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05화
왕국 - 빛을 죽일 준비(3)
사탄은 기근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애초에 그들은 사탄의 추종자들이다. 그래서 바알에게 몰락한 이후 어딘가에 도사린 존재들.
사탄은 그 이전에 지옥의 성채를 지배하던 대악마다.
“그러니까 사탄이 등장한다고 가정하면 기근도 어떤 식으로건 기믹이 될거야.”
“이로운 기믹일까요?”
“그럴 리가 없지.”
지금까지의 경과를 체크해보면 우리의 행보는 그대로 최종 보스러시의 난이도가 되었다.
메타트론과는 딱히 아무런 친분도 적대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강화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나헤마 쪽의 루트를 타며 라지엘이 같은 편일 수 있었기에 난이도가 하락했다고 볼 수 있다.
나헤마는 난이도가 엄청나게 상승할 수도 있었다.
딱 벨페고르를 잡은 것이 좋았다. 마법사에게 내구력까지 준다면 그건 너무 힘들어진다.
바알은 별다른 보정이 걸리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걸 배우는 녀석이어서 위험했다.
라파엘이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우리엘을 거기서 써야했을 것이고 우리엘은 바알을 상대로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 * *
우리엘은 무형과 대지의 천사.
대지의 천사임에도 무형인 것은 본래 세피라에 존재하지 않는 천사인 탓이다.
이런 부분을 따지다보면 간혹 드는 생각이 있다.
바깥의 신화가 먼저일까 미궁이 먼저일까?
어쩌면 미궁에서 모든 것이 먼저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일단 뒤로 밀어둔다.
우리엘은 순수하게 물리의 천사다. 바알에 대응한다고 할 수도 있으나 방어가 가능해질 뿐 바알을 쓰러트릴 화력은 없다.
상성에서라도 우위를 잡지 않으면 싸움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그럼 무조건 유배자가 불리해지는 법.
따라서 상성 우위를 잡는 라파엘은 아주 기적적으로 이득을 본 케이스다.
“그럼 아직 등장하지 않은건 아마 맨 위, 미카엘의 땅에 있을 클리포트.”
“그리고 기근과 사탄이 어떻게 끼어들지도 모른단 거군요.”
“가브리엘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애초에 없으면 라파엘의 협력을 사기도 힘들어질지도?”
그 부분은 미아가 부정했다.
“어쩐지 미카엘이라면 가브리엘을 억류 중일 수도 있다고 이미 믿고 있어요. 거기까지는 협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또 미아가 라파엘과 만든 친분 아닌 친분 덕이겠군.
미카엘과도 친분 비슷한 것이라면 있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지성의 천사가 아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배제 혹은 굴복 시키려 들겠지.
후자를 더 좋아할 것 같은 녀석이긴 하다.
그리고 그게 아주 어렵다는 것 역시 알 것이다. 그럼 죽이려고 들겠지. 후환은 제거.
그럼 이 타이밍에 이 녀석이 우리엘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관건이다.
유리가 아닌 희우가 자신의 우리엘을 덮어쓴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냉정할 수도 있지만 불쾌하겠지.
분노시킬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경우에 따라선 사탄의 난입도 생각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건 좋은 건가요?”
“나쁠 수도 있겠지. 우린 사탄과 정말로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렇다면 미카엘을 적대하게 될 것이다.
사실 미카엘의 난이도는 기이할 정도로 높은 부분이 있다.
다른 보스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난이도에 차등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럴 수 있지.
그러나 미카엘은 그저 처음부터 완성형에 가깝다.
바알과 함께 이 두 보스가 지니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바알 역시 방치하면 그 이상으로 강해졌으리라 여길 수 있다.
“미카엘도 비슷했을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바알 쪽의 강화 이벤트를 피해간 걸까요?”
“그런 것 같아. 미카엘은 대신 강화이벤트가 아니라 약화 이벤트가 있었는데 피해간 것 같고.”
진짜로 그런지는 모른다.
처음 하는 게임처럼 모르는 게 많으니 그렇다고 추측할 뿐이다.
지극히 게이머 적 사고의 일부다.
“생각해봐 사탄은 좀 데우스 엑스마키나적 설정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미카엘을 상대로도 바알을 상대로도 적대하는 보스다.
“마지막에 배치된 보스가 누구여도 싸움질을 할 녀석이군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와 미카엘만의 보스전이 아닐 확률이 높아.”
“그래서 더더욱 다른 파티원을 배제하는 거고요?”
“맞아. 패턴을 모르니 너무 위험해. 모르면 죽어야지를 당해도 살 수 있는 멤버만 싸워야지.”
그리고 그래서 셋으로 좁혀진다.
미아와 블랑쉐까지는 우리가 지키면서 견제 정도로 활용되겠으나 나머지는 힘들다.
“그래도 에길은 결국 큰 거 한 방을 위해 쓸 수 있겠죠?”
“여기서 부활 스택을 다 털어버려도 무방하니까 말이야.”
경험치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포인트만 있다면 다시 스택을 메꿀 방도도 있다.
정 안되면 반년정도 쉬면서 쿨다운을 돌리는 수도 있다.
이후의 침공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상태니 충분하다.
세계가 개 박살난 상황에서 무슨 침공이야.
“레미가 그걸 제일 기뻐하던걸요.”
“전쟁 준비만큼 기 빨리는 짓도 없지. 누가 좋아하겠어.”
“그래도 해야 하니 정말 힘들 것 같긴 해요.”
헨리는 신앙으로 붙잡아두며 레미를 돕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민심을 관리하는 것은 헨리니 레미보다 더 바쁠지도 모르겠다.
미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제가 가브리엘의 자리에 앉는 것은 어떨까요?”
“설득할 시간이 있을까?”
“라파엘과 잘 되도록 밀어주면 되지 않을까요?”
우습게도 라파엘이 우리에게 더 호의적일 것이다.
“악마인 채로 가브리엘이 되는건 썩 좋은 생각은 아니야.”
“종족을 바꾸면 되죠.”
“마침 대천사 카드가 하나 남아있긴 한데.”
어차피 종족 카드는 소모품이다. 고위 종족이고 나발이고 상성을 하나라도 더 끼워맞추는 편이 좋다.
마법사가 악마를 유지한다고 천사에게 극딜을 박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아는 카드를 가지고 제 방에 들어가더니 조금 멀미하는 얼굴로 다니 나왔다.
대천사는 날개가 여섯 장이다.
“어휴, 우리 미아는 천사여도 귀엽네!”
“체력적으로도 천사가 더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사 기반의 종족이니까 그런 보정도 생각해야겠지. 그래도 이번 공략 끝나고 운동해야 해.”
“네에…….”
신체 개조는 유배자의 기본 소양.
체질이 별로라면 그 체질조차 개선해야 한다.
마법적 소양을 함양하는 게 우선이다 보니 내가 소홀히 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미카엘을 공략할 가닥도 대강 잡혔으니 좀 쉬어도 되겠군.”
3일이 부족하지는 않았음이다.
몇 시간 정도는 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블랑쉐가 울상이 되어 들어왔다. 쿨한 무표정 같지만 미묘한 감정 변화를 다들 캐치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역시 누아르를 고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음, 뭐. 거의 격침된 수준이긴 하니까.”
“새 누아르를 받기로 했다.”
왕국과 서버 간이라면 시간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키 아이템이란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니까.
블랑쉐는 가능하면 ‘수리’라는 형태를 원했지만 결국 새로 만드는 가닥이 잡힌 모양이었다.
“조금 있다가 찾아와서 시험 사격을 해봐야겠군.”
장비를 갈고 닦는 것이 사수의 준비다. 혹시 모를 화력 필요를 대비하여 디스트로이어도 배불리 먹였다.
고양이는 살이 금방 찐다.
그리고 캣틀링건은 통통해지면 화력이 올라간다.
고양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제니도 돌아왔다.
시커먼 남정네와 에리나도 함께다.
“한판 붙어보자!”
바알이 저렇게 되면 말려도 어떻게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나가서 가볍게 털어주고 기절시킨 다음에 돌아오자 제니가 미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미아! 그녀는 신이야!”
“아빠, 제니가 고장 났어요.”
“기도를 하고 싶은 상태인가 봐. 그냥 받아둬.”
“음, 으음.”
미아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엄숙하게 날개를 펼쳐 여신 같아 보이도록 노력한다.
나는 껄껄 웃은 다음에 희우와 대련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여러 천재들의 의견을 모아 미카엘에게 대응하기 위한 검술체계를 재수립 한 후의 연습이다.
“여기선 좀 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땀을 좀 흘리고 돌아오자 희우가 말했다.
“같이 목욕?”
“그러지 뭐.”
커다란 욕조라면 얼마건 있다.
희우가 첨벙첨벙 개헤엄으로 물장구를 친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어떻게 미카엘을 공략할 것인가로만 흘러간다.
“단검으로 방어적 천사의 힘을 다루어야하니 골치 아프네요.”
“넌 사실 마법을 익혔어도 잘 했을 거니까 권능 정도는 다룰 줄 아는 게 좋지.”
“리치를 늘릴 수 있다는 건 좋아요.”
리치를 늘리는 스킬은 드물다. 우리엘은 그런 드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대지의 천사다보니 [파편의 무기]마냥 무기의 리치가 늘어나는 인챈트를 거는 수가 있다.
단검의 물리적 크기가 커지면 그냥 장검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희우도 요즘 마스터리만 받는 채로 장검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손이 작아서 단검이었는데 이젠 상관없어졌단 말이죠.”
“암습으로 꿀 많이 빨았잖아.”
“그래도 맨날 미끼인 것 같은데……. 뭐 메인은 블랑쉐 언니니까 상관없지만.”
“너도 MVP 노리고 있어?”
“엣? 아뇨? 그건 미아나 언니 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너무 노골적이면 또 안 기뻐할걸?”
“그러네. 경쟁하는 척이라도 해줘야하나.”
이번 공략에서 메인 딜러는 사실 아서가 될 것이다.
천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악마가 더 낫다.
희우와 나는 아서의 방패처럼 기능하면 된다.
미카엘의 대응이 어떨지 모르겠다. 그는 한 톨의 방심조차 없으니까.
“그래도 오빠가 왜 고정 NPC 위주로 모으려고 했는지는 알겠어요.”
“내가 막 그렇게 재능 넘치는 남자는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3일 만에 완전히 새로운 해법을 뚝딱 만들어낼 정도는 아니다.
“내게 부족한 점을 다른 이들로 채워야지. 천재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건 환영이야.”
“그래서 1층에서 나를 보고…….”
“정씨 집안은 언제나 스펙이 높은 설정이니까.”
말하면서 이제 NPC니 아니니 하는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목숨 걸고 함께 해주는 동료들이 많다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전 회차도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네.”
“지금 생각하니 궁금한 건 데, 메인 던전을 물량으로 공략한다는 게 가능한 소리에요?”
“제식 장비를 만들고 제식 스킬을 만들었지. 세팅 값을 균일하게 맞추고 부족한 화력은 인원수로 메꾸는 거야.”
“그럼 사상자는요?”
“사실상 유배자가 소모품인거지.”
“그래도 다들 협력 했어요……?”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으니 이렇게 된 거 아닐까.”
희우가 물속에 푹 잠기면서 입으로 뽀그르륵 거품을 만들었다.
“덕분에 절 만났으니까 완전 이득이네요? 라고 말한 건가.”
“아앗? 어떻게 알았지.”
독순술을 못할 리가 있나. 굴절되어 보인다고 못 읽을 것도 없다.
“거길 다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누구? 나?”
“네.”
한번 다시 생각해본다.
그동안은 저 테마가 걸리면 애초에 도전하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주 괜찮지는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오호, 확신을 하지 않는 것 보니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는 너는 괜찮아?”
“뭐가요?”
바알은 꽤 그로테스크 했다.
심연은 더할 것이다.
“음, 좀 일부러 눈을 돌려야 하긴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심연의 혐오체들도?”
“그건 좀 힘들지도……?”
“너도 확신을 안 하는 것보니 괜찮을 것 같네.”
희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맞아.”
“오빠도 첫날 그거…….”
“닥쳐 말하지 마. 리벤지 했잖아.”
희우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으음? 기억 안 나는데. 한 번 더 해봐야 알겠는데? 히히히.”
나는 피식 그 얼굴을 웃으면서 마주본다.
뚫어져라 계속 쳐다본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가를 가리며 웃던 희우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여유 있는 척하던 희우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끄러움도 많은 게 까불기는.
“그렇게 쳐다보는 건 비겁해요……!”
여유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법이다. 애송이.
그리고 몇 시간 남지 않은 여유도 모조리 소진되었다.
파티원들은 최종 점검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섰다.
“가자마자 미카엘이 기습해올테니 일단 라파엘을 멀리 옮겨야 합니다. 블랑쉐와 에길이 수고해주세요.”
“알겠네.”
“알았다.”
미카엘과 그냥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거점을 차례대로 확보해야 합니다. 세피로트와 클리포트도 파괴하려고 들지도 모르죠.”
사실 깨달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단순히 치고받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할 곳이 있고, 그것을 위해 지연시키며 전력을 차근차근 확보해가야하는 타입의 보스전이다.
당연하지만 모두 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제니 이번엔 믿고 있어.”
“노 노력해볼게요.”
바알이 드롭한 쌍검을 쥔 제니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래도 내가 지켜본 바대로라면 제니는 좀 떨고 있는 정도가 딱 좋다.
저게 제니에게는 최상의 컨디션인 셈이다.
“부활 스택 다 써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그래도 하나 밖에 안 남으면 전력으로 도망쳐야 한다. 제니.”
아서가 심각한 얼굴로 당부한다. 제니가 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입장하자마자 다른 파티원들이 여러 조건을 챙기는 동안 제니가 시간을 끄는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 단순히 스펙이 높은 스킬들을 탑재했다.
침공 방어전 때처럼 제니가 판을 만들어 줘야하는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