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참을 수 없는 분노 (24/51)


24화. 참을 수 없는 분노
2023.03.24.


16796398692895.jpg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약간 기울인 서준이 깍지를 끼며 두 손을 모았다.

VIP룸 응접실 소파엔 다섯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엄소연과 구원후 대표가 윤지완 감독과 권은영 작가를 마주 보았고, 서준의 시선이 양쪽 네 명을 아우르는 삼각 구도였다.

16796398692904.jpg

“제가…….”

먹먹한 시야에 들어온 서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소연이 욱신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조용히 입술을 뗐다.

16796398692904.jpg

“하차하겠습니다.”

물러섬 없는 표정, 단아한 입 모양이 차분한 음성을 뱉어냈다.

16796398692904.jpg

“전 전혀 후회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이 사실을 숨긴 제 모습이 줄곧 부끄러웠습니다. 더 이상은 제가 맡은 배역 때문에 소중한 내 아이를 부인하고 무시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내 선택을 세상이 삐딱하게 바라본다면 나는 그 세상의 눈과 당당히 맞서리라.

나와 내 아이에게 누군가가 손가락질한다면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말리라.

결단코 기죽지 않으리라.

엄마로서 더욱 강해지리라.

나약해지지 않도록 수없이 다짐했고, 오늘 역시 각오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눈시울이 절로 붉어지는 건 그녀도 막을 길이 없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가 당연히 알아야 함에도 차마 말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파서.

때를 놓쳐 더는 털어놓을 수 없는 그 비밀, 지금도 깊이깊이 감출 수밖에 없는 그 진실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해 봤자 이젠 구차한 핑계에 불과할 터. 서준의 묵직한 눈빛을 맞닥뜨릴 때마다 한없이 고통스러워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소연은 하다 못 해 태서준의 앞날에 아주 작은 흠이 되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드라마 순행에 지장이 있다면 기꺼이 빠지겠는 의사를 소연이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자 룸 안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정적에 휩싸였다.

이때 구원후 대표가 자기 생각을 말하며 얼마간의 침묵을 깼다.

16796398692918.jpg

“엄소연 씨가 혼란스러움을 초래한 건 저도 인정합니다. 우선 그 점에 깊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회사와 윤 감독님 작품에 해가 되지 않고자 이제라도 말하기 힘든 사실을 스스로 밝힌 진정성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엄소연 씨 하나만 놓고 봤을 때 가능성이 있는 배우 아닙니까. 자신이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파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제까지 개인사를 함구한 엄소연이 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배우로서의 강점을 꺼내 든 구 대표는 좀 더 센 어조로 자기의 뜻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16796398692918.jpg

“엄밀히 따지면 주인공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전 이대로 진행해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만.”

소속 배우를 보호해야 할 회사 대표로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구원후가 내놓은 얘기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 찜찜한 낯빛으로 앉아 있던 권은영 작가의 견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16796398692927.jpg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여주 전생 캐릭터입니다. 조연역이지만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인물인데, 엄소연 씨가 그 배역의 신비롭고 우아한 이미지를 해칠까, 전 그게 우려됩니다.”

대뜸 반발한 데 이어서 권 작가는 이번 작품에 거액이 투자된 만큼 잡음이 있어선 안 된다는 날카로운 잣대를 모두에게 열심히 피력했다.

윤 감독이 진지하게 고민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투자자들이 이례적인 거금을 서슴없이 내놓은 건 영화보다 더 영화다운 드라마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대만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단언컨대 태서준이 꼭 필요했고, 어렵사리 그 일은 성사되었다.

그런데 여차하면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질 것 같은 감이 온단 말이지.

16796398692931.jpg

“엄소연 씨는 하차를 얘기하시는데, 태서준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제껏 말을 아끼던 윤지완 감독이 질문하자 서준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16796398692935.jpg

“드라마 작업에서 엄소연 씨가 제외된다면 저 역시 <태양의 주인> 촬영장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16796398692904.jpg

“……!”

대체 왜……!

크게 떠진 소연의 눈동자가 출렁했다.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혹시’가 ‘역시’였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윤 감독은 이어서 물어보았다.

16796398692931.jpg

“여태 촬영한 것도 있는데 그것까지 다 엎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한쪽 다리를 여유롭게 꼬아 올린 서준이 느긋한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16796398692935.jpg

“전 약속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도장 찍은 계약서가 있고, 서면으로 한 그 약속이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실망감이 꽤 크겠지요. 사생활로 공적인 일을 그르치는 엄소연 씨는 물론 제작자 모두에게.”

엄소연에게 아이가 있다.

그 얘기를 처음 듣는 순간 서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이 아님에도 구원후의 입을 확 찢어놓을 뻔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실로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룸 안으로 들어온 엄소연은 네 사람 앞에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인정했다. 구 대표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 아이의 엄마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고 당돌해 보이던지, 서준은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얼얼하고 화끈했다.

그래, 네 얘기가 전부 진짜라 치자.

나도 그랬듯 누구라도 한눈에 혹할 외모를 지닌 여자이니, 남자야 늘 따랐겠지. 그만큼 연애도 적지 않게 해 봤을 테고. 아이? 뭐, 그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하지만 나는 왜…….

그 사실을 알고도 나는 왜…….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있음에도,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에도 나는 왜 엄소연을 단념할 수 없을까.

서준은 여태 엄소연에게 쏠리는 제 관심을 오래전 해결하지 못한 미련의 싹, 그저 남자의 본능으로만 치부했다. 그 이상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동안 제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였다.

그러나 이 일로 명확해진 건 지나칠 정도로 엄소연에게 푹 빠져 있는 자신이었다. 그녀의 충격적인 커밍아웃을 ‘고작 그만한 일’로 축소하며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건 그만큼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자신의 본마음을 비로소 깨달은 서준의 생각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그녀를 놓을 수 있을까. 내 머리와 가슴에서 깨끗이 밀어낼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럴 수가 없는 놈이지.

그 정도 반전에 네 쪽으로 흐르는 내 마음을 멈출 수 있다면 애초에 그냥 지나치고 말지, 회사 옥상에서 네 이름을 부르는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난 빌어먹을 이 짓거리를 계속해야겠다. 적어도 너란 여자를 가볍게 놔 줄 수 있는 그때까지는.

이미 그렇게 결론 내린 일이었다.

엄소연이 하차의 뜻을 입에 올리기 전에 그리 마음먹은 서준은 도도하고 오만한 시선을 왼편 소파 쪽으로 꽂았다.

16796398692935.jpg

“제 얘기는 끝났으니, 감독님과 작가님 두 분이 답을 주실 차례인 것 같은데요.”

한참 진행 중인 촬영분을 전부 엎겠다는 뜻과 계약서를 언급한 것부터가 압력이었다.

그처럼 태서준은 이번 드라마 작품에서 흥망의 칼자루를 쥔 강자였다.

윤 감독은 태서준만으로도 작품 성공은 기정사실이라며 기우든 기대든 다 끌어안고 가자고 권 작가를 설득했다.

그런데, 보자 하니 여기 세 남자 모두 한통속 아닌가. 왜 다들 이구동성으로 엄소연을 감싸주는 건데? 쟤가 뭐라고.

어린 나이와 빛나는 미모에 밀렸다는 자격지심일까. 외톨이가 된 기분 때문일까. 권 작가의 목소리가 한껏 비틀려 나왔다.

16796398692927.jpg

“그건 ‘미혼모’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얘기죠! 윤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배우 한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이 작품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거 말이에요! 그런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라니……. 이건 도저히 대중을 이해시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요!”

16796398692904.jpg

“…….”

정제 없는 권 작가의 불손한 말씨와 경멸을 담은 눈빛에 새하얀 얼굴이 금세 모멸감으로 물들었다. 할 말을 잃은 입술도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한 소연의 표정 변화는 외면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서준만큼은.

16796398692935.jpg

“권, 은, 영, 작가님.”

토막 치듯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말하는 선명한 입술, 깊고 짙은 서준의 눈매가 단번에 찌푸려졌다.

예기치 못한 감정.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16796398711212.jpg

 

***

파우더룸 거울 앞에 선 여진이 단아하게 올린 머리를 섬세한 손길로 매만졌다.

옆에서 언니 모습을 지켜보는 여정의 멍한 눈빛에 묘한 기운이 스쳤다. 누구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으나 여진과 같이 있을 땐 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마는 자신의 위치가 영 못마땅한 거였다.

하지만 그보다 남편의 사랑에 자식들에게 존경까지 받는 언니의 모든 것이 시도 때도 없이 질투가 나서였다.

동생의 떨떠름한 표정이 그 연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 여진이 작게 웃었다.

16796398711217.jpg

“여정아.”

16796398711224.jpg

“네, 언니.”

16796398711217.jpg

“그래도 원후는 쭉 사업을 하는 거잖니. 자력으로 회사를 차리더니 몇 년 만에 눈부신 성장도 했고. 그보다 성실한 아들이 또 어딨어. 나중에 제부 회사를 물려받아도 그 경험으로 잘 해낼 수 있을 테고.”

16796398711224.jpg

“어휴, 말도 말아요, 언니. 우리 구 회장이 원후를 얼마나 벼르고 있는데. 아들 하나 있는 게 아직도 제 꿈만 좇는다고 역정만 내니, 내가 얼마나 가시방석인데.”

투덜거린 여정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16796398711217.jpg

“내가 아버지께 종합병원과 그 주변 부지를 상속받을 때 넌 강남 한복판에 있는 빌딩 여러 채를 고집하며 원후에게 물려준다고 했지. 만에 하나 네 아들이 쫄딱 망해도 그거로 도와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대체 무얼 하는 애인지, 병원을 도맡아 운영하래도 싫다며 딴짓만 하는 서준이가 더 문제지.”

궁여지책이지만 애꿎은 서준을 빗대어 말하니 먹구름 낀 여정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거로 된 듯 여진이 밝게 웃었다.

16796398711217.jpg

“아직 젊디젊은 애들이야 뭘 해도 즐겁고, 아파도 금방 툭 털고 일어날 때지. 그러니 우리도 너무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자. 말 안 듣는 자식 걱정하다 주름 하나 더 늘면 우리만 억울하니까.”

16796398711224.jpg

“그건 그래요, 언니.”

16796398711217.jpg

“서준이는 아마 객실에 있을 거야. 원후도 같이 있을지 모르니 조금 있다가 거기나 들러보자꾸나.”

파우치를 챙긴 여정이 파우더룸을 나서자 그새 기분이 나아진 여정도 언니의 뒤를 바짝 따랐다.

***

명색이 스타 드라마 작가라면서, 다른 누구보다 폭넓은 혜안을 지녀야 할 사람이 고작 그따위 융통성밖에 발휘할 수 없냐는 질타를 굳이 말로 옮길 필요는 없었다.

날 선 눈빛이 이미 권은영 작가의 숨통을 무차별하게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16796398692935.jpg

“권 작가님은 애인 있습니까?”

16796398692927.jpg

“없는…….”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는지, 뜬금없는 물음에 좀체 감 잡기가 어려운 권 작가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서준을 쳐다봤다.

16796398692935.jpg

“아, 결혼하셨으니 남편이 있으시겠네요.”

16796398692927.jpg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

16796398692935.jpg

“있다, 없다면 충분한 말에 다른 의미를 붙여 의도적으로 깎아내리지는 맙시다. 듣는 사람도 생각해 주셔야지. 내가 듣기에도 무척 거북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16796398692927.jpg

“없는 일 지어낸 것도 아닌데 이거 너무하시네요! 잘못한 건 엄소연 씨인데 제게 왜 이러시는…….”

16796398692935.jpg

“잘못.”

권 작가의 말허리를 분지른 서준의 오만한 미소는 실소와 조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16796398692935.jpg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건 잘못이겠죠.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는 거나 미혼모인 게 잘못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잠시 입술을 딱 다문 서준이 눈썹을 찡긋하며 고개를 야트막하게 비틀어 까딱했다.

이는 태서준이 극도로 예민해졌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걸 유일하게 아는 원후의 등골에 긴장감이 스몄다. 그러나 제 감정을 통제하듯 서준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문을 열었다.

16796398692935.jpg

“남의 생물학적인 일에 잘했다, 못했다 논하는 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만. 잘 아시는 분이 한번 설명해보시죠, 권 작가님?”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요, 아이 엄마로서 떳떳하려고 노력하는 엄소연이 왜, 무슨 잘못으로 좌절당해야 하는지를 묻는 거였다.

16796398692927.jpg

“그건…….”

차가운 음성과 무엇이든 뚫어버릴 듯한 태서준의 강한 눈빛을 당해내기 버거운 권 작가는 말끝을 흐리며 윤 감독을 쳐다보았다. 같은 제작자로서 궁지에 몰린 저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내 들리는 음성의 주인은 윤 감독이 아닌 엄소연이었다.

16796398692904.jpg

“혼란스럽게 해드린 건 죄송스럽지만 그 외의 개인적인 사과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이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라서요.”

오롯이 제 편이 되어준 태서준 때문에 목이 메어온 소연은 그 뜨거운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여기에서 눈물을 보여선 절대 안 되는 거니까. 아이 일이라면 앞으로도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인데 그때마다 흔들리거나 나약해질 순 없으니까.

16796398692904.jpg

“태명이 ‘행쁨이’입니다. 작은 생명이 제게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행복하고 기뻤거든요. 곧 닥칠 두려움도 덮어버릴 만큼 아주 많이요. 전 사랑스러운 제 아이를 위해서라면 험한 가시밭길이라도 기꺼이 걸을 겁니다.”

좋은 작품에서 큰 배역을 맡았고, 이대로라면 연기자로서 영광스러운 첫걸음을 내딛는 거다. 그러나 오민정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니 알 수 있었다. 저는 낙하산이 분명했다. 그것도 회사가 아닌 태서준의 힘으로.

16796398692904.jpg

“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한 제가 물러나는 게 옳습니다. 좋은 기회였지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제고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믿으니까요.”

등과 목을 빳빳이 세운 소연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

노력 없이 얻은 건 내 것이 아니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