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천국과 지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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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천국과 지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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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천국과 지옥 사이
2023.02.03.
저녁 8시.
엘스텔라 호텔 지하 클럽에서 구원후와 술잔을 마주한 서준은 계속 맴도는 그녀 생각에 골몰했다.
오점 없는 자신의 미간이 구겨졌다 펴지길 반복하는지도 모른 채.
“…….”
내가 왜 그랬을까.
엄소연을 옥상에서 발견한 순간 미친 듯이 달려들어 부서뜨릴 듯 끌어안고 마구 키스할 뻔했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사납게 움켜쥐어 구겨버리고, 도로 주워 지갑 안에 고이 간직한 그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답지 않았던 그때의 케케묵은 감정이 그 순간 심장까지 미치게 뛰게 한 걸까.
머리와 몸이 따로 놀던 게 몇 시간 전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옥상에서의 자신이 무척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서준은 꽉 쥔 주먹에 더 힘을 실었다.
“…….”
그런데, 그녀는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
슬픔은 저가 가져갈 테니 행복해지라고. 저도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예쁜 손글씨로 말했던 그녀가 말이다.
왜 싸늘한 날씨에 옥상 끝에 외로이 서 있었을까. 왜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은 듯 숨죽여가며 조용히 흐느꼈을까. 무엇이 그 커다란 눈시울을 그토록 서글프게 적셨을까.
뜻대로 되기보다 엇나가기 일쑤인 세상이 견디기 힘들었을까. 그게 아니면 몹쓸 남자라도 만났나. 그놈이 울리고 떠난 건가. 하긴, 엄소연이 울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잖아.
한 침대에 같이 있던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일방적인 사실 앞에 무방비하게 던져진 난 어처구니가 없어 화도 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감정일 뿐. 내가 싫어 가버린 그녀를 굳이 찾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3년 전 그렇게 마무리 지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다시 마주친 순간 난 설렜던 것도 같다. 전과 다름없이 예쁘게 반짝이는 눈빛에. 여전히 앳돼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숙해진 아름다운 모습에.
그래.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그동안 잘 지냈냐는 상투적인 안부조차.
심지어 낯선 사람을 대하듯 꾸벅 인사하며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내 앞에서 또 사라졌지.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나에 대해선 한 톨의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것처럼 말이야.
이 태서준이 네게 고작 그것밖에 안 됐던 거야?
내가 그렇게 불편했냐고!
사람을 사람으로 잊는다는 네 말처럼 감정은 감정으로 잊히지. 그 모든 걸 가능케 한 너를 난 무엇으로 지워야 할까.
그 방법을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알겠더라.
미련이라 할 것도 없는 작은 감정이 내 안에서 세월의 위엄을 먹고 몸집이라도 불렸을까. 그래, 그래서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엄소연 때문에 돌겠거든. 네가 미치게 얄밉고.
그러니 어떡할까.
내 눈에 안 띄었다면 모를까, 내 손바닥 안에 절로 굴러들어온 널 그냥 보낼 순 없을 것 같은데. 못된 장난이라도 쳐야 더러운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거든.
갑자기 불쾌감이 엄습한 서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선명한 입매는 부드럽게 위로 휘었다. 그처럼 태서준의 감정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널 뛰고 있었다.
‘마침 연락할 참이었는데, 여기 있었네요. 저녁 식사 같이합시다.’
‘아닙니다. 전 가볼 데가 있어요.’
‘남친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매일 뭐가 그리 바쁩니까?’
‘없으니 만들러 가야죠.’
옥상을 내려가기 직전 엄소연은 뒤늦게 그곳으로 올라온 구원후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 서준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였다. 인상 쓰는 표정 위로 안도하는 미소가 덧대어진 건.
귀에 미각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남자가 없다는 소연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달게 스며들었으니까.
“얼씨구?”
서준의 오묘한 표정 변화를 줄곧 지켜보던 원후가 피식거리며 꼰 다리를 풀어 다시 반대쪽 다리를 위로 올렸다.
“사람 앞에 앉혀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친 머리가 아직 덜 나은 거 아니야?”
비스듬히 숙인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린 서준이 피식 웃었다.
“……보다시피.”
겉보기론 멀쩡했다. 그러나 혼자 웃다, 찡그리다, 기분마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영 이상했다. 하지만 원후는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보는 게 먼저였다.
“나도 좀 알면 안 될까.”
“뭘.”
“엄소연 씨와 너 구면인 것 같던데.”
“오래전에 한 번 스친 적은 있지.”
이전의 모호한 표정을 오만한 미소로 싹 갈아치운 서준은 크리스털 잔을 입으로 가져가 호박색 액체를 두어 모금 삼켰다.
“한 번 치고는 두 사람 눈빛이 꽤 끈적하던데?”
“네 눈이 끈적한 건 아니고?”
촬영 현장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것쯤으로 이해한 원후는 대표실에서 했던 얘기를 은근슬쩍 다시 꺼냈다.
“그건 그렇고. 너 원래 다작하는 놈이잖아. 한동안 쉬었으니 몸 푼다 생각하고 드라마나 하자니까.”
“싫다고 했다.”
“정 그렇다면 별수 있나. 드라마 투자자에게 직접 어필하는 수밖에.”
말인즉슨 물주의 시장이라는 그곳에 엄소연을 내놓겠다는 뜻이었다. 돈 냄새 진동하는 승냥이들의 소굴에 말이다.
“엄소연 씨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또 알아? 여주도 가능할지.”
물론 엄소연에게 스폰서를 엮겠다는 건 원후의 진심이 아니었다. 얄팍하게나마 두 사람의 인연이 닿아 있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걸며 사업가로서 엄살 가득한 너스레를 살짝 던져본 거였다.
“그 비루하고 지저분한 방법을 네가? 회사가 힘든 건 아닐 텐데 왜 일러실까.”
“급한데 뭘 못 해.”
비정한 세상을 비범하게 헤쳐가는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없다. 수시로 별이 뜨고 지는 연예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바닥의 어두운 현실은 확고한 여배우의 생명력도 돈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그 명맥이 유지된다. 유정화를 통하지 않고서도 그 실상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서준은 쓰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구원후가 그렇게 사는 거 이모님은 알고 계시나.”
“글쎄. 어머니가 촉은 좋으니 아시지 않을까. 하루도 빠짐없이 나 망하길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랬으면 벌써 그 꼬투리로 내 사업 접고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라고 성화셨겠지.”
구원후의 집안 사정은 그러했으나 그가 망하기엔
는 지나치게 견고했다. 저나 원후나 집안에서 같은 처지인 걸 비꼬듯 서준은 까만 눈동자가 빛나는 얼굴에 빈정거리는 실소를 섞었다.
“불쌍한 녀석.”
“나 불쌍한 거 아는 녀석이 이래?”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면 재미없는데.”
“그래, 네 뜻은 알겠으니 그럼 오늘은 진탕 술이나 마셔보자.”
“그러든가.”
한 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녀석 아닌가. 원후는 이쯤에서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희석하지 않은 독한 술을 물처럼 쭉 들이킨 서준은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 잔을 들어 서로의 잔에 치얼스.
두 남자는 독한 양주를 쭉 들이켰다.
평범을 한참 압도하는 큰 키와 우월한 마스크도 그러하지만, 전신에 흐르는 귀족적인 세련미까지 두 남자의 외양은 다른 듯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고혹적인 카리스마는 태서준이 한 수 위였다.
몇 잔을 더 마시는 동안 서준은 침묵했고, 원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정적 속에 흐르는 끈끈한 유대감은 친형제 못지않았다.
“구원후…… 시나리오 줘 봐.”
섬세한 손끝으로 날카로운 턱선을 매만지던 서준이 느릿하게 혀를 굴렸다.
스읍, 하며 입가에 묻은 알코올을 빠르게 흡입한 원후는 의심스러움을 거둬내지 못한 시선으로 서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안…… 한다며.”
“…….”
아니면 말든가, 라는 서준의 무표정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자, 언제 눈을 가늘게 떴냐는 는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휜 원후가 씩 웃었다.
“알았어, 당장 준다!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
“너, 과하게 좋아한다?”
“나쁠 게 없지. 우리 회사에 보탬이 될 새 얼굴을 만드는 일인데. 이참에 한 작품 더…….”
“너무 멀리 가진 말자.”
이왕 도와주는 거 영화까지 엄소연과 한 번 더 가자는 원후의 첨언은 대번에 씹혔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태서준의 눈초리에.
“네 부탁 들어주는 건 이번뿐이니까.”
분명 엄소연에게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누군가는 그 기회가 없어지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 작품에서 그녀가 옥에 티로 남는다면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였다.
그 부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서준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
뒤척이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소연은 머리맡의 큰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도무지 잠들 수 없는 밤이라 상념을 날려 줄 찬 공기가 필요했다.
밖으로 팔을 내밀자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이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부드럽게 스치는 감촉이 간지러워서였을까. 뽀얀 달빛을 머금은 하얀 얼굴에 목련화처럼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말간 눈동자로 밤의 은은한 빛이 차올랐지만, 소연의 머릿속은 온통 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꿈속에서도 잊은 적 없는, 그립고 그리워 마음에서 단 한 번도 떠나보낸 적 없는 태서준 말이다.
서먹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서툰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앞에 있는 그에게 입도 벙긋 못해보고 그대로 줄행랑을 친 건 울고 있던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내려가는 발길을 돌려 옥상으로 다시 올라간 건 다분 호기심 때문이었다.
흡연 구역 맨 끝 귀퉁이에 몸을 숨긴 채 눈만 빼꼼히 내밀어 훔쳐본 눈에 들어온 건 구원후 대표와 라이터를 나눠 쓴 태서준이 벤치에 긴 다리를 늘어뜨려 앉는 모습이었다.
‘좋네.’
‘뭐가.’
‘태서준이 내 옆에 있는 게.’
‘닭살 돋는 멘트도 다 들어보고. 안 죽은 보람은 있네.’
‘아서라. 이모부, 이모님께서 이 소리 들으시면 또 기함하실라. 이모부가 네 비보 듣자마자 육군본부로 쳐들어가신 거 모르진 않지?’
‘아버지가 그러셨어?’
‘저런, 몰랐던 모양이네.’
‘…….’
그때 보고 들은 걸 다시금 떠올린 소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이 사촌지간이라는 건 뜬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태서준이 애연가였어?
소연은 열심히 더듬어 보았다.
그에겐 이미 먼지가 되어 흩어진 기억이겠지만, 제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하룻밤의 추억을.
그러나 담배 냄새는커녕 그의 좋았던 향기만 생각난 소연은 어느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하기야, 내가 뭔들 알까. 그날 하루가 전부였는데.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온 지 햇수로 4년. 사적인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으면서 시나브로 짝사랑 그 이상의 의미가 되어버린 남자였다. 그 당연하고도 날카로운 사실이 가슴을 난도질하듯 후벼팠다.
옥상에서 그를 맞닥뜨린 순간 욱신거리며 쿵 내려앉은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진정되지 않는 아픔과 떨림을 쓰다듬듯 가슴에 손을 얹은 소연은 밤하늘로 향한 촉촉한 눈빛과 자그마한 목소리로 전했다.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무사히 돌아와 줘서…….”
이제는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그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