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1화
왕국 – Lv.3956 [아케인](1)
야음을 틈타는 것은 언제나 잠입의 기본이다.
마법사들의 다양한 감지수단을 생각하면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 인간은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그렇게 타고났고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버릴 수 없는 감각이다.
물론 미아는 가시광선을 보는 법을 이제야 조금씩 익혀가고 있을 정도로 다른 세상에서 산다.
그리하여 뱀파이어로서의 특성과 합쳐져서 가장 밤눈이 밝다.
어두운 아케인의 전경, 대마탑의 주변은 자못 신비로울 정도였다.
인공적인 별빛들이 이 마법의 나라를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들지 않게 밝혀준다.
가로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거리는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된다.
밤늦게 제 연구실에 틀어박힌 마법사들의 탑도 불빛을 보탠다.
아케인은 네 나라 중 가장 작고 아담하지만 그 덕에 제일 정비되어 있다.
대마탑도 마찬가지다.
마천루라 불릴 만한 빌딩들은 시티즌에 충분히 존재하지만 이 대마탑만큼 거대하지는 않다.
마법의 보조 없이는 이렇게 서 있지 못하는 탑이다. 그야말로 바벨탑이 생각날 정도로 거대한 구조물이 솟아 있다.
중간층까지는 개인 연구실이 가지기에는 너무 귀한 설비들이 들어서 있으나 그 위쪽으로는 미지였다.
가끔 초대받는 마법사가 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아케인]의 공간이다.
지금 사냥하러 갈 마법사 둘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아는 바대로라면 마법사라는 존재는 아주 신중하고 주의 깊은 경우가 많다.
"걸어 올라가는 건 무수한 마법 트랩에 노출되는 바보짓이지."
"그런 걸 왜 만들어두는 걸까요?"
"약간 취미라고 해야 하나. 악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게 또 해보면 재밌거든."
희우는 잠깐 고민하며 나와 미아를 보더니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네.
"하지만 저기 탑 외벽에 설치된 마법진들을 보면 바깥에서 날아 들어가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란 말이지."
"제가 박살 내버릴까요? 물리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케인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수가 있다.
비밀 조직은 원래 몰래 죽이면 아무도 모르지만, 대놓고 죽이려 들면 우리가 미친놈이 된다는 거지.
저들은 어쨌건 왕국의 기반을 다진 이들로서 존경받고 있다.
일이 드러내 놓고 벌어진다면 우리의 편을 드는 자는 극소수다.
"그러니 위로 침투한다."
"네?"
말만 들으면 의아할 수 있지. 대부분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취약하다.
내가 항상 뭐 저딴 일을 벌이냐는 말을 듣는 이유다.
그게 사실 가장 효율적인 경우가 아주 많거든.
* * *
고위 마법사는 우주 공간에서도 생존하며 비행할 수도 있다.
그러니 대기권 내에서 비행하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금 벗어나도 좋다.
대마탑의 꼭대기는 거의 구름에 닿을 정도의 높이지만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된다.
"왕국에는 우주가 없군."
"여긴 행성이 아니라 그저 공간이거든. 물론 수직으로 계속 상승한다면 외계라고 부를 만한 대지는 있어. 거기서 살 수는 없는 데다 위험한 괴물도 많지만."
그것들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게임 시절에도 번외 히든 던전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곳이지 특별히 파밍 요소는 없다.
할 게 모두 사라진 수준의 캐릭터가 업적 따러 가는 곳이지.
그러니 공기가 희박해지는 높이에는 머무는 것이 거의 없다.
기차가 주 운송수단임에서 알 수 있겠지만 보통 왕국에서 비행기 같은 게 태연히 운행되진 않는다.
마법이 결합된다면 차라리 배를 띄워 비공정을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저 아래에 구름을 뚫고 솟아 있는 대마탑의 꼭대기가 보인다.
나는 우리 천사를 보았다.
"자, 알겠지? 수직으로 뚫어라."
유일하게 미아의 보호 바깥에서 날개를 진동시키며 떠 있던 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미아는 바로 뒤따라서 파티원들을 이동시켰다.
* * *
어떻게 공기가 희박한 곳까지 건물을 세울 생각을 한 거지?
하지만 덕분에 공기저항이 줄어든 것이 느껴진다. 출력에 비해 적은 속도를 내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조금 더 해도 문제가 없다.
기천사는 유성이 되어 내리꽂힌다.
마찰열에 의해 몸에서 불꽃이 튀고, 갑옷이 손상된다.
천사의 육신은 아직 버틸 수 있다.
거의 한계까지 가속하자 시야가 일그러져 보인다.
이런 속도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소리의 벽은 일상적으로 마주치며 눈을 손으로 가리는 법도 익숙하다.
안구마저 튼튼한 천사라는 존재는 이런 상황에서도 앞을 볼 수 있다.
탑의 옥상이 보인다. 뾰족한 지붕은 없다.
그보다는 체스 기물 룩의 상단처럼 평평한 옥상이다.
[슈퍼 히어로 랜딩]
고도를 높이는 와중에 물어봤었다.
"그런데 그냥 전력으로 처박으면 탑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저건 엄밀히 따지면 건축물도 아냐. 그냥 건축자재들을 마법으로 저 자리에 고정시켜 둔 거지."
"와, 그 마력을 어디서 감당해요?"
"마력로가 여럿 돌아가고 있을걸? 저 녀석들이 수 없는 종말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강해서 아닌가요?"
"개인이 단순히 강한 것만으로는 힘들어. 요새와 군대가 필요하지."
군대는 국가라 불리는 길드. 요새는 그들의 본거지.
"그러니 그냥 처박아 위쪽이 좀 주저앉고 말걸?"
"만약 아니라면 어쩌죠?"
"일이 더 쉬워지는 거지."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희우는 시우의 검. 적을 무찌를 뿐!
어쩐지 신나는 기분이었다.
은빛 섬광의 녹화는 조금 전부터 실행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것도 녹화될 것이다.
생각은 길었으나 실제로는 찰나였다.
역수로 쥔 채 교차한 두 자루의 단검이 옥상에 닿는다.
그리고 차례로 발이, 무릎이 옥상에 닿았다.
몸이 박살 날 것 같은 충격이 다가오지만 찔끔 머금고 있다가 삼킨 포션으로 그와 동시에 회복된다.
옥상의 전체가 힘을 받으며 으스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반발력이 다르다. 이리도 막대한 힘으로 부딪혔건만 건물 전체로 힘이 분산되며 버텨낸다는 감각이 든다.
희우는 능숙하게 힘의 방향을 통제했다.
무술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하는 행위가 결국 이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힘이 흐를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그 방향을 자신의 뜻대로 제어한다.
이제 가진 힘의 크기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지만 아직도 희우는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
부단한 연습과 훈련의 결과다.
찌르기.
바깥에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난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온 힘을 담아, 단단한 껍데기를 꿰뚫고, 그 속살을 헤집어 내장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묵직한 공격.
그러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운동에너지를 한 점에 집중해야 한다.
통째로 주저앉힐 생각을 접고 몸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가 완전히 해소당해 버리기 전에, 단검의 끝에 집중시킨다.
으스러지던 옥상은 그 한 점으로 단숨에 부서졌다.
뚫고 내려간다. 내려갈 수 있는 만큼 꿰뚫으라고 했다. 그렇게 길을 뚫어 적의 모든 방비를 날려 버린 후에 파티원들이 진입하는 것이 최선.
종족 자체로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가진 천사가 순식간에 당할 확률은 극도로 낮다.
희우는 정확히 대마탑의 약 5%, 50여 층에 바람구멍을 내는 데 성공했다.
* * *
천재지변.
즉시 그 생각이 들었다.
끔찍할 정도의 힘이 상부를 강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요새화된 거탑은 거인이 작정하고 후려쳐도 오랜 시간을 버텨낸다.
그렇게 물리력을 분산하고 무효화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니 당연하다.
침공이 찾아왔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세워둔 요새다.
이 요새가 무너지는 것은 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 위쪽 외계의 괴물? 누가 그걸 건드렸나?
합당한 의심.
하지만 다음 순간 빛줄기가 지나쳤다.
노인이 방벽을 세웠다. 실내가 엉망이 되고 대부분의 장치나 장비들, 혹은 소장품들이 가루가 되어 박살이 났다.
풍압만으로도 평범한 건물은 작살이 났을 정도의 물리력이 동반된다.
꿰뚫고 지나간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습격인 것만은 확실하다.
먼지가 치솟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지를 못한다. 파편이 온통 내부를 뒤집어놓는다.
월드컵 경기장만큼이나 거대한 지름을 가진 탑임에도 그렇다. 다른 층들은 어떤 꼴일까?
소년이 바람을 일으켰다. 먼지와 파괴의 부산물들이 압착되어 시야를 걷는다.
지름이 십 미터는 될 듯한 바람구멍이 나 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공간을 열어젖혔다.
마법사로서 고레벨이 되어가다 보면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위아래를 살피며 탐지를 터뜨린다.
그 탐지가 즉각 반응했다.
[뭔가 내려온다!]
육성으로 전달할 시간이 없었다.
노인은 즉각 시간을 멈추어 반응했다.
지팡이 끝의 성물이 빛난다.
시간신의 황금빛 신성이 주변을 감싸고 세상을 감싼다.
내려오던 것이 정지했다.
잿빛으로 굳어졌던 소년이 멈춘 시간의 사이로 빠르게 합류한다.
"저게 뭐지?"
"유배자군."
"마법사와…… 오르골?"
"그 강연자다!"
아무리 현역에서 물러난 지 엄청난 시간이 지났다곤 해도 여기서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랭커조차 될 수 없다.
즉각 대량의 마법이 캐스팅된다.
그리고 그것이 구현되기 직전 저쪽의 몇 명도 멈춘 시간 속으로 합류해왔다.
* * *
마법사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정지 대책이다.
랭커급이라면 노련하게 구사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하이랭커라면 얄짤없다.
하지만 도리어 그래서 마법사들이 시간 정지를 잘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어차피 상대가 재빨리 끼어들 테니 자꾸 사용해서 익숙하게 만드느니 결정적인 한순간을 벌기 위해 아끼는 것이다.
그러나 성물이 있다면 조금 달라진다.
시간신의 권능은 마법적인 시간 정지와는 차원이 다른 보안을 자랑한다.
그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양궁에서 중앙 카메라를 맞히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일반적인 시간 정지의 사이를 캐치하는 것은 단지 표적판에 맞추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고 말이다.
그래서 희우의 뒤를 따라 내리꽂히던 파티원들 중에 제때 상대의 시간 속으로 합류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탄탄탄, 마법의 탄.
나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속성을 부여하지도 않고 레벨에서 오는 막대한 마력량을 고스란히 때려 부은 무상성의 마탄들.
그리고 반사적으로 펼쳐둔 수천 겹의 마력 방벽이다.
나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냉기를 내뿜는 레바테인이 화염을 발한다.
그 끝에 모든 마법을 마나로 되돌릴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오르고.
아래에서 나를 향해 발사되는 마탄 사이로 뛰어든다.
* * *
당연하지만 시간의 천사는 시간의 권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마탑을 엄청나게 파손시킨 후, 그 파괴의 반작용으로 망가진 몸이 회복되자마자 다시 날아오를 수 있었다.
이미 주변의 시간이 굳어 있음은 느껴진다.
쏜살같이 제가 뚫은 구멍으로 다시 합류한다.
구멍은 아직 다 무너지지조차도 않았다.
과연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날개를 초고속으로 가동하고 있으면 머리도 핑핑 돌고 사고의 속도마저 가속하는 기분이 든다.
내리찍은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며 아직도 무너져 구멍이 뚫리고 있는 와중에서 굳어버린 시간을 돌파한다.
일어날 일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적 둘과 그녀, 그리고 오빠만이 이 시간 속에 있을 것이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위쪽에서는 2대1이 벌어진다.
그것을 2대2로 만들고 다른 파티원들이 이 시간의 틈으로 끼어들 시간을 번다.
그렇게 하면 6대 2다.
만고불변의 진리.
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이제 희우는 시우의 방패!
"우오오옷! 마법 저항력!"
튼튼하지 않은 기천사조차도 마법사에게는 끔찍할 정도의 천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너져 내리는 대마탑의 구멍을 뚫고 치솟아, 저 위편에 무수한 마탄의 사이로 낙하하는 연인이 보인다.
마법을 잘 모르는 희우도 마력의 크기는 느낀다. 그리고 대충 맞으면 죽을 것 같은 마법은 구분한다.
저 급조된 마탄은 제대로 된 타격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일단 급하게 내쏘는 되는대로 펀치나 다름없다.
그러니 맞아도 된다!
"마법 저항려어어어억!"
순식간에 도달하여 마탄에 몸으로 부딪힌다.
막대한 마력이 투입된 마탄이지만 아무런 속성부여도 술식도 없기에 천사의 몸에 닿는 족족 분해된다.
흩어지는 마력은 시간의 틈에 끼어들어 있는 술자의 의지를 벗어나고, 뭉쳐있는 그대로 정지한다.
주인을 잃은 마력은 누구나 통제할 수 있다.
희우가 아는 한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자 검사가 그 마력을 끌어들이며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를 길게 뽑아낸다.
"으랏차아!"
요즘 희우의 영향을 받은 모양인지 의미 없는 기합성을 내지를 일이 늘었다.
서로 닮아간다는 건 즐거운 일이므로 희우도 즐거웠다.
절도 있는 동작의 커다란 회전 베기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며 적을 향해 움직인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상대는 대응했다.
공간의 균열이 닫히기 전에 분해되어 산산이 부서진다.
일그러진 공간은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은 시간의 일부가 되었다.
한참이나 거리를 벌린 상대편, 노인과 소년 중에 소년 쪽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끝에 불길한 보랏빛이 모여들려는 조짐이 보인다.
천사여도 피해야 하는 마법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고 저게 무엇인지 구현 직전에 깨닫는다.
[죽음의 광선]
이번에는 이쪽이 뒤에 숨을 차례.
마법조차 분해하는 오러 블레이드 뒤편으로 뛰어들자마자 보랏빛 죽음의 광선이 이쪽을 향해 그어진다.
극히 위험한 히트 스캔 점 공격.
하지만 이미 손의 방향을 보고 정확한 자리에 레바테인이 위치해 있다. 광선은 일렁이는 오러에 닿자 마력으로 분해되어 힘을 잃었다.
그 순간, 첫 한 호흡이 지나갔다고 넷 모두가 느꼈다.
다음 호흡을 위하여 넷이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