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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192화 (192/273)

192화 폭주 (3)

-쾅! 콰아앙!

“컥!”

현재 윌리아 팀에 소속된 인도인 아르준 자다브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다.

윌리아의 지시 덕분에 서백호와의 전투는 그럭저럭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전투가 지속되고만 있을 뿐, 전황은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다.

좀 전에도 동료 한 명이 복부를 꿰뚫려 쓰러지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방패수 한 명이 목젖을 베이며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13명이 남아 수적 우위에 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던 윌리아의 지시를 뚫고, 점점 사망자가 늘어 간다는 점에서 맞서 싸우는 이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이렇게 상대하기 힘든 거지?’

서백호와 아르준의 레벨 차이는 9.

초반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긴 하지만, 이리도 일방적인 전투가 될 정도로 큰 격차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상대에게 변변한 타격 한번 못 주고 가까스로 방어만 이어 가는 게 고작이었다.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

[잘한다! 역시 우리의 여신 윌리아 님!]

[지금까지 저 남자 상대하고 두 방 이상 버티는 사람들은 너희가 유일하다!]

[버텨라, 그럼 기회는 온다!]

[아르준 파이팅!]

그런데 웃긴 건 개인 방송 채팅창은 응원과 환호로 가득하단 거였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눈앞의 상대가 지금까지 얼마나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 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밀리고 있음에도 전투가 지속되고 있단 사실 하나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거 아니겠는가.

‘정작 문제는 아직도 그의 칼끝을 못 쫓겠다는 거야. 윌리아 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난 진작 당하고 말았겠지.’

서백호의 공격은 시간이 지난다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으로 좇지 못할 만큼 빠른 데다가 변칙적인데도 불구하고 검이 무거워 파괴력까지 높았다.

가만히 지켜만 보는 입장이었다면 감탄사를 흘릴 만큼 아름다운 검격이었지만, 그 검이 자신에게 향해지니 절로 숨이 막혔다.

‘좋지 않아. 차라리 혼자라도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불타오르는 채팅창의 반응과 달리,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실시간으로 체감 중인 그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뿐이었다.

덕분에 아르준의 머릿속에 ‘도주’란 비겁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1후좌12격!”

“네!”

하지만 윌리아의 지시가 없으면 공격에 대응조차 못 하는 마당에 도주 타이밍이 보일 리 만무.

아르준은 윌리아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움직여야 했다.

‘그래, 내 능력으로 도주는 뭔 도주냐.’

생각해 보니 수많은 시청자가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데 도망친다면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될 거다.

더구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르준 혼자만이 아닐 터.

내색은 안 해도 다들 참고 있을 것이다.

“지원군이 있습니다! 버티세요!”

그때 윌리아의 외침이 이어졌다.

‘지원군?’

현재 전투는 자신들이 불리하긴 하지만 제법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

만약 여기에 지원군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반전이 가능하다.

때문에 모두의 머릿속에 버티면 이긴다는 생각이 자리하기 시작하며 힘을 낼 수 있었다.

-콰아앙! 콰아악!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서백호의 공격이 연거푸 쏟아지자, 아르준을 포함한 파티원들은 언제 사기가 높아졌냐는 듯 다시 주눅이 들었다.

“큭!”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려온 억눌린 신음 소리에 아르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백호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나 싶더니, 놀리듯 방향을 틀며 곁에 있는 여성 세검사를 공격한 것이다.

전광석화처럼 뻗어지는 그의 검은 종착지가 어디인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머리일 수도 있고, 가슴일 수도, 다리일 수도 있다.

“2좌9격!”

정확한 타이밍에 이어지는 윌리아의 외침이 그들의 판단을 대신해 주었지만…….

여성 세검사가 급히 휘두른 검엔 충분한 힘이 실리지 않아, 서백호가 그녀의 검을 그대로 밀어내며 어깨를 베어 냈다.

만약 검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으면 베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터이다.

-휙!

하지만 전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서백호는 상처를 입었다고 봐주지 않고, 확실히 끝내기 위해 여성 세검사를 향해 후속 공격을 가했다.

이건 대련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윌리아는 아르준을 포함한 공격진에 대응을 지시하고 자신도 마력탄을 날리며 그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서백호는 모든 공격을 가뿐히 피해 내며 끝내 여성 세검사의 목을 취했다.

-툭. 툭.

마치 볼링공처럼 바닥에 묵직하게 떨어지는 머리.

그러자 머리를 잃은 신체가 바닥에 쓰러지며 빛과 함께 사라졌다.

이벤트이니 실제로 죽은 건 아니지만, 역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르준은 헛바람을 삼켰다.

마치 다음엔 네 차례라는 듯 서백호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란 건가.’

이전까지 탐색전을 하듯 약점을 찾아 파티를 여기저기 두들겼던 서백호.

하지만 쉬이 빈틈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이제부턴 한 사람씩 찍어 누르는 것으로 그의 방침이 바뀌었다.

‘젠장!’

덕분에 다음 타깃이 된 아르준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 * *

생존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많은 사냥꾼이 NPC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NPC 사이에도 포텐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거다.

그중에서도 내 동료인 윌리아와 시에나는 매우 특출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번 이벤트 랭킹에서 내 뒤를 이어 2위,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인간들을 장기말 삼아 내게 대응하는 윌리아를 보고 있노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확실히 윌리아는 대단해. 지금까지 상대했던 사람들과 전혀 다르네.’

NPC의 포텐셜에 대해선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데, 현재 단계에서 가능성을 추측해 본다면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순서’다.

윌리아는 모든 NPC 중 최초로 인간의 동료가 되었고, 시에나는 엘프라는 특수 종족 중 첫 번째로 인간의 동료가 되었다.

때문에 이런 순서가 능력치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마스터 차이’.

NPC를 동료로 받아들인 마스터의 수준이 그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추측이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지만, 나를 비롯해 뛰어난 사냥꾼과 파티를 맺고 있는 NPC 역시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태생적 차이’.

슬프지만 인간처럼 NPC들도 태생에 따라 잠재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거다.

이게 맞다면 나는 운 좋게 뛰어난 NPC들만 골라 동료로 들인 게 된다.

확실하다곤 볼 수 없지만, 현재로선 이 3개가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이라 할 수 있다.

‘야, 이 자식아 살살해! 나 나중에 윌리아한테 혼난다고!’

나는 윌리아의 파티를 거칠게 압박해 나가는 내 육신을 향해 속으로 그렇게 외쳐야 했다.

이 멍청한 육신은 벌써 윌리아의 동료를 셋이나 처리했으니 말이다.

보상은 짭짤했지만, 윌리아의 살벌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등 뒤가 시려 왔다.

‘이 아저씨 중동계인가? 아니면 인도? 제법 칼 좀 쓰는데?’

그렇게 전투를 진행하다 보니, 윌리아의 파티에서 메인 딜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아저씨가 꽤나 잘 버텼다.

“큭!”

물론, 다섯 수를 넘기지 못하고, 팔 하나를 내게 헌납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나를 상대로 이 정도 버틴 사람은 얼마 없다.

아무리 윌리아의 백업이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서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였다.

이제 다음 일격이면 윌리아 팀의 핵심 공격수도 목숨을 잃게 될 터.

점점 후환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였다.

[돌아와! 어서 나를 보호해!]

머릿속에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진 것이.

‘뭐야, 이 서큐버스 새퀴, 이젠 아예 나한테 다 떠넘기냐 했는데 뒤에서 혼자 싸우고 있었나?’

그리고 내 몸은 서큐버스의 명령에 따라 윌리아의 팀과 싸우다 말고 냅다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죽었다 살아난 중동 사람인지 인도 사람인지 헷갈리는 외형의 남성이 바닥에 주저앉는 게 보였다.

“뭐 합니까! 쫓아요!”

“네? 저 팔 하나 떨어진 상태인데요?”

“회복약 있잖아요!”

“하급 회복약이라 팔이 자랄 정도는 아닌…….”

“떨어진 팔은 레벨업하면 다시 자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윌리아의 다그침에 그 남성은 피가 쏟아지는 팔을 하급 회복약으로 지열만 한 채 내 뒤를 따라 달려왔다.

‘윌리아 무서워…….’

아무래도 내가 서큐버스랑 놀고 있어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윌리아는 내 이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뒤를 쫓으며 마력탄을 날려 댔다.

하지만 나는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가볍게 피해 냈고, 잠시 후 특수 이벤트 몬스터인 내 주인님께서 여성으로만 이뤄진 파티와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응? 시에나?’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성 파티의 리더는 시에나였고, 파티는 모두 궁수들로만 이뤄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단순히 우연이라 보기엔 너무 공교롭지 않나.

그래서 채팅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알고 보니, 이 엘프녀가 여친님이 지나왔던 길에 있더라.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 그 사실을 여친님께 알려 줌.]

[그럼 뭐 해? 게임처럼 귓말이나 쪽지를 보낼 수도 없는데.]

[ㅇㅇ그래서 여친님이 자신의 방에 있던 시청자를 엘프녀 방에 보내서 소통을 시도함.]

[아아, 그 방법이 있었네. 그럼 서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겠구나.]

[그런데 그거 꼼수 아니냐?]

[무슨! 이게 바로 개인 방송의 묘미지!]

덕분에 뒤늦게나마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윌리아가 나를 물고 늘어지며 시간을 끄는 형태로 싸웠던 이유도.

‘제법이네.’

개인 방송은 두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일 텐데도, 이를 잘 활용하는 거 보면 괜히 내가 뿌듯해진다.

“우왁! 변태남 왔어!”

물론, 이벤트 서큐버스와 싸우던 시에나의 외침에 내가 그런 거로 뿌듯해할 입장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나는 시에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날카로운 그녀의 궁술에 이동 경로를 틀어야 했고.

-퍽!

하필이면 그곳에 윌리아가 미리 날린 마력탄이 있어서 날아드는 총알에 몸을 날린 꼴이 되었다.

“큭.”

서큐버스의 꼬봉이 되고 처음으로 나온 유효타였다.

역시 윌리아와 시에나는 그동안 함께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호흡이 잘 맞았다.

“오늘은 우리 백호를 정정당당하게 팰 수 있는 날이로군.”

내가 평소 시에나에게 뭘 잘못했을까?

서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말을 잃어야 했다.

“윌리아!”

“그래!”

그리고 윌리아와 시에나가 동시에 내게 공격을 날렸고, 나머지 파티원들은 우르르 이벤트 서큐버스에게 달려들었다.

* * *

[이, 이럴수가 최강의 패를 얻고도 당하다니.]

이벤트 서큐버스는 끝끝내 윌리아와 시에나 파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녀석이 사망하자마자, 나는 정신을 옭매고 있던 구속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졌다.

-저벅저벅.

그리고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정신이 돌아와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음에도 나는 감히 일어서지 못하고 지면에 얼굴을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몬스터에게 조종당했다는 사실이 쪽팔리기도 했지만, 윌리아를 마주 보는 게 너무 무서웠다.

“백호 님?”

“아, 넵.”

하지만 윌리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언제 죽은 척했냐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복장 여기저기가 찢기고 엉망이 된 헤어스타일의 윌리아와 시에나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생채기가 가득했던 몸은 그녀들이 특수 이벤트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업을 하자 사라졌다.

하지만 레벨업으로 복구가 되는 것은 부상뿐, 손상된 의류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은 복구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단발이 되고 말았네요,”

“단발도 아름다우십니다.”

윌리아의 찰랑거리던 긴 머리가 똑단발이 되었다.

전투 중 내 검이 그녀의 목을 스치면서 머리카락을 단번에 베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전 시에나보단 낫죠.”

“…….”

하지만 시에나는…….

앞머리가 날아갔고 말았다.

이마가 정수리까지 연장된, 흔히 변발이라 불리는 스타일이 되고 만 것이다.

“머리가 시원해.”

“이, 이벤트 끝나면 다시 복구되지 않을까요?”

나는 얼른 입고 있던 티셔츠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시에나의 머리 위에 두건 형태로 씌워 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힙해 보이는데요?”

“죽을래?”

과정이 정상적이지 못했지만, 솔직히 이벤트 서큐버스에게 묶여 있는 동안 본 이득이 상당하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좁혀지긴커녕 더 벌어졌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번 이벤트도 문제없이 1위를 가져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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