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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깜짝 선물처럼 (11/51)


11화. 깜짝 선물처럼
2023.02.06.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오민정은 아이돌 연습생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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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이 윤지완 감독님 드라마 주인공으로 낙점되셨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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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연예 뉴스에 뜬 기사 봤어요. 축하드려요, 선배님!”

얘네들은 내가 그깟 드라마 주인공 역에 목숨 건 줄 아나 보다. 온갖 선물로 드라마 작가를 구워삶은 게 사실이긴 하지만.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캐스팅된 것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기도 힘들지만. 민정은 웃음기를 쏙 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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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호들갑이니?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너희들은 그게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난 몇 번을 안 하겠다 고사한 작품이거든. 그런데 꼭 나여야 한다고 제작사 측에서 포기를 안 해서 어쩔 수 없이…….”

신나게 주절거리던 입술이 일순 말꼬리를 흐렸다. 2층 스튜디오에서 새 프로필 영상을 찍고 이제 막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 소연과 눈이 딱 마주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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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잘못 걸렸다!

유난히 원두 향이 좋은 휴게실 커피가 당겨 무심결에 내려왔을 뿐인데, 웬만하면 피해 가고 싶은 오민정 눈에 띈 것이 천추의 한이랄까. 본능적으로 식겁한 소연은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오민정은 회사 안에서 평이 좋지 않았다.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한번 찍히면 모욕감은 물론 눈물을 쏙 빼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 그녀는 독설은 기본이고 행동마저 막무가내인 거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소연이 뒤로 무를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몸짓으로 주춤해 있자, 아니나 다를까 민정은 휴게실 입구 쪽으로 날 선 어조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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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 씨! 인사는 제대로 하지 않겠어?”

이미 톱스타인 오민정에게 엄소연은 그야말로 먼지 같은 존재였다. 저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인 데다가 아직 대표작이 없어 무명 배우라고 해도 무방했으니까.

그나마 민정과 꽤 많이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감사할 뿐인 소연은 시선을 내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지금의 불편한 상황을 무마하며 카페테리아 셀프바로 천천히 이동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낼 오민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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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 이리로 오지 않고.”

발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가야 했을까.

그 후회감이 드는 동시에 소연은 저를 부르는 민정을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봤다. 분명 없는 꼬투리라도 잡아 뭐라 할 게 뻔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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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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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물어? 선배가 이리 오라면 냉큼 와야지!”

여차하면 내빼려는 건 어찌 알았는지, 민정은 건방진 자세로 꼬아 올린 발목을 까딱거리며 소연을 다그쳤다.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가던 소연은 남다른 눈썰미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민정은 큐빅이 잔뜩 박혀 과하게 번쩍거리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다 우연히 본 듯도 한 것이라 소연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재빨리 더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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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오민정 씨 구두 베르사땡 신상 아니에요?”

때마침 찾던 것을 생각해낸 소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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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열린 봄 컬렉션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상품, 돈 주고도 못 산다는 그거 맞죠? 무척 화려하고 과감한 디자인이라 아무나 소화해낼 수 없는 건데, 역시 주인은 따로 있었네요”

소연이 입에 발린 찬사를 아낌없이 쏟아내자 욕설을 한바탕 퍼부으려던 걸 까맣게 잊어버린 민정은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춤추는 입매를 잡아 물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은 지나치게 번쩍이는 구두로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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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뻐요,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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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맞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칭찬은 고래도. 아니, 오민정의 험한 입심을 잠재우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해도 되는 건지. 다들 앞다투어 좋은 말 릴레이를 펼치자 이내 꽉 물린 민정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큰 웃음이 번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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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도 탁월한 순발력과 임기응변이었다. 이로써 위기를 모면한 소연이 민정의 웃는 낯을 쳐다보며 한시름 놓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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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시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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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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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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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머쓱한 목소리로 소연이 대답하자 민정은 테이블에 모여 앉은 연습생 중 한 명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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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눈 가운데로 몰린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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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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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가서 엄소연 씨가 마실 커피 한 잔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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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배님!”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외모 비하였다. 하지만, 하늘 같은 선배님의 명령에 어린 연습생은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엉덩이를 가볍게 움직였다.

민정은 소연에게 테이블에 끼어 앉으라 눈짓하며 끊었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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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역할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이미지와 딱 어울린다고 하니 내가 그 프러포즈를 마다할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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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윤지완 감독님이 남자주인공으로 점 찍은 태 이사님이 선배님 상대 역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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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해졌다네.”

오민정도 조금 전 CN 기획실 팀장을 통해 알게 된 정보였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어린 후배가 그 사실을 묻자 민정은 대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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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이라 나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태 이사님이 여주인 나를 보고 그 결정을 한 것 같더라는 얘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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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런 거면 태 이사님과 선배님 사이가 되게 가까우신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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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깝다기보단 내가 외모나 연기력이 뛰어나니…….”

연습생들은 동경하는 눈빛으로 우러러보았다.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급조해 그게 사실인 양 계속 떠벌리는 오민정을.

그것에 희열을 느낀 민정은 더 기고만장해 으스댔다.

그러나 휴게실에 죽치고 앉아 어리디어린 후배에게 잘난 척하는 모양새는 누가 보더라도 적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소연의 생각은 깊어졌다.

다소 허풍 같긴 했지만, 저리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한 작품에서 태서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오민정이 마냥 부러웠다. 그 마음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자극제가 된 듯도 하다.

사실 윤 감독이 제작하는 드라마에 소연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었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그쪽에선 그 어떤 언질도 없다. 그것으로 짐작되는 건 ‘혹시’가 ‘역시’라는 거였다.

오래전이지만 오디션 현장에서 윤 감독에게 호되게 깨진 일이 여전히 생생한 소연은 그 때문에 캐스팅될 리 없다고 단정 지으며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내 불운을 탓하며 손가락만 빨 것인가.

언제까지 타인의 좋은 일에 축하의 손뼉만 칠 것인가.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남들보다 더욱 분발해야 할 내가 말이다.

소연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건 금 같은 시간을 이곳에서 의미 없이 버리느니 연습실로 속히 돌아가 대사 한 줄이라도 더 읊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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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 씨! 왜 벌써 일어나?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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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이지 어디겠어요. 오민정 씨처럼 저도 어서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웃는 낯에도 침을 뱉을 수 있는 성격이긴 하지만, 소연의 ‘훌륭한 배우’라는 말에 기분이 묘해진 민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짐짓 목청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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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프로필을 들이밀어도 까이기 바쁜 엄소연 씨는 그럴 만도 하겠다. 알았으니까 어서 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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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정이 또 불러세울까, 휴게실 바닥만 내려다보며 총총히 걸어가던 소연은 갑자기 탄탄한 무언가에 이마를 콩 부딪쳤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감탄사가 터져 나온 것도 바로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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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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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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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이사님이시다!”

서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몰리며 소스라치게 내지른 소리였다.

그랬다.

언제 이곳에 나타났는지 서준은 휴게실 정중앙을 떠받치는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었다. 소연의 머리가 들이받은 건 그 남자의 유난히 넓고 실한 가슴이었다.

어쩐지 딱딱하진 않더라니, 벽은 아니었다.

다들 야단법석인 가운데 소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행동은 예의를 갖춘 인사라면 인사일 것이요, 외면이라면 그 또한 틀리지 않았다.

둘 중 무엇이든 간에 제 시선을 피하는 소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는 서준은 비웃음이 들어찬 눈길을 느릿하게 내렸다.

그 시선을 잠시 올려다본 소연은 움찔하며 그 즉시 서준을 지나쳐 휴게실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습지도 않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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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소연은 까맣게 암전됐던 머릿속이 이제야 조금 나아졌다.

아, 모르겠다. 그 앞에만 서면 멀쩡했던 정신이 왜 아득해지는지. 왜 허둥지둥 바보처럼 행동하게 되는지. 왜 자꾸 피하고만 싶은지.

소연은 그와 부딪혔던 일을 툭 떨쳐버리듯 어깨를 쫙 펴고 씩씩하게 걸어 9층 탕비실로 들어갔다.

전기포트의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연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고개를 까딱였다. 진열장에서 꺼낸 찻잔을 세팅하고 따뜻한 홍차에 레몬 슬라이스를 넣는 손놀림이 제법 능숙했다.

습관이려나.

수년 동안 죽을 만큼 그리웠다. 그러나 이젠 도깨비를 만난 것처럼 두렵기만 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눈앞에 없으면 또 보고 싶어지는 건 무슨 맘인지.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지금도 머릿속은 그로 가득하니 말이다.

소연은 뜨거운 홍차를 후후 불어가며 한 손엔 찻잔을, 다른 손으론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 안의 쥐방울만 한 아이 사진을 가득 담은 깊은 눈망울이 어느새 촉촉해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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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아! 너, 됐어!

걸려 온 여도순의 전화를 받은 소연의 눈살이 대번 찡그려졌다. 쩌렁쩌렁한 큰 목소리가 소연의 고막을 때려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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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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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주인> 말이야! 소여화 과거 캐릭터! 그거 너 됐대!

배우들의 경쟁이 치열한 배역이었다. 심지어 윤 감독과 안 좋게 얽힌 일 때문에 감히 기대조차 못 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게 행운이 아니면 뭘까.

소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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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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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정말, 진짜로!

몹시 얼떨떨한 소연이 다시 묻자 도순은 연거푸 대답해주었다.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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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기획실 팀장님과 통화했거든? 너 내일 드라마 제작팀 만나서 계약서 써야 한다고 그러더라! 와, 씨! 이럴 거면서 시간은 왜 그렇게 끌었대? 기다리는 사람 조마조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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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다. 너무 좋다.

그렇게 염원하던 작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여태껏 차곡히 쌓아 올린 내 노력을 만인에게 보여줄 확실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

소연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기대할 수 없어 더 많이 속앓이했던 그 시간이 무색해지도록. 인생의 한 치 앞을 몰라 조바심쳤던 미래의 걱정이 저 멀리 사라질 만큼.

하지만 깜짝 선물처럼 갑자기 밀려온 희소식 끄트머리엔 앞날의 걱정과 어쩔 수 없는 설렘이 뒤섞여 달라붙었다.

내가 과연 그를 연기자로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일 이외에 내게 그 어떤 감정도 없는 그를 끝까지 감당해낼 수 있을까.

내 안의 태서준과 현실의 태서준은 흑과 백처럼 전혀 다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와 함께 드라마 작업을 해나가자면 직접적인 신체접촉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 모든 걸 견뎌낼 수 없다면 거친 풍랑에 휘말려 밑도 끝도 없이 떠내려갈 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조금 전 휴게실에 보았던 태서준의 모습은 고고함,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깃든 차가운 표정 역시 지독히도 공격적이지 않았나. 네까짓 게 뭘 어쩔 건데? 라고 말하듯 날 푹 찌르는 그 무서운 눈빛은 또 어땠고. 하지만 그런 남자에게 쫄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 까짓거 한번 부딪쳐보자!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 보는 거야, 엄소연!

소연은 굳게 마음먹으며 불안한 기시감을 힘껏 털어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였다. 손에 들린 찻잔이 미끄러져 땅에 떨어졌다.

쨍그랑!

대리석 바닥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엎질러져 사방으로 튄 찻물과 깨져버린 유리 파편으로.

굳은 다짐으로도 막을 수 없는, 곧 불어닥칠 폭풍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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