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0권 21화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분명 풀을 밟는 소리도,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인간 특유의 체향이나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달콤한 혈향도 맡지 못했다.
게다가 이 일대는 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차단하는 결계를 펼쳐두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무리 결계를 베는 검이라도 이렇게 흔적도 없이 찾아온다?
불가능하진 않다.
결계가 찢어짐과 동시에 제대로 그 여파를 느끼기도 전에 습격을 당했다면 말이다.
몬스터가 곡할 노릇이라는 게 이러한 상황에 쓰이는 말이라고 여길 만큼 너무 은밀하고 자연스러우며, 치명적인 암습이었다.
겔루스는 상위급 뱀파이어로 기본적인 불사의 힘에 자신들이 모시던 분에게서 더욱 강력한 불사의 힘을 받아낸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힘의 근원인 심장을 강탈당한 이상 힘의 상당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쿠당탕!
태후의 복부를 관통했던 날카로운 그의 손이 힘을 잃고 그대로 빠져나왔다.
동시에 그의 심장을 파고든 괴물 같은 인간의 손 또한 빠져나왔다.
새빨간 피가 머금어진 심장은 육신에서 떨어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펄떡펄떡 뛰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콰앙!!
그리고, 멍하게 서 있던 그는 곧 날아드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그대로 허공을 날았고, 거대한 나무를 부숴버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커헉! 쿨럭! 쿨럭!"
심장을 적출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에 놀라야 할 것인가.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의 시간만 허락되었다면 방해하는 태후를 치우고 천자의 몸에 있는 힘을 머금은 심장을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심장이 될 그것은 자신들의 목적인 마왕 부활의 핵심 근원이 될 것이기에 그는 자신의 임무에 굉장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놈의 속도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전 절대 상대를 얕보지 말라던 반쪽짜리 천것이 하던 말을 무시한 결과일까.
분명 계산상으론 완벽......
"다른 생각할 만큼 여유가 넘치나 보네."
툭......
손에 쥐고 있던 피가 잔뜩 묻은 심장을 던져버린 소년의 목소리가 닿은 건 한순간이었다.
"컥?!"
순식간에 시야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그는 곧 자신을 다시 한 번 걷어차 날려 버리는 소년의 섬뜩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좀 전 가슴을 꿰뚫을 때의 힘보다 훨씬 약해져 있다.
그가 약해져서? 아니, 저 미소만 보면 분명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상대로 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쓰레기 같은 인간 놈!"
"집 좋더라."
"......"
"덕분에 보물도 잘 챙겼고."
"네......네놈?! 설마!"
"내 힘이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고 가져간 거 아니잖아. 그렇지?"
"......주군께서 하사하신 은신처를......"
"주군은 얼어 죽을."
그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피를 울컥울컥 토하면서도 그는 격분하며 외쳐댔다.
"네놈의 힘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네놈의 힘이라 한들 그것을 네놈이 추적할 순 없을 터!"
상식적으로 몸에서 빠져나간 힘에 추적기능이 달릴 리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주술은 돼. 애초에 이 세상에서 도력은 내 것밖에 없거든."
그리고 그 도술은 일반적인 마나와 다르게 가공된 힘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무슨......"
"다만, 나를 이용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려 했다는 게 기분이 더럽네, 개 짓도 적당히 했어야지."
개소리!
그의 말을 들어보면 결국 시작은 자신들이 했으나 중간부터는 모두 그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는 소리다.
브로치에 그의 힘을 담아 훔친 것부터, 수호신을 제압하고 그 힘을 강탈한 것.
그리고 기습을 통해 그의 힘을 흡수하여 결정으로 만든 것까지.
그는 꽁꽁 숨겨져 있던 자신들의 은신처를 털어먹었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위 뱀파이어가 자리를 비운 이 시점에서 그곳에 남은 건 전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할 정도로 저급한 동족들이 전부.
그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인간이 자신들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더욱 격노했다.
자신들이 이런 사태를 만들 걸 알면서도 방치한 놈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그의 눈에 혈광이 어렸다.
반드시 저놈은 죽이리라.
아니, 죽이지 못할 괴물이라도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남기리라!
심장이 빠져나간 육체의 구멍이 서서히 메워지며 그의 전신에서 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회하게 해주마. 나는 우리 동족 사이에서도 특출난 혈마법을 익히고 있으니 이번만큼은 네놈이 대비할 수 없을 거다."
"기꺼이."
-으그으으으으!!
동시에 놈의 전신이 새빨간 화염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 같은 화염은 본래 기본적으로 붉지만, 그의 화염은 마치 진짜 피처럼 짙은 선홍색이었다.
동시에 그의 육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변하기도 전에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던 증오스런 인간 놈이 순식간에 접근하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분명 이전에 만났던 페이스라는 놈에게도 말했던 것 같은데."
투쾅!!
그대로 머리를 낚아채 두꺼운 나무에 처박아버린 소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왜 적을 눈앞에 두고 변신하는 거야. 도대체."
적이 강하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말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어야지.
허세만 가득한 새끼.
이 사악한 악마 같은 놈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들려왔다.
퍼억!!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새파란 빛이 일렁이며, 그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 * *
완전히 침묵한 놈의 육신을 보던 나는 말없이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과도한 도력의 사용으로 상당한 무리가 왔는지 전신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데이비, 죽이지 않는 게야?
뱀파이어는 발견하는 족족 죽였으면서 왜 살려뒀는지 의아했는지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물어왔다.
"죽이면 안 되지, 얼마나 중요한 놈인데."
내 대답에 그녀가 눈을 반짝인다.
-흐음, 아무리 적이라도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겐가? 본녀는 그런 변화가 마냥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픽 웃으며 걸음을 옮긴 뒤 놈의 몸에서 빠져나온 새빨간 심장을 밟아 터뜨렸다.
퍼석!!
동시에 놈의 힘이 담겨있던 그릇이 박살 나며 새빨간 기류의 힘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놈의 힘 대부분은 소실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타냐도 시험은 쳐야 할 거 아니야."
이 난리가 났지만.
시험을 치르게 해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무조건 치르게 해줘야지.
다른 이도 아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동생의 첫 부탁이었는데.
본래라면 이 숲의 수호신인 괴석거인의 시험을 치러야 하겠지만.
녀석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이쪽에서 준비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
당장 경지와 쌓아온 것이 다른 이들에게 적절한 시험을 내리는 건 사실상 이런 짧은 시간 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가지 진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실전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주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발전한다는 걸 말이다.
될 때까지 극한 상황에 몰아넣으면 되는 거다.
-발전하지 못하면?
"시험에서 무조건 통과만 있는 건 아니야. 페르세르크."
그 점은 아무리 소중한 동생인 타냐라도 타협할 수 없다.
"아마, 별문제는 없을 거다."
타냐 또한 바리스와 다르게 몸 내부에서 무슨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피부가 뒤틀린 뱀파이어 겔루스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긴 나는 이제 놈에게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태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끄윽......끅......"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독기가 가득한 얼굴로 죽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비록 말 한마디 못할 만큼 목이 막혀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어와 내 다리를 잡았다.
살려달라고 빌고 싶은가?
애석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더 깔끔한 죽음일 테니 말이다.
"끄륵......끅......신......"
"신?"
"신하......신하를."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는 그녀의 눈에서 급기야 피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에게 가까이 가자 그녀는 죽어가던 힘을 모두 쥐어짜 낸 것처럼 내게 애원했다.
"나......나를 끅......끄윽......죽이세요. 그......신하......끄윽......"
"당신은 죽여도 좋으니, 신하만은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내가 차가운 웃음을 보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이 저지른 일이 눈에 안 보이나?"
반파된 숲을 가리키며 묻자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는 채로 내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모든 게 실패한 이상 어차피 저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힘겹게 말하는 그녀의 말뜻은 충분히 전해져 왔다.
병을 치료하려 했는데, 치료해주겠다 말한 모기놈들이 사기를 쳤으니 그녀는 현재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병이 제대로 나은 것도 아닐진대, 기묘한 무언가로 인해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는 반 시체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침묵해버린 것이다.
그대로 굳어버린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자니 페르세르크가 씁쓸한 듯 중얼거렸다.
-모성애란 정말 놀라워.......
"부러워?"
-비록 죽어 혼령의 상태가 되었다곤 해도...... 본녀의 꿈은 엄연히 소박한 어머니였어.
사령안을 활성화 시키자 시신이 된 그녀의 육신에서 서서히 혼령이 빠져나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
-데이비.
"뭐 해줄래."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 한가지로 협상을 보지.
"그렇게까지 할 게 있나? 네가 그럴 이유는 없을 텐데."
-그래, 이런 사태가 와서 그대가 이득을 본 건 사실이지만, 옳은 일은 아니니까. 이 여인은 이 자리에서 죽는 게 차라리 이득일 수도 있겠지. 허나......
"천자는 다르다고?"
내 질문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천자를 간섭하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이 여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사라진다면 천자에게 남은 미래야 뻔하다.
"애초에 넌 나와의 내기에 한 번 졌잖아. 잊었냐?"
-......아, 그냥 좀 해주게! 그동안 본녀가 그대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런 거 하나 못 할까.
확실히. 내가 무슨 계획을 세우면 거기에 의견을 주고 계획을 조율해준 것은 엄연히 그녀였다.
그녀가 변덕을 부리겠다면.
"......병자는 죽이더라도, 일단 치료하고 죽인다......"
-무슨 말이야.
"그냥 지키지도 못할 머저리 같은 약속이야. 비켜봐. 괜히 휘말릴라."
태어나서 자신의 성별을 속이고 살아온 아이의 육신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음기가 많아야 할 몸에 과도할 정도로 양기가 담겨있는 육신이 탈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음기를 외부에서 주입한 양기가 짓눌러 서로 뒤틀리고 있었다.
가만, 이런 육체에 태극 음양신공을 가르치면 어마어마한 괴물이 튀어나올 텐데......
소녀나 소년이라 보기도 애매할 정도로 무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직 2차 성징도 오지 않은 작은 소녀에게 남성을 강요하고 남성으로 살게 하려고 양기를 대량으로 흡입시킨 결과는, 결국 아이의 생명을 극단적으로 깎아 먹었다.
우웅......
동시에 내 전신으로 반절 백색의 기운인 신성력이.
그리고 나머지 반절로 사령마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흑과 백을 다루는 음양신공은 내가 자세하게 배운 게 아니지만. 신성력과 사령마나를 이용해 대체로 비슷한 효능을 만들어내 볼 수 있으리라.
투웅!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눈을 감은 채 신음하고 있는 아이의 몸 위로 문양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빛으로 만들어진 곡옥이 빛나며 두 가지 힘이 조화를 이루듯 스며들기 시작했다.
"내가 괴물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네."
-설마.
"모를 일이지."
그리 말한 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조화를 이루던 힘을 모조리 천자의 뒤틀린 심장에 쑤셔 박으며 말했다.
"눈 떠라, 네 상황에 잠이 오냐?"
쿠웅!!
심폐소생술. 마나로 이루어진 제세동기가 천자의 심장을 강하게 한 번 격타한다.
정확히는 서서히 멎어가는 심장에 충격을 가하며 음양을 이루는 두 힘을 쑤셔 박아 괴석거인의 힘의 폭주를 억눌러버린 것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대번에 죽어버릴 만큼 위험한 시술 방식이지만.
내가 죽이고 살려온 환자의 수가 수십 수백만이다.
효과는 빠르게 드러났다.
눈을 감고 있던 천자의 눈이 부릅뜬 것이다.
"크헉!!"
그리고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몸을 기역자로 꺾었다.
"됐지?"
내 질문에 페르세르크가 쿡쿡 웃어대자 나는 멍한 얼굴로 드러누워 있는 천자를 둘러멨다.
"으......으앗! 뭐......뭐 하는 것이냐! 데이비 왕자!"
"신하, 얌전히 계시지요."
"윽?!"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지 버둥거리는 천자를 무시한 채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쓰러진 뱀파이어 겔루스를 사령마나를 이용해 일으켰다.
뱀파이어는 언데드가 안될 줄 알았지?
이후, 천천히 한 손을 귀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륀느. 시험 시작하자, 에나벨에게 내가 말해둔 대로 디버프 걸라고 전해."
타냐는 지나치게 눈에 의존하니까.
일단 시야부터 빼앗고 시작하자.
반대로, 그녀의 곁에 있던 그 맹인 공주는 반대로 눈이 보이는 것 같은 환각을 주면 되리라.
사람은 자신이 예상 못 한 상황에 처하고, 그런 위기를 넘겼을 때 성장하는 법이니까.
[명령 수락. 엘더브레인 매우 효율적인 명령을 하달.]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대답에 나는 내 손끝을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뱀파이어 겔루스를 보며 스산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킬 법한 형태이니 효과는 더욱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 넌 이 숲에서 시험을 치르는 다섯 명에게 지옥을 보여주면 된다. 신나게 샌드백이 되면 네 몫은 끝이다."
분명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하고 죽게 할 거라 선언했으니.
그대로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