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5화
"네 봉급은?"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죄송합니다."
"그래서, 네 봉급은?"
"제...... 제가 받기로 된 금액의 3분의 1 정도만......."
그것을 받는 것으로도 죄송스럽다는 듯 그녀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착하다 못해 너무 순진한 바보였다.
그러니 다들 죽든 말든 무시하고 궁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도 홀로 남아 나를 지켜온 것일 터.
묘한 고마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 봉급으로 들어갈 금액은 전부 빼서 가져가."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랬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다?"
"......그렇습니다. 왕자 저하."
"적당히 불러. 딱딱하니까."
"그래도......."
"왕자라고 불리면 묘하게 정 없어 보이거든."
모든 계급은 그만의 책임이 존재한다.
지위가 가진다는 건 뛰어난 혈통을 자랑하고 민초를 억압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만큼 무거운 책무를 이수하고 있다는 일종의 훈장이니까.
하지만. 이딴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 국가라면 왕자라는 직위는 전혀 달갑지 않다.
멋대로 국정을 휘두르는 외척 세력. 귀족가.
아들은 관심도 없는 아비 하며, 제 아들을 왕의 자리에 올리기에 급급한 왕비.
평민들을 쥐어짜는 악덕 귀족들까지.
회랑에 있을 때의 힘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면 아마 당장에라도 이 라운이라는 이름의 국가를 지도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송하오나...... 데이비 저하. 명을 철회해 주옵소서. 저는 이 궁의 실정을 이 지경으로 만든......."
"네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놈들을 막아."
"그것이......."
"일을 시켰으면 돈은 줘야지. 그것까지 떼어먹고 내가 식사를 하면 그게 위장으로 들어가는지 기도로 들어가는지 알게 뭐야."
하! 소리를 내며 혀를 차고는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남은 예산에서 네 밀린 봉급 치를 모두 빼 가."
"......명...... 받잡겠사옵니다."
"그리고 식재료는 내가 해결할 테니 일단 내궁 예산부로 가자."
왕자가 궁정 예산을 확인하기 위해 예산부까지 들린다?
조상들이 보면 기가 막혀서 혀를 찰 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내일 먹을 식재료를 사는데에도 문제가 있다는데.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땔감을 구해야 하고 정말 심하다 싶은 곳은 보수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1 왕자궁은 그야말로 최악의 보릿고개를 겪고 있는 꼴이었다.
당장 내가 1~2년만 더 누워있었어도 돌이킬 수 없게 변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와중에 아들내미에게 얼굴 한번 안 내비치는 아버지라......."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자 에이미의 눈이 쟁반마냥 크게 뜨여졌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문제가 될 소지가 굉장히 다분한 단어였으니 말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는 왕비 측에 들어갔다면 내일 당장 근위 기사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성정이 가벼운 인간인 나는 호의를 잘 받고 잘 표하지만 적대적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 땐 내 꼴리는 대로 하는 속칭 막무가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내궁의 지리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변한 게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당장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왕자가 부축하는 인원도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웃긴 일이니 별수 없는 노릇이다.
* * *
"죄송하지만 저하. 이미 책정된 예산에서 추가로 가용하는 건......."
고개를 숙이며 거부 의사를 보이는 귀족의 목소리에 죄송스러움은 없었다.
오히려 귀찮게 뭐하러 찾아왔느냐는 티가 팍팍 드러났다.
힘없는 왕자.
그 여파로 생긴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는 언제 죄송했냐는 듯 꼿꼿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쥐 수염이 꽤 비열한 인상을 주는구나 새끼야.
피식 웃으며 근처의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아 그를 마주 본다.
왕자답지 않은 껄렁한 행동거지에 그가 약간 놀란 듯하지만 이내 은근한 경멸을 내보였다.
내가 아직도 정에 약한 탓에 유약하고 눈치 없는 왕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장난치냐?"
"예?"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벙쪘다.
"궁에 이번 달 들어오도록 책정된 예산은 500골드. 틀렸나?"
"그것이......."
"그런데 들어온 실제 금액은 100골드도 채 되지 않고......."
"저하! 그것은!...... 궁을 보수하고 유지하는데 들어간 금액을 제한 금액이옵니다! 다른 궁의 왕족분들께서도 국왕 폐하의 검소하게 살라는 명을 받아!......."
"하아, 짜증 나게 하네."
인상이 찌푸려지며 절로 쓴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보수했다는 궁이 잡초가 나고 바닥이 깨져있나?"
"그것이......."
"정원은 잡초투성이에 담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머저리가 봐도 한 푼도 투자 안 한 흉가가 따로 없는데."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내 말에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웃기지? 위신 높은 왕자가 궁에 책정된 예산 가지고 와서 이렇게 직접 따지는 모양새가 말이야."
내 말에 그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리 여겼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뒤에서 나를 부축해주던 시녀 에이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저...... 저하. 하오나 보수 관련은 예산과가 아니라 보수과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예산을 책정하는 것밖에......."
그의 말에 절로 무릎이 탁 쳐졌다.
"캬! 고건 몰랐네."
과장스레 리액션을 취한 내가 옆에 있는 지팡이를 쥐어 들었다.
그 모습에 그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진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망할 쥐 수염을 때려죽여도 되는 왕자의 신분이니까.
물론 그에 따른 일정 처벌은 받겠지만 다른 이들처럼 큰 벌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놈 한 놈 지금 때려죽이는 거야 쉽다만, 그래서야 뿌리는 깊게 숨어들 뿐이다.
"지구나 여기나. 그놈의 책임 전가는 쯧."
짧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주머니에 꿍쳐놓은 돈으로 밤에 홍등가나 들락날락하면서 물건이나 주물럭거리라지."
도저히 왕자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험한 표현 때문일까. 아니면 유약하고 착하기만 하던 과거의 나와 다르게 거침없는 언사에 당황한 것일까.
그가 우물쭈물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한번 보자고."
담담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책임 전가를 하는 놈들은 하나같이 빠져나갈 구석을 궁리해 두었다.
보수과에 찾아가 본들 책임 전가를 하면서 빠질 게 틀림없고 그걸 파고들어 봐야 얻을 건 피곤함뿐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1 왕자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죄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월급 도둑질을 하고 있다.
정작 일을 하고 있는 에이미는 실정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스스로 봉급을 줄여가며 궁을 꾸려가고 있지만.
얼굴도 내비치지 않은 놈들은 오히려 추가 인상 봉급으로 챙겨가고 있다는 모양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온 나는 겁을 집어먹은 채 조심스레 따라오는 에이미를 슬쩍 바라보았다.
"에이미."
"네...... 네?"
"창고에서 검 한 자루 가져올래?"
검이라는 말에 에이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 칼부림을 하려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이리라.
"걱정 마, 사람 벨 생각은 없으니까."
그녀의 귀여운 그런 행동거지에 저도 모르게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래, 사람을 벨 생각은 없다. 사람만도 못한 놈들을 베어버릴 뿐이지.
그 기준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 * *
당장 입지가 위태로운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용인들을 베어버리고 내궁에서 일하는 귀족들을 베어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답은 간단했다.
왕자가 미쳤다. 당장 외궁의 탑에 유폐시켜야 한다.
당장 뒷배를 봐주는 세력 하나 없는 나는 지금처럼 귀족이 대부분의 힘을 휘두르는 상태에서 썰리기 딱 좋은 위치에 놓인 물고기나 다름없다.
낡았지만 못 쓰는 검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저하...... 남은 검은 그게 전부인지라......."
어쩐지, 궁을 지키는 최소 근위병들도 무장상태가 엉망이더라니,
매번 말할 때마다 죄송하다고 하는 게 버릇이라도 된 건가 싶어 피식 웃어주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장인은 공구 탓을 하지 않아."
그리 말하며 말없이 검을 검집에서 반쯤 뽑았다.
원래 내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이다.
궁을 지키는 기사의 장비는 궁의 얼굴 중 하나.
그런 물건이 이딴 식으로 관리되고 물자도 부족한 부분에서 이미 아웃이렷다.
광채를 잃은 검은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까지 쌓여 있었다.
"관리 참......."
"죄송합니다아......."
정말 써먹기 더러운 검이다. 자존심 드센 장인들이 봤다면 입에 거품을 물었겠지.
하지만, 누가 그리 말했다.
뛰어난 장인은 공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에이미, 왕궁 내부 사냥터에 동물이 얼마나 풀려있냐?"
"예? 그...... 그것이......."
"뭐, 됐다. 대충 어느 정도 유지할 만큼은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 * *
다음날 에이미는 내 앞에 늘어져 있는 멧돼지의 사체를 보고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왔어."
"저하? 그, 그건......."
"누가 내궁에 가져다 놓았길래 가져왔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의로운 인간이 가져다 놓았나 보지."
"그게 무슨......."
거짓말이다.
직접 잡았다만 얼굴에 철판 깔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에이미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온 멧돼지의 사체를 보고는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 부르르 떨었다.
"창고에 가서 그릇 하고 방수시약을 뿌린 천 좀 더 가져와. 남은 물량이 있지?"
"데...... 데이비 저하! 차라리 소녀를 죽여주시어요!"
"아니 또 왜."
"저하께서 동물의 피를 손에 묻히실 순 없습니다! 게다가 내궁에서 사냥으로 잡은 동물을 해체하여 직접 요리하신다니요! 자칫하시면 크게 다치셔요!"
그녀의 절박한 외침에 내가 허허 웃어 보였다.
"보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왕을 알현하고자 해도 정무가 바쁘다며 거절한다.
자식새끼 아프다는데 얼굴 한번 안 내비치던 국왕을 만나고 싶다고 덜컥 만날 수나 있을까.
당연히 그쪽은 패스.
다른 부서에서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으니 패스.
왕비 리네스는 나를 피 말려 죽일 작정으로 진을 쳐둔 모양이지만 나는 헤라클래스에게서 수십 년간 생존 훈련을 받은 나름의 스페셜리스트다.
"멧돼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저녁이죠."
헛소리를 내뱉으며 능숙하게 뜨겁게 데운 온수와 검을 움직여 놈의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빼냈다.
막상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죽과 살점이 거짓말처럼 스윽스윽 잘려 나왔다.
마나를 불어넣은 칼날이니 안 그러면 더 이상한 법이다.
왕궁 내의 사냥터에서 길러지고 있는 멧돼지를 몰래 잡아와 내궁에서 직접 해체하고 요리하려는 왕자라니 웃기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