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52화
왕국 – Lv.3956 [아케인](2)
스펙이 전부인 것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그렇다.
현실이 된 미궁은 게임과 그 사이의 중간에 가까운 특징을 가진다.
장비가 좋고 레벨이 높다는 것만으로 불합리한 튼튼함을 얻을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그보다는 스킬.
아케인의 둘은 일단은 마법사로서 튼튼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난데없는 습격에 진지하게 대응했다.
완전히 전사가 아닌 이상 방어력이 공격력의 파워 인플레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몇 가지 보험을 제외한다면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다.
실로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기습이요 실전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했다.
경험도 경험이지만 막대하게 투자된 지능 스탯은 마법사에게 불굴의 정신력과 판단력을 부여한다.
소년이 제안한다.
[소드 마스터다. 방어가 안 먹히니 베이면 죽는다. 너보단 내가 더 유리할 테니 맡도록 하지.]
[그럼 나는 천사를 상대로 시간을 끌겠다.]
노인이 대답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 그리고 유대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
마법적인 대화는 생각을 전달한다. 육성과 다르게 생각과도 같은 속도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역할이 나누어진다.
유불리는 명확하다.
저들이 기습한 것이 그 증거이며, 이곳은 그들을 위한 요새다.
일대일이라면 반드시 이긴다.
그들보다 고레벨이 몰래 나타날 수는 없다. 메인 던전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판단.
시간의 틈새에서 아직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있으나 곧 저들의 동료가 이곳으로 끼어들 것이다.
그전에 처리하면 될 일.
그리고 그 전에 공간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렵게 갈 이유가 없다.
일대일이라면 이긴다.
그럼 상황을 강제로 일대일로 만들면 된다.
[시간 정지 사이로 끼어드는 속도를 보면 여간내기가 아니다. 조심해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속도가 이상하다. 시간의 신앙을 염두에 두는 게 좋다.]
성물을 쌓아두고 권능을 휘둘러대는 만큼 빠르게 생각이 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은 정보도 없다. 그것은 아주 좋지 않은 일이다.
[캐스팅할 시간을 먼저 벌지.]
죽음의 광선이 뻗어 나온 소년의 팔이 내려가며 여러 가지 소매틱이 그려진다.
고레벨이 되고 나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다.
무수한 패시브의 보정으로 평범한 유배자가 보기에는 한순간일 캐스팅 시간조차도 동급의 적에게는 빈틈이 된다.
따라서 마법사끼리 적과 조우했을 때의 기본은 서로의 캐스팅 시간을 벌어주는 것.
소년의 마법이 만들어지는 동안 노인이 지팡이 끝에 마력을 모아 물리적 장벽으로 쏘아냈다. 강력한 마력 방벽을 발사체로 삼는 형태다.
이러면 가성비는 나쁘지만 무속성 마력이기에 상성도 없다.
겹을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만들어지고 생성되는 마력의 벽이 날아든다.
공기를 대체하여 밀도 높은 마력의 벽이 들어찬다.
천사의 몸에서 창백한 불꽃이 튄다. 마력방벽은 몸 주변에 가는 즉시 통제를 벗어나 흩어진다.
하지만 고체 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강렬한 저항은 공기저항 따위와는 비할 수 없다.
단숨에 음속으로 가속할 천사의 비행이 벽과의 마찰로 느려진다.
소년의 마법을 방해할 것을 대비해 마력의 실도 내뻗는다. 오르골을 자처하는 강사는 강력한 마법사다.
그러나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다.
노인은 그 상황을 정보로서 분석했다.
천사는 마법에 대한 조예가 없다.
이는 예상 가능한 사실이었다. 마법적인 공격이었다면 대마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으리라.
건축된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고정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개인 차원의 마력으로 돌파할 수 없는 수준의 역장을 발생시킨다.
천사는 전사? 암살자? 사용하는 무기는 단검. 그렇다면 단검전사?
그리고 강력한 마법사일 것임이 분명한 저 강사는 동시에 소드 마스터다.
아까 마법을 베어냈던 것, [데스 레이]를 베어냈던 것이 무엇일까? 일반적인 오러블레이드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다.
동시에 저 강력한 마법사는 전혀 이쪽의 마법에 간섭하지 않고 있다.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사정거리가 어떤 식으로건 제한된 상태로 보인다.
다음 순간, 조금 느려졌던 천사가 노인의 눈앞에 도달했다.
노인은 지금 자신이 그걸 받아 내야 함을 알고 있다.
무모한 행위지만 익숙하다.
쾅 하는 소음과 함께 수천 겹의 마법 방벽이 바스러져 날아간다.
노인은 마지막 순간 충격을 대비하여 마력의 흐름을 원으로 돌렸다.
쏘아져 나가던 물리적 충격이 원을 따라 번지며 분산된다.
물론 대단한 소용이 있지는 않다. 단지 완전히 죽지 않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노인의 의식이 잠깐 꺼짐과 동시에 소년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역설의 제논]
공간이 쭉 늘어났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 * *
정보가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케인]을 비롯한 왕국의 경영자들은 PVP에 능할 것이다.
그 사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수단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증명된다.
그러니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피아 모두 마찬가지다.
적은 냉정하게 대처하고 있다.
기습의 충격이 생각보다 약한 것이 아쉽지만 마법사는 원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는 법.
하지만 희우의 타격이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곧이어 공간이 변화했을 때는 낭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넓었던 운동장만 한 공간의 층 하나가 훨씬 더 넓어져 있다.
마치 어떤 신적 존재가 강제로 잡아 늘인 듯 일그러진 채, 아득히 먼 곳에 잘 보이지도 않는 수준으로 거리를 벌린다.
순식간에 늘어난 공간의 거리만 따지자면 이미 이 층은 수십 ㎞의 광야급의 공간을 자랑하고 있다.
무작정 거리 벌리기.
그러나 우리의 사정거리가 짧음을 간파한 예리한 판단이다.
그 사실을 희우에게 전달한다.
[소년의 모습을 한쪽이 공간 계열 전문 마법사다. 단순 속도로는 못 따라잡아. 위로 빠진다.]
희우가 재빨리 내 곁으로 돌아온다. 마력의 소모를 감수하고 팔을 뻗었다. 희우가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대로 음속으로 움직이는 건 부담이 크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내 이동속도보다는 빠르다.
이렇게 무턱대고 거리를 벌려두면 나는 마법전을 전혀 수행할 수 없다. 거리를 좁혀야만 한다.
미아가 빨리 합류해야 한다. 시간에 대한 숙련도에 따라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미아일 터.
희우가 비행을 시작했다. 공간은 평면상으로만 늘어났기에 천장이 높지 않다.
아예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시간 속에 굳어 있는 무채색의 파티원들이 보인다.
공간왜곡은 한 층에만 작용하고 있다.
미아에게 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 * *
노인은 무사히 의식을 되찾았다.
무심하게 병을 기울이고 있는 소년이 말한다.
[대체 왜지?]
[알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를 노리고자 했다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일단 거리를 늘린 채 유지하도록 하지. 천사 암살자인가? 좁은 공간은 불리하지.]
[골치 아픈 일이군.]
천사는 마법사의 천적이다.
하필이면 전사를 위한 고위 종족인 저 천사는 마법사를 괴롭히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기천사라면 아주 빠른 주제에 마법 저항력은 너무나도 높다.
존재 자체가 마법사를 카운터 치고 있는 생물이다.
[가능하면 제압까지 해보지.]
[꼭 살려둘 필요는 없다. 내가 잡을 테니.]
캐스팅이 일어난다. 적이 위층으로 피난한 잠깐은 필요한 마법을 미리 메모라이즈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막대한 스탯과 패시브가 깃든 캐스팅은 거의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빛의 구슬이 각각 메모라이즈의 한계인 10개씩 뒤편에 떠올랐다.
[나는 그럼 오르골을 제압한다.]
소년이 공간의 틈새를 열고 사라졌다.
노인은 지팡이를 펼쳤다. 시간의 성물을 활용한 시간 정지는 적 둘에게는 거의 소용이 없는 듯하다.
어째서일까? 시간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하다.
마법적인 시간정지는 결국 시간신의 권능을 흉내 낸 것이 시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며 같은 결과를 낼 뿐인 다른 힘이다.
메모라이즈 하나를 지우고 대신 [시간 정지]를 캐스팅해 넣는다.
그리고 전류. 지팡이 끝에 손을 대고 옆으로 벌린다. 눈부시고도 새하얀 전류가 그 사이에 길게 늘어지며 번쩍인다.
번개 마법의 달인인 노인은 그대로 함정을 설치하며 천사를 기다렸다.
* * *
레바테인을 세우고 적을 맞이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은 아니다.
NPC 마법사와 달리 특정 계통의 마법을 패시브로 보정 받을 수 있는 유배자 마법사들은 단일 속성인 경우가 많다.
하나 상대의 레벨을 감안하면 듀얼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한다.
공간의 균열이 열리자마자 날아드는 공격은 쉬이 회피할 수 없다.
소년이 나타났다. 균열이 열리자마자 검을 내뻗었고 희우 역시 반응하여 찌른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구슬 하나가 마법으로 화했다.
번뜩임과 동시에 세상이 개변한다.
층을 이동할 때와 같은 부유감이 내 몸을 감싼다.
벽이 사라지고 바닥과 천장도 사라진다.
하지만 딛고 서 있을 무언가는 있다.
다시 중력이 돌아오고 발을 디딘다.
끝없는 모래만이 펼쳐진 사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삭막하며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저 모래가 사락거리며 흐르고 있을 뿐.
방금 전까지 있었던 대마탑의 내부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곳이다.
무심한 표정의 소년이 말했다.
"일대일이면 변수가 적지.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쓸모를 감안해 받아주지."
나는 문답무용의 찌르기.
동작은 전조 없이, 발아래에서부터 치닫는 추진은 신속하게.
순간적이나마 천사와 동등할 정도의 가속이지만 눈앞에 있던 상대가 똑같은 속도로 멀어진다.
"포기해라. 여긴 내가 만든 공간."
소년이 팔을 벌린다.
하늘이 뒤집혔다. 중력의 방향이 달라지고 디딜 대지가 하늘에 있다.
모래가 쏟아진다.
마법으로 몸을 띄우고 검을 든다. 모래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목소리가 끝까지 들려왔다.
"내가 만든 홀수층이지.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인드맵 자체가 사람 죽이기에 특화되어 있는 빌드군.
이건 대처할 줄 모르는 이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이 마법은 단 한 명을 자신의 아공간으로 함께 데려가며, 그 안에서는 그 어떤 공간의 신축도 자신의 뜻 대로다.
원할 때 공격하고 원하면 거리를 벌린다. 의지만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일방적으로 사용한다면 극도로 유리해진다.
다만, 그 방식에는 규칙이 있다. 자재로 구축한 마법이 아니라 스킬로서 사용하고 있을 테니.
"노력하셨군. [소우주]라, 공간계 PVP 마법 중에서는 제일 사기지."
"안다면 포기해라."
목소리의 방향으로 위치를 파악, 반향정위는 마력 탐지라는 형태로 자주 구사하기에 소리로도 할 수 있다.
하나 위치가 특정된다면…….
나는 허공에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 번 걷고 한 바퀴를 돈 다음에 레바테인을 찔렀다.
손끝에 감각이 있다.
그대로 올려 베고 돌진하며 크게 몸을 틀어 회전 베기.
피가 튀고, 레바테인의 냉기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붉은 얼음이 모래와 함께 바닥을 향해 쏟아진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다. 고위 마법사는 도통 방심을 하지 않아서 귀찮다.
상대의 통제가 흐트러져 뒤집혔던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모래가 다시 바닥을 흐르기 시작했다.
당황이 약간 드러나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동작을 취하여 공간을 좁힌다. 마법을 구성하는 원리를 꿰고 있다면 역이용도 할 수 있는 법.
피는 튀지 않았다.
상대는 거리를 더 벌렸다.
"네놈……. 어떻게?"
"[소우주]는 상대에게도 적용되는 줄은 몰랐나 보지? 미궁에 단점 없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킬 없이 자력으로 마법을 구사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군."
"이플릭셔스 같은 말을 하는 군……. 아주 불쾌해."
나직한 어린 목소리에 분노가 깃든다.
미아와 달리 귀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플릭셔스는 누구지?
레바테인을 털며 얼어붙은 피를 턴다.
바스락거리는 붉은 서리가 모래 위로 뿌려져 뒤섞였다.
곧바로 흐르는 모래 속으로 잠겨 들어 사라진다.
"일대일이면 변수가 적지. 넌 여기서 죽는다. 애송이."
보스전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군 그래.
* * *
희우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먼저 내려가서 상대해 줄 이유는 없다.
오빠가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어디론가 납치당했지만 그쪽은 걱정되지 않는다.
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미아는 시간의 틈으로 끼어들자마자 마력방벽을 만들어내었다.
상황을 모르니 일단 방어하는 것.
그리고 옆의 희우를 본다.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남았어. 잡아 족치면 이겨."
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법을 준비할까요?"
희우도 이제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안다.
대 마법사전인만큼 주축은 천사인 자신과 사수인 블랑쉐여야 한다.
약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의 속성을 모른다.
오빠는 주력을 두 개까지만 잡으라고 했다.
일단은 범용성이 높은 견제기로.
미아는 서브리더의 주문에 따라 마법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