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23화
"아......."
놀란 듯 윈리가 제일 먼저 탄성을 흘렸다.
"아름답다."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녀석은 제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어머, 고마워요. 윈리 아가씨."
"아......아가씨?"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청초한 미인,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소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윈리가 나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설마!?"
기겁한 목소리에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로브를 입은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온, 눈에 번쩍 뜨이게 아름다운 여성, 아니 소녀.
화사할 정도로 윤기가 나는 밝은 청색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리아 헬리샤나와 뮤우였다.
끼익....... 탁.
"어머, 선객이 계셨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신경 쓰지 마."
내 말에 그녀가 곱게 웃어 보이며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주자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후다닥 달려왔다.
"아저씨!"
"어이구, 뮤우, 얼마 전과 다르게 아주 살집이 붙었네. 잘 지냈어?"
"아니야! 뮤우 살찌지 않았어! 노움이랑 막막! 티미랑 엘리랑도 엄청 재밌게 놀았는걸! 엄청! 어엄~청 뛰어다녔어!"
인상을 쓰며 나와 투닥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네 사람이었다.
이윽고 내게 안겨 버둥거리는 뮤우라 불린 작은 소녀의 후드가 흘러내리며 그들의 사고는 정지되어 버렸다.
"어?"
"콘대 장로를 포함한 보수파에 대한 처리 결과를 알려드리러 왔답니다. 게다가 오는 길이 꽤 소란스럽던 걸요?"
"네가 휴가를 받고 2주 가까이 탈주를 했으니 소란스러울 수밖에."
"쿡쿡."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는 네 사람을 보며 유리아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 분은 처음 뵙지만 나머지 세 분은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제가 만든 차가 그립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말에 눈을 부릅뜬 골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조금 바뀐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 듯했다.
실제로 하녀에 불과했던 유리아와 제법 친숙하게 지냈던 건 그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자......자네, 설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하이엘프. 대숲에 존재하는 달의 숲 수장이었던 유리아 헬리샤나라고 합니다. 은공, 듣자하니 드워프들의 광산 축제와 함께 연합 축제를 하신다고요."
"그랬지."
"저희 달의 숲 또한 참여하겠습니다. 마침 정령제의 기간이기도 하고, 마을에 남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그로를 제대로 끌겠다고?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저희 달의 숲 엘프들은 세계수의 맹약을 거부했어요. 당연 세계수가 정한 세상과 단절한다는 맹약도 의미가 없죠. 어차피 드러내야 할 존재라면...... 대놓고 당신의 비호를 받는다고 공표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생긋 웃는 그녀가 후드를 넘기자 모두에게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귀는, 좀 전 내게 안겨온 뮤우의 귀보다 더욱 길었고, 그 귀로 인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 * *
자연을 사랑하며 절대 파괴하지 않으려 하는 엘프.
그리고 불과 철을 사랑하는 드워프.
어떤 의미로는 이들만큼 견원지간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간에 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하! 뭐라 해도 이번 축제를 제안한 건 우리 드워프요. 뭐, 숲의 귀쟁이들도 제법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겠지만, 역시 노는 것 하면 우리 드워프를 따라올 수 없지! 풀이나 뜯고 사는 엘프들이 놀 줄 알기야 하겠는가?"
"어머, 기대되네요. 하지만,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면 몰려들기 마련인 걸요? 게다가 숲의 종족이라고 해서 다 고상함이나 떨며 꽃이나 만지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말아요. 저희야 난쟁이들처럼 화끈하진 않아도 나름대로의 심플하고 화려한 유흥 문화가 있답니다."
"호오, 그렇소?"
"그렇답니다. 엘프도 드워프도 결국 전부 유성생식을 하는 생명인데 이쪽만 점잖게 있을 줄 아셨나요?"
"기대해 보리다."
"저도 드워프들의 축제가 무척 기대되네요."
"껄껄껄껄!"
"쿡쿡."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싸울 듯한 기세.
"생각해보니 두 분 다 나이가 보통이 아니지."
"어머, 저처럼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한 엘프가 이렇게 연륜이 많고 식견이 높으신 분과 비교될 순 없죠."
"하하하하하!! 엘프야 뭐 노화가 없는 종족이라고 아주 예전부터 유명하지 않소! 실상은 주름이 자글자글할지도 모르지."
"시간에 장사 없답니다, 엘프라고 노화가 아예 없진 않답니다, 다만 저는 아직 젊은 터라....... 어머! 혹시...... 그 주름이라는 것이 신경 쓰이셨나요? "
골고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유리아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환하게 변했다.
"허허허허허!! 누가 뭐라 해도 역시 광산 축제만큼 화려하고 즐거운 게 없지. 두고 보시게. 이번 삼 종족 연합제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는 건 우리가 될 테니."
"어머~ 기대되네요, 저희 정령 축제 또한 타 종족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요."
이가 빠드득 갈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웃는 얼굴로 골고다 장로와 유리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벌써부터 종족 갈등을 일으키네. 이 양반들이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되시나.
"이보세요들. 지금 뭐하는 겁니까."
혀를 쯧쯧 차며 묻자 두 명의 엘프와 드워프는 서로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크흠! 으......은사 내 조금 과했던 듯하오."
"죄송해요, 은공. 제가 주제넘었네요."
마치 잘못한 아이들처럼 우물쭈물하는 그들을 말없이 노려보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이 왜 대륙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압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내 질문에 골고다 장로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더럽게 번식도 빠르면서 더럽게 치사하고 영악하기 때문이죠."
드워프처럼 화끈하고 정직하지도.
엘프처럼 고귀함에 목숨을 걸지도 않았다.
"그 축제, 인지도 싸움 말입니다."
"......."
"그거 우리가 이길 겁니다."
내 말에 유리아와 골고다의 표정에 얼이 빠졌다.
"그냥 하면 재미없죠? 어디 필사적으로 준비하게, 상품을 걸까요?"
그리 말하며 허공을 후려친 내가 그 안에서 특이하게 생긴 보석을 꺼내들었다.
"그......그건."
"모니카입니다. 끝내주죠?"
"세......세상에! 모니카라니!"
"아름......다워요."
모니카.
운석이 떨어지면서 대량의 마나를 흡수하여 아주 낮은 확률로 변한다는 보석이었다.
당연 효능은 없는 그저 미관상 예쁜 보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선 일전 내가 린디스 황실까지 가서 구해온 레드문 같은 보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애의 보물이기도 했다.
"이만한 사이즈면 가격도 굉장할 텐데."
워낙에 현실성 없는 보석이라 보석에 대해 논할 때엔 그저 환상 취급을 받는 물건이기도 했다.
내가 이것을 왜 가지고 있는가 하면,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 수련의 결과물들이다.
단순한 바윗덩어리에 초 고열과 압력을 일정하게 부여하고 거기에 마나를 심어 넣는 정교한 훈련을 받다보니 만들어지는 게 이것들이었다.
회랑에서야 보석이 넘치고 넘치다보니 사실상 그리 중요한 물건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내다 팔면 부르는 게 시세이긴 했지만, 내가 이것을 팔지 않았던 이유는 이제 돈이 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작 돈이 궁할 때엔 아공간이 열리지 않았으니, 내겐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크......크흡! 이......이만한 것을 건다면 드워프의 자존심상 물러날 수 없지! 우리는 마을의 12보검 중 한 자루인 센티넬을 걸겠소!"
그리 말하며 벌떡 일어나는 골고다 장로.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유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저희는 그럼 수백 년간 정령이 품어야 만들어진다는 엘프의 보물중 하나인 정령의 눈물을 걸겠어요. 판이 커지는 걸 원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저희 엘프도 찬성입니다. 아주 성대하게 키워보시죠."
"크흠! 땅도 넓으니 부지 걱정은 없겠군! 내 검은 바위 부족 놈들을 닦달해서 인력을 더욱 끌어 모아 보리다. 그놈들은 빚이 있으니 말이오, 껄껄껄!"
판이.
매우 바람직할 정도로 커졌다.
자존심 싸움이란, 때때로 무서운 법이다.
물론, 이 상황을 유도한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실뿐이었다.
어차피 이기든 지든 내겐 어느 쪽이든 이득이라는 사실.
-경쟁심을 부추겨서 아주 화려하게 판을 벌일 생각이군.
적당히 눈치 보면서 펼쳐지는 축제는 불가했다.
기왕이면 화끈하게, 아주 명물이 될 정도로 대축제가 되어줘야 했다.
관광 수입은 절대 무시할 것이 못 되니 말이다.
차후 이 영지에 관광을 올 이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먹으려면 역시, 첫 광고가 중요한 법.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을 들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순식간에 무자비한 가치를 지닌 세 물건이 튀어나와버리자, 윈리와 율리스는 그저 현실성 없는 이 상황에 헛웃음만 나오는 듯 보였다.
유리아와 골고다는 눈치를 못 챈 듯 보였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골다 장로나 윈리, 율리스의 경우엔 이미 내 의도를 눈치 챈 듯 보였다.
"세상에......."
"데이비 님의 스케일 키우는 방식은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이젠 놀라는 것도 지쳤다는 듯 체념하는 두 사람이었다.
이후 유리아가 개인 면담을 요청해오자 나중에 다시 놀러오겠다며 나머지 인원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중 드워프 마을의 수장인 골고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욕이 가득해 보였다.
지금부터 그녀와 할 이야기는 사실상 남들이 많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내용이었다.
"개인 면담이라...... 세계수인가?"
"네, 소식 들으셨을 거예요."
서부 왕국 쪽에서 엘프로 추정되는 이들이 목격되었다는 소문.
그건 인간이 아닌 엘프들이 퍼뜨린 소문일 것이다.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시겠다라......."
"생각 이상으로 대응이 빨라서 조금 당황했어요. 마침 마을의 소식을 들은 제 스승님이신 메디스 님이 그곳의 상황을 주시하고 제게 알려주시기로 하셨어요."
"믿을 수는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네, 다른 분은 몰라도 메디스 님 만큼은 유일하게 신목에서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세계수가 결정을 내린 이상 길어야 몇 달 안에 엘프의 존재가 모든 대륙에 드러날 거예요."
"너는 그저 선수를 친 것이고."
"네. 인간들에겐 처음이라는 타이틀이 제법 중요하다고 들었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
그녀의 미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그때였다.
고요하던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익숙하게 창문 안으로 쏙 들어온 것이다.
한참을 놀다 지쳐 잠든 홍단이와 청단이를 돌보고 있을 륀느가 들어온 것은 아닐 테니, 이제 남은 창문 침입범은 딱 하나뿐이었다.
"데이비! 내가 엄청난 소식을 가져왔어!"
이제는 제 집처럼 창문으로 드나드는 이 대책 없는 소녀가 바로 그 존재였다.
화려하면서도 눈부신 금발을 귀엽게 흘려 내린 스타일을 가진 소녀.
현 중부 대륙에 위치한 제국이자, 티오니스 대륙 최대 강국이라 불리는 팔란 제국의 금지옥엽.
바로 일리나 데 팔란이었다.
"방문은 정식으로 해라. 도둑도 아니고 창문을 타고 다니나."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다."
"몸은 괜찮냐?"
"아...... 그거, 후유증이 조금 남긴 했지만 이젠 괜찮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배시시 웃어 보인 그녀는 방의 한편에 말없이 차를 음미하고 있는 유리아를 발견하지 못한 듯 내게 말했다.
"데이비, 소식 들었어, 아주 난리를 쳤다고 하던데, 그동안 라운 왕국 돌아가는 꼴을 보고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렇게 됐어."
"으음...... 뭐, 이 부분은 네가 알아서 하는 일이겠지. 그보다 재밌는 소식을 가져왔는데 들어볼래?"
거절해도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재미있는 소식?"
"아바마마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 네가 들으면 흥미를 가질 것 같아서."
그리 말하며 창틀에서 내려선 그녀가 제 치마를 툭툭 털어냈다.
도저히 황족이라 볼 수 없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대륙 서부에서 엘프로 추정되는 이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어?"
"들었지."
요즘 호사가들 사이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건데, 대륙의 서부에서 엘프로 추정되는 이들을 목격했다는 소문. 아무래도 진짜인가 봐."
"그래?"
"그래? 라니! 놀랍지도 않아? 무려 엘프야! 엘프! 동화에나 나오는 요정님들! 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결한 종족!"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디라스의 말로는 엘프는 실존한다고 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냥 믿기도 힘들었던걸."
"그게 그렇게 신기해?"
내 질문에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소리쳤다.
"당연하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말없이 주먹을 쥔 채 엄지손가락만 펼쳐 한 쪽을 가리키고는 까딱거렸다.
그곳에는 차를 음미하며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고 있는 유리아가 있었다.
"넌 하인스 영지에 다양한 종족이 차별 없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잖아. 이만한 고급 정보를 건네줬는데 뭔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거 아냐? 중검에 안배된 새로운 검술이라거나......."
쉬지 않고 떠들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내 엄지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는 유리아를 발견, 말을 하다 멈추고 굳어버렸다.
"고급 정보, 다 필요 없어졌네?"
놀리듯 중얼거렸지만 애석하게도 내 말은 일리나의 귓가에 닿지 못한 듯 보였다.
"너 마침 잘 걸렸다."
"데......데이비?!"
너도 연합제의 판을 키우는 제물이나 되어라.
필요한 상황에서 팔아먹을 수 있으면 나는 무엇이든 팔아먹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