어왔다.

아무래도 던전의 경계 끝에 딱 걸린 모양이다.

던전의 입구로 보이는 우물도 원래 다니던 길에선 보이지 않는 사각에 위치해 있었고.

“너 행운을 가져다주는 거 아니었냐? 등급이 높으면 그만한 값을 해야지.”

나는 인벤토리 창 첫 번째 칸을 차지하고 있는 ‘행운의 탈리스만’을 보며 불만을 토해냈다.

[행운의 탈리스만 / 희귀]

-소유자에게 행운을 더해주는 아이템.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효과가 적용된다.

황금 고블린을 잡고 얻은 보물이건만 어째 성능이 시원치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 던전에 들어오는 편이 행운이라는 걸까?

“몽마의 던전이라.”

그냥 텐트 안에서 제한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문제없이 탈출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최초 발견 보상으로 경험치 습득량과 아이템 습득량이 두 배 증가한다는 내용이 눈에 밟혔다.

‘일단 던전을 살펴볼까? 안전 텐트 주변 정돈 조사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전 텐트는 직경 5미터의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보호구역이 있다.

텐트 밖으로 나가더라도 일정 공간은 사용자를 지켜준다는 뜻이다.

그럼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되는 거니 조사 정돈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보자.’

그래서 나는 느릿느릿 텐트를 나섰다.

“어?”

그런데 텐트 밖의 상황이 이전과 달랐다.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에 낯선 존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몽마의 던전이란 거 보고 혹시나 싶었는데···.’

마치 나를 유혹하듯 나신이나 다름없는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RPG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종류의 몬스터, 서큐버스였다.

겉모습은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등 뒤로 작은 박쥐 날개와 꼬리를 달고 있어서 약간의 이질감이 들었다.

물론, 그마저 색기로 승화시키는 게 눈앞의 존재였지만 말이다.

“저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잘난 외형과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빼면 별것 없었다.

보기엔 좋지만, 이런 정체 모를 것에 발정하는 인간이 있긴 할까 싶은 느낌.

눈앞에서 열심히 춤도 추고 애교도 피우며 안전 텐트의 구역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뜩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혹시 안전 텐트 안에 있어서 서큐버스의 유혹에 안 넘어가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

그래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텐트의 경계 앞에 서고 상체를 채찍처럼 휘둘러서 머리를 잠깐 보호구역 밖으로 내보냈다 들어오게 하는 거다.

그렇게 나는 괴상한 자세로 실험을 시작했고.

-우흉~!

-쿠쿵!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돈다.

더불어 어서 저 여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텐트 안에서 가만히 지켜본 그녀의 모습이 모노톤의 흑백 영상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모습은 컬러풀한 고해상도의 3D 영상이었다.

심지어 비음 가득한 목소리는 싸구려 PC방 스피커에서 웅장한 서라운드 사운드의 홈시어터로 변해 있었다.

“헉헉!”

상체의 반동에 의해 머리가 잠깐 구역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무섭네. 서큐버스.’

저건 지금까지 상대한 몬스터와 전혀 다른 종류의 몬스터다.

그저 몸만 힘든 다이어 울프나 오크와 달리 서큐버스 앞에선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래선 졸렬 전투도 불가능하다.

텐트의 보호구역 내에선 적을 공격할 수 없으니, 공격할 때는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이건 나가는 순간 끝이다.

바로 붙들려서 사망 엔딩.

“그냥 텐트 안에서 강제 퇴장될 때까지 존버해야 하나.”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유혹의 댄스를 멈추지 않는 녀석에게 그냥 등을 돌려 버렸다.

나는 고민했다.

저 녀석의 정신 공격만 어찌어찌 막으면 서큐버스의 전투력은 높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엔 돈이 들지 않고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에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응?”

눈알을 굴려 던전 내부를 살피던 내게 무언가 포착되었다.

그게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살폈더니···.

“상자?”

벽을 판 공간에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던전에 상자라니···.

절로 흥미가 샘솟는 소재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져오고 싶지만, 문제는 서큐버스다.

녀석을 뚫고 상자에 닿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젠장, 처음 텐트 칠 때 주변을 잘 살펴보고 치는 거였는데.”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있던 것을 급하게 텐트를 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조급함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는 교훈을 얻게 된 순간이다.

‘잠깐···. 시야를 좁게 한다?’

그렇게 자신의 안일함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나는 문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서큐버스의 유혹이 시각 효과에 의한 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던전 바닥의 먼지와 흙을 모아 움켜쥐고 서큐버스 쪽을 향해 뿌렸다.

그러자 먼지에 의해 서큐버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반동을 이용한 머리 내밀기를 시도했다.

“오?”

먼지에 의해 서큐버스의 모습이 흐릿하게 가려지자 이전처럼 파괴적인 효과는 없었다.

이로써 서큐버스는 제대로 바라보지만 않으면 유혹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메두사도 아니고.

“이러면 여러 가능성이 열리지.”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먼지 가루를 활용해 서큐버스를 공격해 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상자를 챙겨 오는 거다.

‘상자를 가져오는 동안 서큐버스가 물리 공격을 해오지 않는단 보장이 없지. 어차피 녀석을 제거해야 마음이 편해져.’

결국, 서큐버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쓱! 쓱! 쓱!

나는 열심히 바닥을 쓸며 먼지가 잘 날리는 흙을 모았다.

그래서 그걸 인벤토리에 넣어 봤고, 문제없이 저장되는 것을 확인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허공에 흙먼지를 뿌리며 안전 텐트를 벗어났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고개 숙이고 튀는 거야.’

전투 방식은 심플하다.

굳이 검을 휘둘러서 먼지를 이리저리 날릴 필요 없이, 마력탄을 모조리 쏟아붓기로 했다.

만약 마력탄을 전부 쓰고도 죽이지 못하면 안전 텐트로 돌아와 마력을 채우고 다시 나가서 마력탄을 쏠 예정이다.

-투투투투툭!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방법은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0발의 마력탄을 맞은 서큐버스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급 서큐버스를 토벌하여 경험치 400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2,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실컷 고민하고 여러 걱정을 한 것치곤 의외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물론, 이 싸움을 가능케 하기 위한 궁리와 마력을 한 번에 소진한 전투 방식 덕이긴 하지만, 상상치도 못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에 맥이 탁 풀렸다.

[하급 서큐버스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6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2묶음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 최초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킬북 ‘매력’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 고급 소재]

-하급 서큐버스의 마력이 깃든 머리카락으로 로브나 망토 제작에 사용할 수 있다.

[매력 / 중급 스킬북 / 패시브]

-이성이 나에게 느끼는 매력이 증가한다.

던전의 최초 발견자 보상과 서큐버스의 최초 토벌 보상이 더해진 덕일까?

황금 고블린이 아니라 일반 몬스터를 잡고 스킬북을 먹은 건 처음이다.

그런데 스킬이 매력이라니, 서큐버스 답다.

[매력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나는 바로 스킬을 익혔다.

전투에 도움은 되지 않지만, 인생엔 도움이 될 테니까.

“휴우···.”

무사히 서큐버스를 토벌한 덕분에 안전 텐트가 쳐져 있는 동굴엔 다시 적막이 감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자연히 정체불명의 상자로 향했다.

‘미믹은 아니겠지?’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돌 하나를 주워 상자에 던졌다.

-퉁퉁.

묵직한 나무 울림 외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가까이 다가가 검으로 상자를 찔러봤지만, 반응이 없어서 일반 상자라 판단했다.

“오? 오오!”

그리고 상자의 내용물을 본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루엣 고글 / 최고급]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환경(어둠, 분진, 연기 등) 속에서도 사람과 몬스터의 모습을 실루엣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사람은 흰색, 몬스터는 붉은색 실루엣으로 표시된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나온 아이템은 이 던전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설명만 봐선 야간 투시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디자인은 라이딩 고글처럼 생겼다.

경량과 기능에만 중점을 둔 못생긴 고글 말고 나름 디자인도 신경을 쓴 형태.

‘시인성이 좋은데?’

고글을 착용하자, 마치 나를 위해 제작된 것처럼 부담 없이 눈가에 안착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기능이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색감이 빠진 듯한 회색의 세상이었지만, 시인성이 좋아서 야간투시경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 정도면 고글을 쓰고 칼질하는데도 문제없어 보였다.

나는 만족감을 드러내며 고글을 머리 위로 올린 뒤, 상자에 든 나머지 물건들을 살폈다.

[45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포션 5개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금화 형태의 코인과 하급 포션 외에 특별한 아이템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고글만으로도 충분한 보물이라 할 수 있기에 나는 아쉬워하지 않고 상자를 닫았다.

-툭.

“응?”

그런데 상자의 뚜껑이 닫힌 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다시 상자를 열었더니, 상자의 앞쪽에 판자 하나가 떨어져 있고, 그 위에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뭔가 그럴싸한 물건.

나는 그것을 가지고 안전 텐트로 돌아왔고, 조심조심 펴서 내용을 살폈다.

[몽마의 던전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그건 이 던전의 지도였다.

지형만 그려진 게 아닌,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몬스터들의 활동 반경까지 상세히 표기된 정밀 지도.

그뿐 아니다.

[한반도에 배정된 메인 시나리오 20조각 중 11번째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파생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파생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지도 뒤쪽에는 편지와 같은 어떤 문구가 적혀 있었고, 그 문구를 눈에 담는 순간 위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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