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06화
메인 던전 - Lv.3796 파티 오르골(5)
로스엘은 다른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제대로 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지금 통제실에 있는 것이 자신뿐이다.
현재 이 지도를 조작하여 공략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로스엘은 몇 번의 시도를 더 한 끝에 그것을 확실했다.
어떤 조작도 추가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만이 이 지도를 조작하고, 파티원들을 필요한 곳에 배치할 수 있었다.
어딘가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마저 느끼며 지도를 들여다본다.
생각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많은 초심자들이 그렇듯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에 걸리는 시간이 몇 초 수준으로 단축될 뿐이다.
로스엘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러다가 충격을 느꼈다.
압력의 느낌은 먼 곳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발.
지금 로스엘이 위치한 곳도 지도에 표시되고 있다.
[아후라 마즈다]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며 여전히 바깥에 몬스터들도 존재하는 블록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광탄이 그녀도 노리고 쏟아질 테니 이미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 * *
가볍게 흔들리는 블록을 느끼며 충격의 근원을 찾는다.
이곳의 블록들은 모두 신성으로 강화되어있다.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블록 하나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통째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숲이 있었던 위치의 가운데가 내려앉아 있다.
뻥 뚫린 구멍이 보인다.
나무와 토사가 블록 내부의 공간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지하공동이 드러났다. 이 통제실의 카메라로는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원래 이 옛 도시유적은 복잡한 곳이다.
로스엘이 기억하기엔 지하수로가 아니어도 무수한 지하 시설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게 각각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원래도 알지 못했으며 공간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엮여버린 지금은 더욱 알지 못한다.
그런 것보다는 일어난 일이 궁금했다.
로스엘은 몇 가지 조작을 한 끝에 줌을 당겼다.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기능이다.
지도가 확대되며 폭발이 일어난 곳을 비춘다.
“혹시……?”
죽기라도 했을까?
어둠의 정령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대충 알고 있다.
로스엘도 많이 피해다녔으니까.
기계무덤에서는 주로 타천사와 어둠 사이를 헤매며 다녔다.
그 둘은 결국 같은 심연의 영향을 받은 존재면서도 서로 적대적이었다.
로스엘 개인으로선 전혀 이겨낼 수 없는 괴물들이다.
혹여 저쪽 수염쟁이들 중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살아남을 다른 파티원에게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할까?
“아니구나!”
솟구친 토사가 만든 먼지가 걷혔다.
로스엘은 수염쟁이와 가짜 천사가 무사함을 보았다.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둠의 정령은 정령왕일지라도 저런 물리적 폭발을 일으키진 못한다.
천사인 그녀가 영향받을 만큼 오싹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번져나갔겠지.
로스엘은 엔지니어나 마법사는 아니지만 전사다.
충격의 종류는 구분할 줄 안다. 이건 아는 공격의 결과다.
산달폰을 쪼개버린 일격.
저기 저 근육 수염쟁이가 한 짓이었다.
“강하구나.”
로스엘이 여전히 가속된 사고 속에서 몸을 떨었다.
유배자.
그래 원래 이런 이들이지.
더 이상 적을 피해 배치하기 위해 기를 쓰지 않았다.
리더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소모의 최소화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냥 부딪혀서 극복할 자신은 얼마건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빠르게!”
가야한다. [아후라 마즈다]의 곁으로 가야한다.
모든 파티원을 온존한 채, 다시 하나로 모일 수 있게 말이다.
그러면 그녀도 빠져나와 합류해도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열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유배자를 좋아했던 이유, 왕국이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
그것들이 여기에 있다.
함께 모험하고 싶어지는 동료들이다.
“로스엘이 해낼게.”
최단경로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맵의 기믹을 잘 모르지만 조작법 자체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적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훨씬 더 빨리 보스에 도달할 수 있다.
로스엘은 이제 걱정하지 않았다. 이겨낼 것이라고 믿으니까.
마법 구사자를 둘이나 보유한 희우의 그룹은 당연히 지금 나눠진 파티원들 중에서는 최강이다.
희우는 그렇게 판단하고 과감한 돌파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다만 블랑쉐가 몰래 속삭였다.
“너와 나만 진짜인가?”
“레바테인이 없는 걸 봤죠?”
“그래.”
희우는 잠깐 생각한 후에 말했다.
“말해볼까요?”
“무엇을?”
이미 뭔가 알던 것과 달라졌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오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틀어질 수도 있다고, 그 순간부터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면 된다 같은 식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복제의 제어권은 아후라마즈다에게 있다. 적을 늘리는 행동이 될 거 같은데.”
“지금 제어중이지 않잖아요.”
블랑쉐도 그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원래 [도가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나 작동하는 기믹이다.
보스전을 하러 다시 돌아왔을 경우에는 애초부터 도가니로 이동당하고 갇히는 루틴이 없다.
그럼 그냥 저기까지 걸어가서 1페이즈를 보낸 후 2페이즈에서 지금 같은 상황이 펼쳐질 뿐이다.
“일리는 있다만, 너무 도박이 아닌가? 전투가 시작되면 방법이 없다. 제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건 리더니까.”
“하지만 제니가 우리 옆에 있었잖아요.”
복제체들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져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제니가 근방에서 발견된 것은 그렇게 의도되기 때문이다.
제니가 더 강하다고 판단된 것이겠지.
“그렇다면 흠.”
“아마 오빠의 복제는 그리 강하진 않을 걸요?”
“그렇지만 2대2로 싸우는 건 큰 손해지.”
희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위험한 순간에나 도박을 걸어보죠.”
“지금은 쓸 수 있으니 쓰는 게 더 좋다.”
희우와 블랑쉐가 밀담처럼 대화하는 것은 크게 어색한 장면은 아니다.
본래도 친했고, 최근엔 블랑쉐가 언니인 척을 몹시 열심히 하는 참이었다.
처음에 알게 되기로는 오르골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동생이라 여겼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것과는 무관하게 친해질 여지는 많았다.
특별히 원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죽이는 재능을 타고나, 그것을 활용하기를 강요받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블랑쉐는 어느 정도 자의긴 했으나 돌이켜보면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야.”
의논은 빠르게 끝났다.
오르골A가 제니를 붙잡고 무언가 말하다가 돌아왔다.
“제니가 미아를 많이 걱정하는데. 광탄의 방향을 보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어. 가만, 누가 지금 맵을 제어중이지?”
“로스엘인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
원본 둘이 들어가서 제어 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말할 수는 없지.
“미아양은 무사할까요?”
희우는 조금 이상하게 웃었다.
걱정하는 제니의 표정은 어딜 보아도 진짜였으니까.
미아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딸을 그렇게 약하게 기르진 않았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제니.”
약간 의기소침해진 제니와 함께 모인다.
광탄이 다시 날아들고 있었다.
“저걸 처리하고 다시 이야기 해야겠군.”
기동력으로는 아쉬울 게 없는 조합이다.
각자 날개를 펼치고 자율 비행을 시작했다.
오르골A는 능수능란하게 광탄 사이를 회피했다.
블랑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약한 거 맞나?”
“어쩌면 진짜일지도?”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은 제니였다. 희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우리 전력이면 충분하겠죠?”
“강행돌파 말이죠?”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조합적으로 가장 완벽하다.
전사 둘이 빠지긴 했으나 어차피 핵심은 밸런스다.
최전방에서 딜탱을 수행할 수 있는 오르골A와 보조적 전사인 제니, 그리고 기동 암살자 역할을 할 희우가 있다.
블랑쉐는 어디에 끼더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유틸리티 덩어리기도 하다.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좋아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제니가 밝게 웃었다.
광탄을 한번 넘기고 다음 광탄이 하늘로 솟구치기 전까지 이야기가 끝났다.
여기서 말하는 강행돌파란, 로스엘이 이 블록을 옮기는 것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기천사가 둘이나 있다.
그 정도 속도를 낼 수 있다면 주변에 나는 괴조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
괴조형태의 거대한 기천사 하나가 금세 두 천사를 인식했다.
희우와 제니는 빠르게 날며 서로 어그로를 교대했다.
중간에 적절한 수준의 공격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식의 풀링은 자주 하는 것이다.
안전한 던전 공략을 위해 필수나 다름없는 능력이다.
끼에에에에에
두 기천사는 괴조의 크기에 비하면 한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자꾸 귀찮게 굴자 원래 날아다니던 영역을 벗어나 안쪽까지 빨려들어 왔다.
블록 위로 도달하자 그대로 건물과 부딪히며 미끄러진다.
신성으로 보호받을 구조물들이 부분적으로 으스러진다.
“힘이 정말 세네요. 이걸 조종할 수 있을까요?”
“해봐야지.”
일단 해본다. 마법적 술식이 오가며 오르골A가 괴조의 컨트롤을 시도했다.
블랑쉐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술식이 오고가며 괴조의 주변을 어루만졌다.
“안 되겠다. 도망쳐!”
잠깐 얌전해진 것 같았던 괴물이 날뛰기 시작한다.
“이 방법은 힘들겠군. 차라리 로켓을 만들어야겠는데.”
“그거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아서 더 불안하네요.”
오르골A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해봤는데. 결국 잘 모르겠으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게 최선이야. 대부분의 지역은 물리적으로 구분되어있는 거지 절대적인 장벽으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거든.”
“기천사보다 더 빨라야 하는 거잖아요?”
“이 경우는 기천사를 동력으로 하는 거지.”
“에엑?”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부분이 있다고 자주 생각하긴 했는데 어렵다.
“그게 아니라면 저 아래의 통제실로 가는 수도 있는데.”
가리킨 곳은 지금 상공에 떠올라있는 도시가 아니라, 그 아래의 잔해들이다.
“저기도 하나가 있어.”
“내려갈 수는 있고요?”
“다시 올라오는 게 문제지 내려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거든.”
“하지만 우리가 저기로 빠지는 건 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긴 하네요.”
“그건 맞아. 전력이 우리한테 너무 몰려있네.”
희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 바닥에 잠깐 던져두었던 쥐새끼를 집어 들었다.
이 금빛의 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오르골A가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만, 그거 성배의 짐승이잖아. 그렇지?”
“맞아요.”
“내 정신 좀 봐. 그걸 동력으로 쓰면 되겠군.”
“음?”
성배 그 자체인 쥐새끼.
그리고 성배는 본래 기계신의 일부였다.
정확히는 그 동력의 일부에 더 가깝다.
신좌라는 미궁적인 힘의 일부.
동력원으로서는 마력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언가다.
“지하수로에서 올라왔다고 했지?”
블록의 크기를 가늠하기 시작한다. 방향과 위치를 재어보더니 말했다.
“수로의 모양이 예쁠 것 같은데? 가서 확인해보자.”
갑자기 쥐새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은 아직 차리지 못했으나, 곧 닥쳐올 위험을 예감하는 것 같았다.
보다보니 귀여운데.
희우는 조금 미안해졌다.
가짜여도 오빠는 오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