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연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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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연기니까
2023.05.22.
예전 그녀가 상큼한 햇과일 같았다면, 지금의 엄소연은 다디단 향이 진동하는 만추의 잘 익은 과실처럼 탐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만 있어도, 아무것 하지 않는 데도 좋았다. 가만 있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은 벅찼다.
그간 잘 안 쉬어지던 숨마저 편안해졌다. 보들보들한 감촉, 사과의 풋풋함과 은목서 향을 닮은 은은한 향기에 그저 푹 취해만 있어도 살 것 같았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저를 외면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말라가에서 그렇게 붙어 있었건만, 그곳에서 카디스로 넘어오는 내내 그리도 내 마음을 어필했건만, 그녀의 경계심은 한 뼘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거절은 항상 제 몫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마음을 빼앗긴 그녀에게 까이기까지 했다. 그 조그맣고 가냘픈 사람에게 이 태서준이 말이다.
하, 그게 말이 되냔 말이지!
내가 느낀 그 거리감은 대체 뭐냔 말이지!
가까이할수록 더 쉽지 않은 엄소연을 끊임없이 생각하던 서준은 침대에 뉘었던 몸을 일으켜 창가로 이동했다.
적당히 넓은 룸 컨디션은 고급스러웠다.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야 늘 있어 온 일이지만, 오늘따라 자꾸 뭔가가 허전하다.
아마도 이게 엄소연이 내게 안겨준 후유증이려나.
룸에 들어온 이후에도 줄곧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낮은 어영부영 밤이 되었고, 집념은 더욱 강하고 깊어졌다. 엄소연의 항복을 반드시 받아내고 말겠다는 오기 말이다.
이 밤, 흘러가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어둠으로 물든 야경을 너른 창으로 바라보던 서준은 갑자기 커튼을 닫고 창을 등졌다. 맞은편 건물에서 번쩍이는 석연치 않은 빛이 보여서였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쪽을 관찰하는 듯했다.
삐딱해진 눈썹 사이를 시니컬하게 좁힌 서준은 곧장 봉 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네, 이사님.
“내가 이상한 걸 봤는데, 신속하게 확인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수상한 자를 누가 보냈는진 알 듯도 했다. 하지만 들켰다는 걸 알려줘야 쓸데없는 짓을 그만할 터.
그 부분을 지시한 서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 잠시 동작을 멈췄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유치한 핑계를 대서라도 엄소연에게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준은 이내 핸드폰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당장 그녀를 안 보면 괴로울 것 같았지만, 그 성마름도 동시에 내려놓았다.
자고로 사람 심리라는 게 다가오면 멀어지고, 쫓아오면 도망치고 싶은 법이니까.
특히 엄소연은 더 그러한 것 같으니까.
***
다음 날 아침.
소연은 여도순과 함께 조식 뷔페가 차려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접시에 담으며 서준과 정면으로 마주친 소연은 습관적으로 꾸벅 인사부터 했다.
“안녕히 주무셨…….”
“…….”
그런데 서준은 안면박대하듯 소연을 본체만체하며 유유히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 앉았다.
그때부터 소연은 계속 무거운 표정이었다. 어제와 너무도 다른 태서준의 사늘한 태도가 적지 않은 충격을 던진 탓이었다. 하지만 도순이 그 부분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너, 어디 아파?”
“내가? 아닌데.”
“그럼 표정이 왜 그 모양인데? 곧 촬영 들어갈 애가 당장 관 뚜껑 열고 들어갈 얼굴인데 안 묻게 생겼냐고.”
“내가 그랬어?”
“어.”
“오늘 첫 신부터 말 타야 하잖아. 어제부터 그게 좀 부담스럽더라고.”
승마는 대학 교양 과목으로 경험이 있지만,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지만, 그게 언제 적인가. 소연은 혹시 첫 촬영부터 실수는 하지 않을까, 몹시 긴장되었다.
그리고 어디 그뿐일까.
오후에는 진한 멜로 신과 키스 신도 있다. 굳이 말로 안 해도 오늘 일정을 빠삭하게 꿰고 있는 도순은 손을 뻗어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아이고, 그래도 어쩌냐. 신인배우가 첫 신부터 수정을 요구할 수도 없고, 하지만 정 힘들면 내가 가서 말이라도…….”
“아니. 그러지 마. 내가 할 건 당연히 해내야지. 누구보다 열심히.”
늘 저를 암탉처럼 품어주는 도순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소연은 자연스럽게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억지로라도 웃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쿡 아려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속을 누가 알까.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조식 이후 배우들과 미팅할 때조차 서준은 소연에게 제대로 된 눈길 한번 건네는 법이 없었다. 진한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져 잘은 몰라도 그의 건조한 분위기부터가 저는 관심에서 열외인 듯했다.
기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기대했었나 보다.
결국 그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래, 이게 정상인 거지.
그래도 원 없이 안기고 안아 봤으니 그거로 만족하자, 엄소연.
서준의 마음이 진정 제게서 돌아섰음을 확인한 소연은 엄한 아랫입술만 꼭 깨물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서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다. 더욱 간절해질 뿐이었다.
소연은 그 날카로운 사실이 더 쓰라렸다.
***
토닥거리는 손길에 검은 말이 훅훅, 하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난 엄소연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소연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자, 말도 예쁜 사람은 알아보는지 큼지막한 눈동자로 서글서글한 눈빛을 내보였다.
시나리오에 있는 내용이지만, 마왕 기천율은 망아지에게 안대를 띄워 혹독한 길들이기로 한사람에게만 복종하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그 말이 이 말이라고 생각하니 소연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내가 너 따위에 진심일 리 있을까.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하루라도 빨리 내 앞에서 썩 꺼지란 말이다.’
조금 전 촬영 중에 들었던 그의 차디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말라가에서 느꼈던 따스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모습과 태도는 역시 기천율을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태서준 자체가 기천율 버금가는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과 함께 소연의 뇌리에 스친 건 현실에서도 그의 목소리로 듣는 비난은 그 어떤 말보다 끔찍할 것 같다는 거였다.
이렇듯 소연과 서준의 미묘한 간극은 오전 내내 꾸준히 이어졌다.
파삭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정오였다.
윤 감독의 슛, 소리와 함께 소연은 말과 카메라 앞에 섰다.
“그 말은 네 것이 아닐 텐데.”
낮은 목소리가 거센 바람처럼 고막을 깊이 파고들었다. 소연은 말을 타고 나타난 남자의 섬뜩하고도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죽이실 말이잖아요.”
당돌하게 덤비는 작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서준은 진한 눈썹을 높이 끌어올리며 건조한 시선을 내리꽂았다.
“네 처지도 그 녀석과 다르지 않아. 그 생각은 안 해봤나.”
평온을 삼킨 목소리와 표정은 역시나 마왕답게 여유롭고 무자비했다.
“…….”
이제 말을 타야 할 차례이지만 소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안정된 서준의 연기에 지지 않으려면 이번 신을 한 번에 성공시켜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기어코 안장을 밟고 말 위로 오른 소연이 두 손으로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마디와 낯빛이 새하얗게 변색했다.
얼굴 전체를 뒤덮은 겁먹은 표정이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연의 불안한 모습은 서준의 신경을 바짝 긁기에 충분했다.
혹여,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소연만큼은……. 차마, 그 꼴을 본다면 더는 태연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기우였다.
어느 순간 소연이 박차를 가했고, 이내 질주하는 말에 자신의 모든 걸 내맡긴 그녀는 긴 머릿결을 나부끼며 멀어져갔다. 여차하면 촬영을 중단시킬 작정이었던 서준도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촬영 스태프와 카메라에서 꽤 많이 떨어졌으나 공중에 높이 뜬 드론 세 대는 서준과 소연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앞서가는 말을 따라잡은 서준이 소연과 나란히 달리며 물었다.
“안 무서워?”
“전혀요! 빠르게 달리니까 너무 좋아요!”
“하!”
그녀가 진심으로 크게 미소 짓자 그도 씩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못 떼지 못했다.
제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두 마리의 말은 속도를 맞춰 울창한 나무 사이로 쭉 뻗은 길을 시원하게 내달렸다.
***
촬영 다섯째 날.
연기자 모두는 신화가 탄생한 시대를 그럴싸하게 재현한 현장에 있었다.
탁 트인 바다와 상인들로 북적이는 마을 광장. 그곳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왕궁 안에서 노련한 배우들은 촬영대본 그 이상으로 각자의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주인> 작품명과 걸맞은 태서준이 진한 카리스마를 드리우며 세트장에 등장하자 다음 촬영을 기대하는 연기자 모두는 배우에서 관객으로 태세를 전환하며 카메라 뒤로 모여들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낙조에 물든 바다는 온통 핏빛이었다. 이때부터 비극의 서막, 서준과 소연의 애절한 러브신이 카메라 앞에 펼쳐졌다.
한차례 격정적인 장면이 완성되자 소연의 둥근 어깨에 입맞춤한 서준은 상의를 탈의한 채 크고 고풍스러운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에 섰다.
소연은 얇은 천을 몸에 감으며 서준의 등 뒤로 다가가 얼굴을 살며시 기댔다.
천천히 돌아선 서준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슬픈 얼굴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말없이, 그저 애잔한 눈빛으로 그윽하게.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이 다소 격해졌다. 서준은 길고 튼실한 팔로 소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안고 다시 침대로 옮겨가 비단결 이불 위로 몸을 누인 서준이 비스듬히 등을 세웠다. 근사한 등 근육이 느리게 물결치며 두 얼굴이 짙게 포개어졌다.
카메라 앵글이 소연을 완전히 가린 서준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
기절할 만큼 놀라버린 소연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눈동자마저 풍랑에 휩쓸려 부서진 듯 심히 출렁거렸다. 가슴은 밑도 끝도 없이 철렁 내려앉아 쿵쾅쿵쾅, 거칠게 요동쳤다.
적당히 겉만 맴돌 줄 알았던 입맞춤이, 그의 더운 숨결이 불시에 깊이 침범한 거였다.
진짜 키스였다.
꼼짝 못 하는 소연의 입술을 한껏 머금은 서준은 이불을 끌어와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 모든 움직임은 콘티에 있는 내용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불 안에서 벌어지는지 일은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
연기니까.
그러니까, 나 자신을 애써 속이지 않아도 되는.
이 남자를 전부 독차지할 수 있는 그와 나만의 지금이니까.
태서준과 엄소연의 연기는 완벽 그 자체였고, 두 사람의 열연에 촬영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태서준이야 원래 잘하는 배우지만 엄소연 씨는 신인인데도 NG 한 번을 안 내네.”
“애처로운 눈물 연기가 사랑스럽기까지 해서 나도 깜짝 놀라는 중이야. 저런 보석을 어디에서 구했대?”
“그렇지? 얼마나 노력했으면 리딩할 때랑 차원이 완전 다를까. 난 처음부터 엄소연 씨가 잘해 낼 줄 알았다니까.”
촬영 현장을 줄곧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열연에 아낌없는 찬사를 정신없이 쏟아냈다.
“그나저나 오민정 씨는 어쩌냐. 언제고 이 장면을 보게 될 텐데.”
“샘 많은 그 성격에 어디 가만 있을까. 당연히 눈 돌아가지.”
“뭐, 이제 와 따져봤자 아니겠어? 시나리오 다 훑어보고 저가 여주 하겠다고 난리 친 건데. 글보다 현장 연출이 더 잘 됐다는 게 문제면 문제겠지.”
“오늘쯤 카디스로 온다고 하지 않았어? 이따가 오민정 씨를 만나더라도 굳이 내색하진 말자고.”
“암, 그래야지. 그 천방지축은 나도 감당이 안 되거든.”
뒤에서 들리는 잡담을 듣고만 있던 윤 감독이 피식 웃으며 메가폰을 들어 올렸다.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