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2화
각기 작게는 20미터에서 크게는 4~50미터까지.
하늘을 새카맣게 메울 듯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비룡들의 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던 흙의 거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황색의 안광을 번뜩이며 한발을 강하게 내딛고 굴렀다.
쿠웅!!!!
동시에 어마어마한 지진이 일어나며 일대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한다.
정령왕.
자연의 근원이며, 힘이 닿는 한에선 자신의 속성에 엄청난 지배력을 가진다.
노아스는 대지의 정령이자 태고의 대지 그 자체인 만큼 노아스의 영역이 닿지 않는 땅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리라.
검선급의 강자라도 함부로 이길 수 없는 존재.
본신의 힘이라면 단연 그 상위의 그랜드 마스터급에 달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실상 정령왕이 중간계에서 발현할 수 있는 힘은 한계가 명확하다.
물론, 그 한계가 명확할 뿐 기본적인 스펙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쭉쭉 빨아가는구나."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많은 양의 정령력이 소멸한다.
기본적으로 저장하고 있던 정령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자 현기증이 핑 도는 느낌까지 들었다.
노아스가 내뿜는 힘은 대부분 내 안에 저장된 정령에너지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당연 놈이 날뛸수록 소모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리라.
거대한 포효를 흘리는 대형 프로스트 웜 와이번 하나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노아스의 거체를 긁어 내린다.
동시에 천천히 움직이던 노아스의 양팔이 놈의 날개를 낚아챘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무력하게 잡혀본 경험은 생전에도 없었을 것이다.
괴성을 흘리며 발버둥 치던 녀석은 이내 노아스의 머리를 노리고 그대로 냉기의 브레스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끝내. 정령마나가 무한한 줄 아나."
[웃기지도 않는군!]
내 투덜거림에 노아스의 황색 안광이 번뜩였다.
콰드득!!
동시에 그의 등에서 튀어나온 또 하나의 팔이 프로스트 웜 와이번의 주둥이를 틀어잡아 막아버렸고 날개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 놈의 날개를 꺾어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크기가 40미터가 넘는 거대한 언데드가 크게 반응도 못 하고 쓰러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크흐으....... 데스 스웜프!!"
그때였다.
발밑의 단단하던 대지가 일순간 새카만 타르처럼 역변하며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7위계 성마법]
[정화.]
7서클에 달하는 사령마법인 죽음의 늪은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고 노화시킨다.
반사적으로 정화마법을 방출해 나를 집어삼키려던 새카만 늪을 정화시켜버렸지만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주 한순간이지만 신고 있던 금속을 덧댄 신발이 녹아내린 꼴에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맨발로 싸우라는 건지."
불평을 하려 해도 사실상 내가 방심한 탓이니 누군가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청단이와 홍단이를 거칠게 몸에서 빼내 던져버리고는 나를 노려보는 놈이 보였다.
"이번엔 안 죽었네?"
청단이가 가진 불사 파괴의 권능이라면 놈에게 완전히 상극인 만큼 일격에 죽어주리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놈을 너무 쉽게 본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는 않을 거다! 네놈이 숨겨둔 수가 설마 정령왕일 줄 몰랐다만. 저만한 적을 상대로 날뛰면 정령왕을 그 이상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놈의 외침대로 확실히 현재 내 상태로는 노아스 단 하나만을 운용하는데에도 굉장한 힘의 소모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해온 게지.
천천히 회복을 노려야 되는데 그동안 벌어진 일 때문에 과하게 힘을 사용해온 경향이 없잖아 있다.
힘을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마나 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 몸이 버텨주는 데엔 한계 또한 있었다.
"확실히......."
미묘하게 무거워진 몸을 살짝 움직여보며 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리고는 검은 기류를 피워 올리며 스테프를 들어 올리는 놈을 향해 말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스륵.
카앙!!
"전부 준비했는데. 어디, 벌써부터 질리면 쓰나."
"미친놈이로구나! 어디서 허세를!!"
"믿기 힘들지? 솔직히 나도 조금 어처구니없다."
콰앙!!
반격을 가하듯 그의 몸에서 새카만 광탄이 총알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음속을 가볍게 돌파하는 검은 광탄은 단순한 금속제 총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고 후폭풍도 강렬했다.
-3서클 데스불릿을 강화한 건가? 위력만 따지면 6서클정도 까지 끌어올린 모양인데....... 그 수가 보통이 아니군.
초당 수십 말에 달하는 포화력이 내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주변 기물을 박차며 공격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지속되는 포격은 점차 주변을 검게 물들여갔고 닥치는 대로 노화시키고 부패시켜나갔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치이이익!!
"어이구야."
-데이비?!
순간적으로 소매를 스친 검은 탄환 때문일까.
팔을 덮고 있던 옷 일부가 새카맣게 부식되어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하얗던 팔에 새카만 상처가 남았다.
-어서 정화를!
"됐어."
치이이익!!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성력이 멋대로 움직이며 몸을 잠식하던 사기를 불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통증도 상당히 밀려왔지만.
아픈 것으로 따지면 훈련 당시 이것보다 더 지독한 것은 얼마든지 겪었다.
"페럴라이즈"
"컨퓨즈!"
"블라인드!"
이윽고 사령마나를 주로 다루는 이들의 전매특허인 저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둔화시킨 뒤 공격마법으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시야가 흐려지자 당연 흑색의 탄환을 제대로 피할 수가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
놈은 강하다.
단순히 힘의 척도만 놓고 보자면 샨드라미네아나 라운왕국 반란 당시 만났던 뱀파이어, 페이스와 같은 초월체급에 속했다.
내가 지금껏, 만난 초월체급 적은 단둘.
하지만, 순간적으로 도핑해서 갑작스레 강해진 페이스나 이지를 상실한 샨드라 미네아의 분신체와는 다르게 놈은 온전히 제힘으로 8서클까지 올라간 진짜배기였다.
실제로 단순히 힘을 모조리 가지고 억눌러 숨겨두고는 그걸 숨겨둔 한 수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 멍청한 모기와는 다르게 눈앞의 이 리치는 수십 가지의 숨겨둔 수를 자유분방하게 운용한다.
같은 힘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질 테니까.
신성력을 제외하고 내가 회복한 마나의 경지는 8서클.
놈의 경지 또한 8서클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감성적이네."
퍼억!!!
아직까지는 허용범위의 내에서 움직이는 적이었다.
"적어도 나를 위협하려면 세계수의 본체 정도는 끌고 왔어야지."
"웃기는 소리! 세계를 받치는 거목은 생명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일 터!"
애초에 마스터가 되기 전부터 마스터급을 썰고 다녔는데, 단순히 동급의 경지라고 해서 밀릴 정도였으면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으리라.
"커헉?!"
분명 마법에 당해 온몸을 포화 당하고 부식되어야 정상이건만.
내가 너무 멀쩡하게 그 세례를 피해내고 놈의 상체 위로 뛰어들자 더욱 놀란 듯 보였다.
"이래도 버티는지 보자."
놈의 그런 의문을 해소해줄 의리는 없었다.
한 손을 허공에 뻗기가 무섭게 홍단이와 청단이를 불러들인 나는 반격을 위해 휘둘러지는 거대한 지팡이를 홍단이로 베어내 버렸다.
"뭣이?!"
제법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청단이가 비 물리 법칙을 베어낸다면 홍단이는 반대를 베어낸다.
큰 저항 없이 두 동강 나버린 놈의 몸에 다시 한 번 홍단이를 꽂아넣은 뒤 청단이로 놈의 두개골을 반으로 가를 듯 찔러 넣었다.
"크아아아아악!!!"
지독한 고통에 휘감긴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기괴한 칼이?!"
또 한 번 청단이를 향해 막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놈이었다.
[우아아앙!]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청단이의 의지 때문에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누구보고 기괴하다고? 이게 미쳤나."
콰드득!!
검신을 회전시켜 헤집어놓듯 놈의 두개골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내 꼭지가 돌아버린 만큼 네 머리통에 검을 찔러 돌려주리라.
분명 청단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온 만큼 놈은 이번에도 쉽게 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놈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챌 만큼 어설프게 위장된 것도 아니었다.
초가삼간에 숨어든 벌레를 찾기 힘들다면.......
"모조리 태워버리는 수밖에."
투웅! 휘리릭!
청단이와 홍단이로 몸을 다시 고정한 뒤 십자가 형태의 신창 롱기누스를 역으로 쥐고 놈의 몸에 꽂아넣었다.
"커흑?! 이건 또 무슨......."
"선물 하나 간다."
[8위계 성마법]
[성화포(聖火砲) 개(改)]
콰아앙!!!
순백의 포격이 십자가의 끝을 타고 놈의 거체를 한차례 뒤흔들어놓았다.
기왕 다 쏟아낼 생각이라면 아끼지 않으리라.
우우웅!!
제 몸에 박힌 십자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신성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하자 놈이 안광을 번뜩이며 내게 손을 뻗어왔다.
앙상한 뼈만 남은 손을 펼쳐 든 놈이 다급히 소리친다.
"데스 브레스!!"
콰아앙!!
찰나의 순간에 이어진 반격이다.
절대 질 수 없다는 듯 순식간에 가지고 있던 마나의 대부분을 쏟아부어 반격을 가한 놈 때문에 마무리를 지으려던 내 몸이 일순간 튕겨 나가 십여 미터 가까이 밀려났다.
"크흐......윽......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놈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그 강함의 경지에 비해 출력량이 달리는구나."
순식간에 내 몸에 있는 이질적인 점을 눈치챈 듯 그가 중얼거렸다.
"결국, 거기까지다. 네놈은 이제 날 죽이지 못해."
그의 말에 낮게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킨 내가 손을 펼쳤다.
"짠, 이게 뭘까?"
그 손위엔.
새카만 빛을 내뿜는 빛으로 된 구체가 쥐어져 있었다.
청단이의 권능은 어지간한 방어마법으론 견딜 수 없으니.
차라리 청단이의 권능을 지속적으로 다른 곳에 향하게 만들어주는 놈이 숨겨둔 매개체였다.
제법 머리는 잘 쓴 듯 보인다만. 이쪽이 사령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놈의 실수였다.
"그건?!"
"사령마법, 너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으려 들어."
"빌어먹을 놈!!"
콰드득!!
반사적으로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던 흑색의 광구는 내 손아귀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동시에 몸을 보호하던 모종의 요소를 잃어버린 놈은 지속적으로 몸을 파괴하는 청단이의 권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바스러지기 시작하는 속도가 처음보다 훨씬 빨랐다.
"이제 여섯 번 남았네."
내 경고에 그의 안광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성흔을 가진 성자가....... 어떻게 사령마법을......또 어떻게 정령마법을 쓴다는 것이냐!"
정령마법은 그래도 상당히 자비로운 편이라 검을 쓰는 자도 배울 수 있고 마법을 쓰는 자도 배울 수는 있다만.
놈의 시선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진 신성력과 사령마나의 공존이었다.
여기에 원소마나 까지 쓰면 아주 좋아죽겠네.
속으로 그런 생각을 씹어 삼킨 채 손바닥으로 놈의 두개골을 으깨버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짧게 숨을 골랐다.
-전쟁이고 나발이고 이 일이 끝나면 그대는 몇 달은 죽은 듯 쉬어. 말을 듣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하게 만들겠어.
강자와의 싸움 끝에 발견된 부작용을 그냥 넘길 수 없는지 페르세르크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페르세르크."
"......"
"적이 내 사정 봐가면서 공격하는 거 봤냐?"
힘없는 내 질문에 그녀가 침묵했다.
"내가 무너지면 하인스 영지는 다 죽어. 인간은 죽을 거고, 엘프 쪽은 다 끌려가거나 죽겠지."
-데이비!
"나는 세상을 구할 거창한 명분은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대신 자존심이 더럽게 쎄다.
털릴 각오는 해야 한다는 걸 보여줘야지."
단순히 세계수와의 싸움이 아니라. 숨어서 혼란을 기다리고 있을 놈들에게 향하는 경고와도 같다.
뭘 하건 관심 없는데 나를 건드리지 마라.
놈의 패배와 동시에 남은 서너 마리의 프로스트 웜 와이번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와 고통을 모르는 놈들이 도망을 친다는 것은 아마 한차례 또 목숨을 잃어버린 놈이 위험을 감지하고 힘을 아끼기 위해 후퇴시켰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음은 어찌 찾으려고? 이제 놈은 그대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 들게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당했으니 놈도 알 것이다.
단순 무력 싸움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놈의 행보를 본다면 무언가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것은 분명 알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시간을 끌면 저쪽이 유리해진다는 소리일 테니.
현명한 놈이라면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을 터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가야지."
미묘하게 거칠어진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나는 끝까지 숨기고 있던 원소 마나를 천천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워프 마법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꼭꼭 숨어라."
츠츠츠츳!!
"머리카락 보일라."
파앙!!
순간 배경이 일변하며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독지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게서 상당히 거리를 벌려 다시 육체를 재구성하기엔 뼈가 많은 이런 장소만큼 좋은 곳도 없으리라.
"고......공간 전이 마법?! 어떻게 여길?!"
"마법은 몰랐지? 새끼야!"
설마 부활 직후에 내가 쫓아올 줄은 몰랐는지 그의 경악 섞인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미 놈이 반응하기엔 늦었다.
서걱!!
또 한 번 놈의 머리통을 베어버린 내가 부활하여 재구성된 지 얼마 안 된 놈의 두개골을 짓밟고 씨익 웃었다.
"다섯 번이나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