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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내 아이와 나를 위해 (40/51)


40화. 내 아이와 나를 위해
2023.05.19.



 
어느덧 말라가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현관 앞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향해 시원스레 쭉 뻗어 올랐다.


“Adiós, hasta pronto. (안녕히 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서준과 소연이 세단에 몸을 싣자 계단 아래로 내려선 집사와 사용인 모두가 작별 인사를 했다.


“Adiós, dar gracias. (안녕히 계십시오. 그간 감사했습니다.)”

서준도 인사를 건네고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점점 멀어지는 저택과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연실 손을 흔든 소연은 정문에 다다라서야 차창을 닫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엄소연이 붙임성 좋은 유한 성격이란 걸 내가 언제 알았더라. 아마도 처음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앳된 얼굴로 미소 짓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깜찍하던지.

그녀의 첫인상을 떠올린 서준의 입 모양이 자연스레 곡선을 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혼자 웃으실까요.”

어느 틈에 소연의 시선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에 닿아 있었다.


“너.”

서준의 대답은 짧고도 명확했다.


“…….”

하지만 소연의 낯빛은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이곳에서 우린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이 저택에 있는 동안 무뎌진 현실감 때문일까. 소연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12시 땡.

자정이 지났으니 왕자와 왈츠곡에 맞춰 춤추는 신데렐라의 시간도 끝.

이제 날카로운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서준은 아직 관계를 정리하기 싫은 모양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계속 흔들렸던 소연은 결국 그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태서준을 일로서만 보리라. 두 번 다시 그리움으로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으리라. 헛된 기대로 설레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짓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내 아이와 나를 위해 앞만 바라보며 당차게 걸어가리라.

이것이 애초에 엄소연이 다짐했던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소연은 잘 알고 있었다. 과욕을 부리는 건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독이라는 걸. 자칫 소중한 가족과 소소한 행복을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러한 생각들이 그에게로 흐르는 그녀의 마음을 자꾸 가로막았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그녀의 다리를 자꾸 꺾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려서 모를 수가 없네.”

운전하며 소연을 흘긋 바라본 서준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

“나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어.”

“우리 관계 말인가요?”

“그래. 넌 끝을 생각하고 있잖아.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난 지는 딜을 해 본 적이 없거든.”

어젯밤 서준은 만남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을 소연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 실랑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

소연의 갈 곳 모를 눈동자가 핸들을 잡은 크고 길쭉한 손에서 멈췄다.

서준은 오디오를 켰다.

잔잔한 음악이 차 안의 정적을 메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입을 열었다.


“엄소연 씨는 운전 잘하나.”

“왜요?”

“손 좀 빌릴까 하는데.”

이곳에서 목적지인 카디스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응당 번갈아 운전하자는 의미로 알아들은 소연은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 국제 면허증을 집에 놓고 왔거든요.”

“그 얘기가 아니야.”

보조석으로 넘어온 서준의 굵은 손마디가 소연의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얽으며 끝까지 파고들었다.


“왜…….”

“하고 싶은데 이유 있나.”

“…….”

그의 손을 꽉 붙잡을 수도,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소연의 얼굴이 차츰 장밋빛으로 익어갔다.

***

고속도로를 달리다 작은 규모의 휴게소에 들렀다.

자동차에 바닥 난 디젤 연료를 보충하고 서준과 소연은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그 후 커피로 부족해진 카페인을 충전하는 중에 다시 점화된 대화는 서준을 몹시 화나게 했다.


“지금 난…… 벽을 치고 있는 것 같아.”

“…….”

“왜 싫다고만 하지. 막말로 엄소연이 유부녀도 아니고, 네 말대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는 남자도 못 만난다는 거야?”

“…….”

부모님께 맡긴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육아와 일에만 전념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달리 댈 핑계도 없거니와 거짓 없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소연에게 아이를 지키는 건 1순위였다. 어쩌면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그런 가능성은 추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는 서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소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혹시, 아이 아빠라는 그 남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 그래?”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서준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존심이 절대 허락지 않는 말까지 불쑥 나와버린 건 그래서였다. 그런데, 그 남자 얘기에 즉각 반응하는 건 뭘까.

까만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분노가 일었다.

촬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누군지도 모르는 그 새끼를 당장 찾아가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소용돌이처럼 일었다.

아이 아빠라는 그 남자에게 질투가 난 서준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널 버린 그 새끼가 여전히 좋아?

어서 말해!

그깟 새끼는 새까맣게 잊었다고 말해!

네 머릿속에 다른 남자는 없다고, 나밖에 없다고, 내게 매달려보란 말이야!

지나친 요구, 차마 말 같지도 않은 미친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서준은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를 밀어내고 싶으면 타당한 이유를 대 봐.”

서준의 말에서 어설프게 발을 빼려던 자신을 비로소 발견한 소연은 툭 털어놓듯 이야기를 풀었다.


“태서준과 난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택에 걸린 초상화를 본 이후 그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고요.”

“그게 왜.”

“엘스텔라 호텔 오너, 태 회장님이 서준 씨 아버님이시죠?”

“……!”

소연의 말에 서준의 눈빛이 아주 잠깐 휘청했다. 어느 틈에 제 가계도까지 꿰고 있는 그녀가 놀라운 거였다. 하지만 언제부터 알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엄소연을 영영 놓칠 수도 있는 이 상황에 그런 궁금증은 무의미했다.


“아무리 재벌이래도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벌인지는 몰랐거든요.”

“눈썰미가 대단하긴 한데, 그게 우리가 안 되는 이유라도 되는 건가?”

“이사님의 시크릿한 사생활에 끼고 싶지 않아요. 태서준 하나로도 위축되고 심장 떨려 죽겠는데, 전 대한민국 서열 1위 재벌까진 감당이 안 된답니다.”

“부유한 게 죄는 아니잖아.”

“죄가 아니게 피해 갈 순 있겠죠. 그런 재력을 가지신 분들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엄소연의 말인즉슨 자신의 집안사람 누군가가 제 뒤를 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집에서 영화배우인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지언정 불법적인 일을 하실 분들은 아니었다.

뭐야, 이 여자. 막장 시나리오를 많이 봤나, 그런 소설을 읽었나. 소연의 말을 곱씹던 서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일 없어.”

“그건 이사님 생각이시죠. 아무리 몰래 만난대도 꼬리가 길면 밟혀요.”

“밟으면 밟혀주면 돼.”

“그건 이사님 생각이시죠. 일이 터지기 전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우리 관계는 여기서 매듭짓는 게 맞아요.”

“아니. 안 맞아. 난 안 끝내. 못 끝내. 네가 다시 생각해.”

“전 이미 마음을 정했다니까요. 며칠만 붙어 있자고 한 건 이사님이세요. 제가 싫다고 하면 깨끗이 물러선다고도 하셨고요. 약속은 지키셔야죠.”

“하…….”

쉽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이리도 어려운 여자인 줄은 미처 몰랐다.

말도 기막히게 잘하고.

말끝마다 꼬박꼬박 대꾸하며 지지도 않고.

한숨짓는 서준의 표정은 그리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여유로운 눈빛에 약간의 실소를 섞을 뿐이었다.


“좀 더 생각해 보자. 너도, 나도.”

 

 

***

빽빽이 들어선 하얀 건물과 긴 골목길이 인상적인 카디스는 거친 대서양과 맞닿은 곳이었다.

대형 크루즈 선박이 보이는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내 호텔에 서준과 소연이 도착한 건 낮 두 시경.

호텔 관계자와 드라마 제작팀의 환대 속에 태서준은 전망 좋은 고급 특별실, 인지도가 전혀 없는 엄소연은 낮은 층의 자그마한 룸이 배정됐다.

급이 다른 배우라 대우부터 다른 건 당연했으나 서준의 화려한 빛에 가려진 소연은 촬영팀의 눈을 의식해 그에게 어떠한 말도 전하지 못한 채 홀로 자신의 룸을 찾아들어야 했다.

서준이 방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넌지시 눈짓했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안 될 일. 호텔 초입 컨시어지 데스크에서부터 사람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와 저를 주시했다. 왜 둘이 같이 나타났냐는 듯이 말이다.

그 이외의 별다른 의심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 뒷감당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오롯이 제 몫이 될 게 뻔했다. 그들의 시선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촬영 스태프와 연기자들의 입심에 물어뜯길 사람은 대단한 배우 태서준이 아닌, 신인이라 그저 힘없고 만만해 보일 뿐인 저일 테니까.

그것이 현실이며 그와 저의 큰 격차임을 다시금 되새긴 소연은 서준의 진득한 시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나 위생 상태는 양호했으나 다소 허름하고 썰렁한 객실이었다. 소연은 일주일간 신세 져야 할 공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세월의 때가 묻은 싱글 침대 두 개와 붙박이장에 붙은 낡은 화장대, 화창한 대낮임에도 아치형 창문 앞에 가까운 건물 탓에 방 안은 조명등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낯선 환경이 막막하게 느껴진 소연은 멀거니 둘러보던 시선을 내려 저도 모르게 꼭 쥐어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말라가의 웅장한 저택.

아름다운 풍경과 몹시도 가슴 떨리고 황홀했던 밀애.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가 놔주지 않았던 이 손 때문에 설레고 흔들렸던 마음.

그 모든 게 끝난 지금이었다.

혼자뿐인 이 공간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젠 그만 태서준을 놓아주라고. 그와 함께했던 며칠간의 기억도 마음 깊숙이 묻어두라고. 욕심도 낼 만큼 냈으니 지금부턴 네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힘든 오늘을 잘 버텨내면 내일은 덜 힘들 거라고.

그러니 서글픈 감정 따위에 넋 놓고 있지 말라고. 그럴 때가 아니라고.


“아차!”

생각 끝에 정신이 번쩍 든 소연은 부랴부랴 여행 가방을 풀어 정리하고 여도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세비야 공항에서 카디스로 넘어가는 중.

“언제 도착하는데.”

-30분 전에 출발했으니까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아. 왜, 내가 보고 싶어?

“어. 엄청나게.”

-근데, 왜 목소리에 힘이 없냐. 혹시, 오빠가 까칠하게 굴었어?

“…….”

팬클럽과 회사 안팎에서 온갖 이야기를 다 듣는 여도순이 깐깐하기로도 유명한 태서준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소연의 축 처진 음성이 심상치 않은데다 묻는 말에 대꾸도 없으니 도순의 생각은 대번 그쪽으로 치우쳤다.


-이 양반이 진짜! 내가 그렇게 부탁했건만! 어허, 참네…… 이따가 나 만나면 오빠 욕 실컷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소연은 그래도 돼. 넌 내 최애 친구니까.

“훗, 알았으니까 조심해서 오기나 해.”

-오냐!

친구의 호탕한 목소리에 소연은 비로소 제 삶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는 여도순이 새삼 고맙고 든든했다.

통화를 마친 소연의 손엔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룸 바로 앞에서 만난 보조 작가가 수정된 새 대본이라며 건네준 것이었다.

당장 내일 있을 촬영 내용이 바뀌었다고 하니 서둘러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런데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새빨개지더니, 급기야 붉은 입술에서도 당황스러운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허, 이게 왜…….”

대사는 그대로이고 상황 설정 콘셉트가 조금 달라졌다고 했는데, 살펴보니 전에 없던 노골적인 신이 삽입돼 있어서였다.

헛웃음을 지은 소연은 설마, 하며 다음 장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기존의 것보다 더 짙어진 신들이 시야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그나마 노출 정도가 등과 어깨이니 망정이지, 이 정도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되려 캐릭터 비중이 높아진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문제는 그와 떨어진 지 채 30분이 안 되었음에도 벌써 태서준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그리움은 숨이 들고 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엄소연, 제발 이러지 말자…….

소연은 자신의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안 되는 걸 잘 알기에. 흔들리다 자칫 결심한 게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현우까지 잃을지도 모르기에.

어느새 소연의 눈가엔 불그스름한 기운이 자리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어도 이젠 그럴 수 없는 서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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