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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낙하산 (23/51)


23화. 낙하산
2023.03.20.


위험천만한 행동에 식겁한 소연이 아무도 모르게 서준을 힐끔거리며 눈짓으로 항의했으나 소용없는 일. 그녀의 찰랑거리는 눈빛이 제게 닿을수록 서준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끝까지 파고들어 소연의 손을 단단히 조일 뿐이었다.

사실 서준의 속 사정은 포토 타임을 즐기며 미소 짓는 표정과는 정반대였다.

몇 시간 전, 봉 실장에게서 구원후의 파트너가 엄소연이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순간부터 태서준의 심기는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짜증도 짜증이지만 제 것을 빼앗긴 듯 썩 좋지 못한 기분이 신경을 바짝 긁었다.

객실에서 서성거리다 로비로 내려온 이유는 그 때문이었지만 기자들 앞에까지 나서게 된 건 다분 충동적인 행보였다. 저 말고 다른 남자와 다정히 서 있는 엄소연의 꼴이 당최 참아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이거라도 해야 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 당혹스럽게 만들어 저만 바라보게 하는 것 말이다.


“……!”

제발 손 좀 놔요! 이러지 말라니까요!

흔들리는 눈만 봐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그렇게 싫으면 네가 한번 빼보시든가.

두 사람의 은밀한 실랑이는 호텔 로비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작은 쉬워도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렵다. 예전엔 지킬 것이 없어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면 이젠 그렇지 않았다.

인생을 다 써서라도 기필코 지켜내야 할 소중한 내 것이 있지 않은가. 그 길이 지뢰밭일지언정 기꺼이 선택한 길이기에 소연은 제가 만든 선을 넘지 않았다. 아니, 절대 넘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태서준 앞에선 그 경계가 자꾸 허물어지고 흐릿해진다.

그가 흔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소연은 냄비 속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

명목은 각계 유명인과 기업인의 친목 도모였다.

그러나 이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뚜렷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재벌들은 회사의 역량을 유지하거나 더 넓히는 데 도움 될 인맥을 쌓기 위해서,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창작자와 그 이하 예술인들은 투자자 확보나 인지도를 높이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자녀들의 좋은 혼처를 찾는 것이 주 관심사인데, 그 재력가 안방마님들은 연회장과 바로 맞닿은 별실에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엘스텔라 사장님과 부사장님은 아직 소식이 없죠? 손주 아이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 큰 아드님은 두 해 전에, 둘째 아드님도 그해 말에 결혼했잖아요.”

“여태 두 며느님 모두 감감무소식이니 차 여사님 걱정도 여간 아니시겠어요.”

김 여사가 남의 가정사를 들추며 오지랖을 펼치자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부인들도 덩달아 한마디씩 거들었다.

눈치 없이, 듣는 사람 속도 모르고.

그러나 타고난 기품은 세월을 먹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것인지, 차여진은 불편한 심기로 지어진 눈가의 잔주름마저 고아했다.


“곧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이 일은 엄연히 부부 문제인데 제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지요.”

여유로운 미소를 입술 위에 올린 여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귀부인들은 곧 환갑임에도 이십여 년 세월을 비켜 간듯한 여진의 젊은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그러나 견고한 그녀의 미모보다 더 부러운 것이 맘만 먹으면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엘스텔라 안주인의 어마어마한 재력이었다.

그 시샘이 과도했을까. 김 여사는 뇌로 거르지 않은 억측을 주저리 지껄였다.


“때가 지났으니 이상해서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혹시, 두 아드님이 쇼윈도 부부는 아닌…….”

“흠!”

도를 넘는 듯하여 여진이 헛기침으로 경고하니 그제야 김 여사는 생각 없이 하던 말을 뚝 끊었다.

그럭저럭 괜찮았던 분위기가 김 여사로 인해 모호해지는 그때였다.


“호호호…….”

웃음소리를 내며 별실로 들어온 민 여사가 그녀의 외동딸인 오민정을 대동하고 부인들 틈에 섞여들었다.


“어머나, 벌써 다들 모이셨네요.”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연회장에서 여식을 살짝 불러내 이곳으로 데려온 건 상류층 결혼 시장에 제 딸을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능력 있는 사윗감을 물색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테니까.


“늦은 걸음을 하셨네요. 일단 앉으세요.”

여진이 온화한 손짓으로 빈자리를 내어주자 민 여사는 그 자리에 오민정을 앉히고 저는 그 옆에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태 회장님은 안 보이시던데.”

“그이는 번잡한 곳을 싫어한답니다.”

말 그대로는 아니었다. 태석호는 귀찮게 들러붙어 아부하는 사람들이 싫은 거였으니. 여진은 그러한 사실을 유연하게 돌려 말한 거였다.


“아, 그러셨어요? 워낙 뵙기 힘든 분이시라 이번 기회에 인사 한번 드릴까 했는데, 아쉽네요.”

“남편들끼리 어련히 교류하지 않겠습니까.”

민 여사가 말할 때마다 목과 귀에 걸린 호화스러운 보석이 스스로 졸부임을 대변하듯 번쩍번쩍했다.

여진의 시선이 민 여사를 거쳐 바로 옆 사람에게 흐르자 민 여사는 민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인사도 인사지만 차 여사에게 잘 보이란 뜻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민정이라고 합니다.”

오민정이 머리를 숙여 다소곳이 인사했지만, 분홍색 드레스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가슴께의 속살이 살짝 비쳤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화답하는 여진의 표정이 정갈했다.


“그래, 반가워요.”

“어렸을 때도 예쁘더니 지금은 더 예쁘네요.”

여진이 곱게 자란 민정을 칭찬하자 다른 부인들도 곁들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다른 이는 안중에도 없는 민 여사는 오로지 차여진에게 시선을 맞추며 심중에 담아두었던 속내를 드러냈다.


“태 회장님 댁 셋째 아드님은 외국에 있다지요?”

“그건 왜요.”

“왜긴요. 연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던데, 제 딸과 엮어주면 어떨까 해서 그러죠. 엘스텔라 호텔을 운영하는 아드님들 외모가 워낙 수려하니 셋째 아들 인물이야 안 봐도 당연히 출중하겠지요?”

말 나온 김에 쇠뿔까지 당기는 민 여사의 발언에 깜짝 놀란 사람들은 일제히 눈매를 크게 키웠다.


“아니, 그보다 애들 먼저 만나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아드님이 거처하는 곳과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시면 우리 민정이가 그쪽으로 움직이는 거로 하죠. 아무튼, 제 뜻은 그렇습니다만 차 여사님 의향은 어떠신지요.”

“…….”

입술을 일자로 다문 여진은 낮은 눈길로 민 여사를 한참 바라보았다.

누군 안 궁금하고 입이 없어 안 물어봤겠나. 예전에 몇몇 사람들이 민 여사와 비슷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진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낮은 한숨과 긴 침묵이 전부였다.

그때와 똑같은 차여진의 반응에 별실 안의 부인들은 민 여사에게 무모하다 욕해야 하는지, 뜬금없는 용기에 손뼉이라도 쳐줘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러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눈치부터 보는 것이 먼저였다.

재벌도 급이 있듯 여사들 사이에도 확고한 서열이 존재했다.

선대부터 부동산 재벌로 명성이 대단했던 만큼 태 회장은 현재까지 엘스텔라 특급호텔 이외에 고 퀄리티 리조트를 해외 도처에 거느리고 있다.

더구나 대대로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갑부였던 친정 집안만으로도 차여진은 이 자리에서 갑 중의 갑이었다.

하지만 풍족한 삶에도 근심이 있기 마련. 의사 공부를 했으면 그거나 할 것이지 시답지 않게 배우나 하는 서준이 탐탁지 않아 태 회장은 애초에 함구령을 내렸다.

그 때문이라도 여진은 이 자리에서 막내아들이 거론되는 자체가 퍽 불편하고 달갑지 않은 거였다.

그 사정을 알 리 없으니 마구 떠드는 것이겠지만, 민 여사는 졸부에 교양마저 없었다. 그리고 그 태도에 화를 참지 못한 건 차여진이 아닌 그녀의 동생, 차여정이었다.


“민 여사님은 실례라는 걸 생각 못 하시나 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 언니가 지금껏 아무 말이 없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교양 없이 이러지 마시고 주변 분위기부터 파악하시란 말입니다.”

뾰족한 어조로 여정이 말하자 모욕감에 사로잡힌 민 여사가 낯빛을 사납게 구기며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뭐요? 지금 저한테 교양을 말씀하신 겁니까?”

“다행입니다. 그거라도 알아들으시니.”

말을 마치자마자 여정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씨!”

저를 무시한 행동에 흥분한 민 여사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쥐었다. 그리고 물싸대기를 날리는 찰나였다.


“엄마, 이러지 마!”

버럭 소리친 민정이 얼른 엄마에게서 겁을 빼앗았다.

만일 말리지 않았다면 민 여사는 그 대가로 다신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터. 그 상황을 예상한 오민정이 재빠르게 움직인 거였다.


“하, 보자 보자 하니 진짜 재수가 없네! 당신들은 얼마나 잘나서 이 지랄이야!”

하지만 민 여사는 분한 나머지 여진과 여정을 번갈아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내 딸이 뭐가 부족해서! 당신들이 뭔데 날 개무시하냐고! ”

“그만 좀 하라니까!”

욕지거리에 언성까지 높이는 엄마가 창피할 뿐인 민정은 민 여사의 팔을 부여잡고 말했다.


“정략결혼 그딴 거 싫다니까! 아직 결혼할 생각 없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이것아, 네가 번듯한 집안과 결혼해야 그나마 우리가 기를 펴고 살 거 아니니!”

이마에 실핏줄까지 터트린 민 여사는 저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른 채 계속 언성을 높였다.


“공부 머리가 안 돼서 화가를 시키려니 그림도 전병! 성악가도 가망 없어 결국 연기로 전향하고. 지금까지 네게 들어간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내가 왜 그랬는데!”

딸을 연예인으로 만든 게 상류 사회에서 버티기 위한 발판이란다. 그 얘기를 민 여사가 자폭하듯 말하자 민정이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엄마, 왜 그런 얘기까지 해! 나 혀 깨물고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미 다 망쳐진 이곳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 쪽팔려!”

혼잣말을 성질 것 내지른 민정은 엄마고 뭐고 저 혼자 별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파티장에 얼굴만 비친 서준은 일찌감치 이곳을 떴다.

원후마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숍 마스터의 말처럼 소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미아가 된 심정이었다.

그 사이 별실에서 나와 파티 홀로 돌아온 오민정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 신경질 나!”

별실에서 생긴 일로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까.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지인들을 쭉 훑어보던 민정은 갑자기 가시 돋친 눈길로 소연을 드세게 찍어 눌렀다.


“엄소연 씨! 조연이 뒷받침을 잘해줘야 주인공인 내가 돋보이는 건 알지?”

“……?”

뭐가 맘에 안 든 건지, 목소리에 날을 세운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보다 심보가 잔뜩 뒤틀린 걸 모를 수 없는 소연의 커다란 눈이 민정을 향했다.


“아, 진짜! 아무튼, 잘 좀 해! 내가 유심히 지켜볼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걱정해주신 만큼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늘 그렇듯 소연이 적절하게 대꾸하자 입꼬리를 새초롬히 말아 올린 민정은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 지인들과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희희낙락했다.

배우도 급이라는 게 있다. 꾸준한 활동으로 인지도를 쌓은 베테랑.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 신인. 그러나 그들 중 롱런까지 허락받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간 그들조차 예상치 못한 풍파에 수직 낙하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것이 화려함 이면에 도사리는 위험성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사뿐히 건너뛴 태서준의 위력은 과연 어떠하겠나. 그야말로 외모와 연기력 모두를 섭렵하며 유일한 태양처럼 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에 비하면 이제 갓 스타 반열에 오른 오민정은 어떠한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태서준과 나란히 주연으로 연기하는 것 자체가 민정에겐 행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엄소연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회였다.

애초에 태서준이 그 드라마에 합류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걸 가능케 한 게 구원후 대표이고, 서준의 마음이 움직인 건 엄소연 때문이니까.

그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민정은 저 혼자 이뤄낸 일인 것처럼 기고만장해 마냥 우쭐거리기 바빴다.


“서브 주인공 할 것 없이 라인업이 엉망이지만 어떡하겠어. 태서준 상대역으로 제격인 여배우가 나 말고 없다는데.”

“시나리오 작가가 권은영이고 연출이 윤지완이라며?”

“거기에 흥행 보증수표 태서준까지 합세했으니 대박 안 나는 게 더 이상하겠다!”

<태양의 주인>에 대해서 익히 들은 바가 있는 지인들은 민정의 이야기에 한마디씩 얹었다.


“얘들 봐라? 시청률 킬러인 나는 왜 빼는 건데?”

또 심기가 뒤집힌 것이지, 민정은 가만있는 소연을 삐딱하게 쳐다보며 구시렁댔다.


“……주제에. 쯧!”

민정의 혀 차는 소리를 듣긴 했으나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소연은 그저 모른 체했다.


“낙하산이라니?”

“말 그대로지 뭘 물어. 쟤, 회사 덕에 조연 꿰찬 낙하산이거든.”

그러나 뚫린 귀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절로 들리는 걸 어떡할까.


“……?”

내가 낙하산?

이건 무슨 소린지.

소연은 심장이 뛰었다. 설렘과 아주 다른 의미의 두근거림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배역을 따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정녕 무지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 소연은 1초라도 빨리 구 대표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울컥 치밀은 감정을 억누르며 연회장을 나와 화장실로 가는 모퉁이를 끼고 돌자마자 구두부터 벗어 양손에 든 소연은 맨발이었다. 발도 아팠지만 몇 번 걸려 넘어질 뻔한 치렁치렁한 드레스도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었으니까.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걷어 올리고 구석진 곳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은 소연은 클러치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화면에 이제 막 도착한 글자가 둥실 떴다.


[지금 호텔 VIP층으로 와 줄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생겼는데 소연 씨가 있어야겠습니다.]

행방이 묘연했던 구원후 대표의 문자였다.

일단 그에게 전화를 걸어봤으나 긴 신호음은 아무리 기다려도 통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소연은 일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4년 전 발을 들인 적이 있는 VIP층에 내려섬과 동시에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새 손바닥도 식은땀이 잔뜩 배어 나와 축축했다.

하아, 내가 여길 또 올 줄이야…….

소연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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