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0화
왕국 - Lv.545 강연(5)
강연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정체불명의 강사는, 아니, 이제는 모두가 인정해 버린 위대한 마법사는 존재할 수 없는 원소의 기초부터 핥듯이 설명해 갔다.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설명이었다. 중간 중간 질문을 받으려고도 했으나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참았다.
강연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새로웠으며 그 어느 부분 하나 기존의 이론과 동일한 부분이 없었다.
질문을 하려고 하더라도 그들이 평소에 생각해 본 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떠오른 의문은 다음으로 넘어가면 해소된다.
아주 새로운 개념임에도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끼워 맞추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알고 나면 어째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기에.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은 유배자 마법사는 마법을 너무 과학과 합리로만 생각한다.
마법이 처음부터 실존하는 세상에서는 도제식으로 주먹구구 계승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다.
그들에게 마법은 지나치게 신비다.
미궁의 마법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그 원인은 신비이되, 결과는 합리인 것이 마법.
그래, 마치 게임 시스템이 그냥 원래 그런 걸로 하자고 말하듯이 말이다.
푸른 불길은 계속하여 좌석의 앞에 마련된 화로를 달구었다. 전설의 무기인 레바테인의 화염은 오래도록 그 푸른 불을 유지했다.
그곳은 동시에 연구소이기도 했다.
뒤늦게 입석으로라도 들어온 자들은 좌석을 구하지 못한 점을 아주 애석해했다.
실시간으로 제 마력을 흘려 넣어 분석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강연의 막바지에 도달해서는 마력 탈진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긴급히 구호조치가 행해지고 그럼에도 강연은 계속된다.
하나하나 기초부터 발상을 뒤엎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발상의 새로움을 제하더라도 실로 정밀하고 어려운 술식들이 다량으로 등장한다.
그 시연의 과정에서 레베카 교수가 공동 연구자로 이름을 올렸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사실은 새로운 발견으로 널리 알려졌다.
정말로 널리 말이다.
화룡점정은 날이 저물 때까지 이어진 강연이 끝나고 마법의 신이 강사에게 팬으로서 사인을 청했을 때였다.
그는 그를 상징하는 아티팩트 [현자의 봉서]를 펴 들고 달려갔다.
뛸 듯이 기뻐하는 마법의 신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새겨졌으며 이 강연에 대한 하나의 전설로, 혹은 상징으로서 기억되었다.
* * *
"새롭긴 하군."
"게이머의 방식이다. 저 녀석은 그런 존재인 모양이야."
"독특하군. 게이머라는 놈들은 도리어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나?"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의외로 게이머 태그를 달고 미궁에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는 이는 드물다.
게임으로 접한 세상과 실제 미궁의 괴리도 문제지만 아는 것이 있으니 더 쉬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된다.
하기야 미궁에 존재하는 무수한 두려움을 미리 알고 시작한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꺾이리라.
하나 간혹 그런 영웅적인 존재도 있을 수 있겠지. 미궁의 무수한 가능성은 무엇이건 빚어낸다.
"레베카라. 저 마법사도 처리해야 해. 그리고 어차피 일그림이라는 녀석의 파티였지?"
"그래."
"이참에 싸잡아 죽이면 되겠군. 이플릭셔스가 그때도 곁에 있지는 않겠지."
"하여간 뭔가 자꾸 하려고하는 녀석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미궁을 싫어하지? 이런 힘을 쥐여 주는데. 도리어 은혜로운 곳이 아닌가."
노인의 투덜거림에 소년이 피식 웃었다.
"저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역시 그럴 것이다. 회유할 수 없는 녀석들은 죽여 없애는 것만이 답이지."
"이 왕국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아닌가."
오랜 세월 살다보면 알게 된다.
너무 유능한 이는 제 자신을 믿기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 도전은 왕국에 끊임없는 변화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는가.
그 끝에 결국 실패한다면 미궁은 실패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파괴된 잿더미 위를 다시 새로이 찾아올 유배자의 터가 되어주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왕국은 어쨌거나 유배자의 안식처다. 이보다 살기 좋은 곳도 드물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좋지 않은가? 왜 자꾸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인지.
"그래도 저자가 오르골을 자처한다는 점은 좀 우습군."
"[더 시티즌]의 오르골이 알면 참 좋아하겠어."
"그러고 보니 이플릭셔스가 꼬리를 달아두었던데. 무슨 의도일까."
"우리가 잘사는지 궁금한 게 아니었을까."
"흐흐, 신좌가 푹신했으면 좋겠군.
* * *
[발상의 전환! 마법사들의 사고는 그간 얼마나 경직되어 있었는가!]
[미궁의 법칙에 대한 새로운 논문이 굉장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
[자취를 감춘 마법사 ‘오르골’. 그는 대체 누구인가? ‘푸른 달의 따님’ 레베카 교수가 말하다. ‘재수 없는 흡혈귀.’]
[변화하는 상성 관계. 유배자 간의 전투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새로운 패러다임!]
날이 넘어가기도 전에 호외가 잔뜩 찍혀 나왔다. 신문 헤드라인들이 아주 화려하다.
"이거 사실 겜창이면 당연히 해볼 접근인데 말이지."
"전 뭐가 대단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거지 그거. 무기 속성 변환이 자유자재로 된다는 시스템을 이제 깨달은 뉴비들의 아우성? 왜 우리는 이렇게 좋은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방치했을까? 요약하면 딱 그거야."
"튜토리얼에서 알려주지 않았나 봐요."
"아무것도 안 알려주긴 하잖아."
사실 어려운 조건이긴 하다.
세 가지 관점이 동시에 필요한 생각이긴 하니까.
미궁을 게임의 일부로 생각해야 하며, 마법의 신비를 긍정하고, 후대에 정립될 마도공학의 합리적인 방식에도 익숙해야 한다.
한마디로 대단한 유배자 게이머 마법사여야 한다.
사고라는 것은 생각 외로 경직되기 쉬운 것으로 유배자들은 대체로 오래 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경향이 크다.
기존에 마법사로 등장하는 NPC들은 당연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마 [아케인] 녀석들도 스킬에 의존하는 마법사일거야."
"레베카는 조금 다르지 않았나요?"
"남의 마인드맵 빌드를 캐묻는 건 큰 실례지만 레베카도 워메이지로서 정통 마법사는 아니야. 마인드맵과 스킬이라는 좋은 기능을 왜 안 써 먹냐고."
유배자 마법사에게 제대로 된 정통 마법이란 스킬로서의 마법을 보조하기 위해 익히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레베카의 워메이지로서의 마법 운용 방식도 스킬이 베이스다. 직접 구사하건 스킬로 구사하건 성능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구축을 스킬로 한 다음에 그걸 미세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거기에 그마저도 엄청나게 보정이 들어가 있을 거란 말이지. 마법사는 패시브가 전사만큼이나 중요하거든."
"유니크 스킬도 패시브였죠?"
"맞아. [초마도사] 같은 거."
타 클래스의 유니크 스킬이 강력한 필살기로서의 존재감이 크다면 마법사의 유니크 스킬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보다는 ‘마치 내가 마법 초고수가 된 것 같은 보정’을 주는 종류가 많다.
그쪽 계통의 정점에 선 것이 미아가 가진 [초마도사]라는 스킬이다.
정통 마법사 계통의 보정을 가장 높게 부여하는 유니크 스킬이며, 제일 범용성이 높다.
"미아는 마인드맵이 없으니까 스킬로 술식 구축을 단순화하는 짓은 할 수 없지."
"어, 혹시 그럼 마탑의 그랜드 마스터니 뭐니 해도 워메이지로서는 그리 고레벨이 아닌 건 그래선가요?"
"정확해. 유배자 마법사를 이길 수가 없거든. 요즘 똑똑한데?"
"전 항상 똑똑했어요! 공부에 취미가 없을 뿐이죠."
"그걸 취향의 문제로 돌리는 거냐."
유배자가 100년의 기한이 다하더라도 마인드맵만은 남는다. 대놓고 미궁이 편을 들어주는데 어떻게 전투로 그걸 이기겠나.
달리 말하면 미아는 아무리 유니크 스킬을 둘둘 감고 있다곤 하더라도 그런 유배자 마법사를 상대로 동등한 전력을 이루어냈다.
파티원 중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건 미아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일반적으로 바르바로이 클랜의 랜덤 NPC로 출현하는 [초마도사]치고도 월등하다.
스킬도 다른 것을 더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이미 상당히 유니크한 NPC다.
정말로 순항 중이다.
역시 로그라이크는 하다 보면 언젠가는 깬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깰 수 있단 말이지.
그게 97년이 걸렸을 뿐.
"자 그럼 기반 다지기를 들어간다."
"지금 바로 출발하나요?"
"그래. 이런 대형 어그로를 투척해 두고 바로 그날 밤에 자기들 목을 치러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내 목적을 아는 마법의 신은 강림한 김에 도움을 줄 필요가 있냐고 내게 물었다.
틀림없이 이 자리에 있을 [아케인]의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메인 던전에서 만날 신화적인 마법사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느 정도 PVP와도 흡사하다.
여러 번의 종말을 겪고도 살아남아 마법사의 나라를 다시 세울 정도인 워메이지라면 어디 가서 구하기도 힘든 상대다.
딱 적당한 스파링 상대일 수 있다.
"기습하고 실패하면 바로 이탈한다.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쳐야 할 목은 여럿이고 우리 편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일그림은 강연에 맞춰 아케인을 떠났다. 그는 너무 유명하기에 그럴 필요가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경영자들이 그 아래의 하이랭커들을 사다리차기 하려고 하면 당연히 반발하는 자들도 생긴다.
일그림 파티가 제일 전면에 나서 있고 어쩌면 감시도 당하고 있었겠지만, 그뿐만인 것은 아니다.
충분히 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그들이 지금껏 조용했던 것은 확연하게 열세였기 때문일 뿐.
안 그래도 조만간 터져 나올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젠 열세가 아니다.
"마법의 신이 지금 여기 있는 [아케인] 멤버는 두 명뿐이라고 하더라. 보나 마나 멍청한 생각하고 있겠지."
자신들의 절대 우위를 확신하고 있을 것이며, 천천히 요리할 생각을 하는 중일 터.
오랫동안 도전자도 그만두고 그냥 유유자적하게 살다 보면 게을러진다.
유배자로서 게을러진다.
방심은 언제나 강자의 적이다.
죽으면 언제나 다시 약자로 돌아갈 수 있는 미궁이다. 현역인 유배자들은 훨씬 더 과감하며 긴장감 있는 삶을 지속한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 잡아 엉덩이에 버섯이 피었을 녀석들은 그러기도 힘들다.
마법의 신이 기억하는 그들의 행동에 따르면 확실히 그러했다.
사실 무수한 성물을 파밍 해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라도 안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쪽에 대신격의 신도가 있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원래 싸움은 선빵이 최고고 상대가 우리를 모른다면 더욱 더 좋다.
"그래도 이번엔 며칠 전과는 달라. 일그림 파티와의 전투는 스킬셋을 다 파악한 채로 시작했다는 걸 명심해. 상대가 무엇을 숨겨뒀냐에 따라서는 우리가 불리할 수도 있어. 기습의 우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것을 끝내야 해. 명심시켜."
"넵, 잘 전달할게요."
지금은 단둘이다. 서브 리더로서 희우가 다른 파티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할 것이다.
내 권위가 너무 강해져서 서브 리더가 빛이 바래서는 안 된다. 희우에게도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지.
"안전제일이야. 우린 결국 나중 가면 무조건 이겨. 지금 여기서 누군가 죽을 것 같다면 두말없이 뺀다."
나로서는 희우와 에길에게 달아둔 부활이 빠지는 것만 해도 뼈아프다. 메인 던전에서는 몇 번 죽게 될 거니까.
본 게임도 하기 전에 김이 새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성공하면 계속 쉬지 않고 목을 친다. 일그림네 파티가 미리 접선할 거야. 이제 준비하라고 해."
마법의 신은 강림한 김에 원수들에게 복수하지 못한 것을 특별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이쪽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아케인]이 멋대로 견제한 것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보아왔던 마법의 신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의 마법신이다.
수에 밀려 목숨을 잃느니 기존 마법의 신과 싸워 이기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원한이 있다고 말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내 무운을 빌어주었을 뿐이다.
위치는 파악했다.
마법의 신이 직접 어느 방향으로 떠났는지 마법의 실을 달아 파악해 주었다.
이 경우에는 나도 들키지 않고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직접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쩍지 않겠나.
마법의 신이 그런다면 해묵은 원한을 떠올리며 웃고 있겠지.
세워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대마탑은 아직도 아케인의 중심에서 그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우고 있다.
바보들은 높은 곳을 참 좋아한다.
두 늙은이들이 그 꼭대기에서 왕이라도 된 기분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