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7화
117. 지금은 성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리다
갑작스레 나를 덮친 이 환각은 단순히 마법 현상이나 육신의 이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가장 비슷한 느낌이라면.
역시 린디스 제국 수도에서 잔불을 처음 얻었을 때.
내 기억을 들쑤셔 나와 공명시킨 지구의 가상 인간을 만들어 보낸 주신 프리아 여신이 나를 그녀의 세계로 불러들였을 때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 당시엔 꼴에 성스럽고, 꼴에 우아하고, 퍽도 아름다운 창공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새카만 흑운이 낀 세상의 모습이었다.
스르륵…….
지상을 내려다볼 때마다 빠르게 역변하는 세계들은 내가 가 본 적은 없지만 익숙하게 겪어본 광경들이기도 했다.
회랑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토대로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곤 했다.
그 방법으로 내게 전투 경험을 직접 새겨주었으니 말이다.
마왕 유르그가 있던 대륙 베르델.
연금술사 스승이었던 이바가 있던 유르기안 대륙.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던 오딘이 살았던 마법 문명 아트렐리아.
수많은 병과 기괴한 질병으로 거의 아포칼립스 사태에 놓여있던 신의 히포크리아의 세상.
팔라디아 제국의 정복왕이자 위대한 황제라며 자신을 자랑하던 창술의 대가 아스트레아의 고향인 보르드 대륙.
데스로드 [로 아이아스]와 내게 음유시인의 기술을 가르쳤던 뮤트, 혹은 뮤즈의 고향이기도 했던 페스리사 대륙.
샨드라 미네아처럼 3마리의 그랜드 마스터급 절대 환수를 부리던 특질능력자인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의 고향인 룩스대륙
그리고, 내 전생의 세계인, 지구로 추정되는 곳까지.
모두가 달랐지만, 한가지는 같았다.
그 세상을 뒤덮고 있는 신의 은총이 흔들리고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심연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세계를 지키던 주신의 가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호가 부서져 내렸을 때의 일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를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영향력을 약화한 주신 프리아 여신은 힘을 쥐어짜네 내게 한가지 메시지를 던졌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 뇌운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곧 그 안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천사였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어디서 한참 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이 모든 것은 주신의 상태를 대변한다.
즉, 아무리 주신이라도.
이번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러길래 누가 함부로 자극하랬나.
주신 프리아 여신과 나는 거래 관계, 그렇기에 그녀가 나를 이용해 먹으려 한 것을 알고 한 방 먹여준 것뿐이다.
그 외엔 내 알 바가 아니다.
말없이 내게 다가온 천사는 곧 내 왼손을 펼쳐 황금빛의 무언가를 쥐여주었고, 조심스레 내 손을 꼭 웅크린 뒤 잡아주었다.
그리고, 주변이 일순간 뒤바뀌었다.
“데이비…… 데이비.”
크지 않은 조용하면서도 포근한 목소리였다.
“데이비, 정신이 들어?”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폭신한 감촉에 눈을 뜬 나는, 곧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페르세르크.”
내 중얼거림에 그녀가 안도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 갑자기 쓰러져서 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를 게야.”
“걱정되든?”
“……그래, 걱정되었다네.”
약간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려버린 그녀가 말끔하게 인정했다.
그 탓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건 내 쪽이었다.
“육신이 본래대로 돌아온 걸 축하해 데이비.”
“뭐?”
아직 변이가 끝나기까지 2주가 더 남았다.
그런데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이전의 그 작은 체격이 아니라 본래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없이 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각을 되살려보자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해온 것처럼 익숙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째서 대가를 다 치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변이가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아직 손을 대지 않은 나머지 왼손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에 천천히 왼손을 편 나는.
조금 단조롭지만 특이하게 생긴 황금색 열쇠가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이비? 그건?”
“나도 몰라. 페르세르크. 이거 확인해볼 수 있겠어?”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것의 용도를 알려줄 수는 없다는 건지.
아니면 이전의 보옥처럼 용도불명인지.
뭐가 되었건 이것을 전해준 게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얼굴 없는, 상처투성이 천사.
주신 프리아 여신이 내게 접신을 하면서 건네준 게 분명했다.
말없이 열쇠를 손에 쥐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단 보관하자.”
“그거 설마……”
“신경 쓰지 마.”
담담하게 말한 내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전엔 그녀와의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대로 돌아와서 본 그녀는 확실히 품에 폭 안길 정도로 작았다.
지구의 기준으로 보면 내가 큰 키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뿔은?”
“누굴 곤란하게 만들려고. 냉큼 떼어버렸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잠들고 얼마나 지났어?”
“사흘이 흘렀다네. 그동안 그대가 깨어나지 않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는가.”
그 말에 나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흘,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다.
“환자 상태는?”
“그대가 치료방법을 알려주고 쓰러진 덕분에 치료 자체는 순조로워.”
그럼 됐네.
잘 되고 있다면 굳이 내가 나설 것은 없다.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나를 올려보더니 이내 눈을 감고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작은 모습으로 변해 내 어깨에 올라앉았다.
“역시 이게 편한 게지.”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지낼 거냐. 내가 열심히 만들어준 육신, 그렇게 막 쓸래?”
“그래 봐야 별달라질 게 있는가. 이 육신은 결국 본녀가 죽었는가 살아있는가를 나누는 경계일 뿐인데.”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막 밖의 상황을 흘끗 바라보았다.
확실히 사흘 전과 비교하면 죽음의 냄새가 극도로 옅어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수석연구원 페니실린과 고르네오 남작의 주축 아래에 치료 과정은 순조로워.”
그녀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됐어. 이제 내가 손댈 건 없네.”
느긋한 마음이었다.
본래 이곳의 일은 내가 아닌 저들이 할 일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조리 끌고 나가는 건 오히려 저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상황을 대충 정리하기 위해 페니실린 수석연구원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중간중간에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이들이 보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페니실린의 천막에 들어섰을 때.
나는 처음 보는 인물이 묵묵히 걸어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페니실린과 같은 연금술사 정장을 입고 있는 그는 새삼 심드렁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얼굴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후 그를 지나쳐 천막으로 들어가자 페니실린이 허둥지둥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왕자님! 깨어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던 참인데.”
“아니요. 딱히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럽니까. 그나저나 이것들은 다 뭡니까?”
“아…… 그게…… 별거 아닙니다.”
척 봐도 연금술 학술서와 골렘의 설계도였다.
“연금술 학술서에 골렘 설계도입니까?”
“오오,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좀 전에 나간 이가 골렘 학파의 장로님이십니다. 사실 이것들도 그분이 주신 겁니다.”
격리구역까지 찾아와서 설계도와 학술서를 건네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사실 제가 학술서를 토대로 설계도를 검수해야 하는데 농땡이를 피우고 이곳으로 도망쳤거든요. 그래서 골렘학파 장로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건네주고 가신 겁니다.”
인체학 전공의 연금술사에게 그걸 건네준다니.
조금 의외였다.
“사실 말입니다. 저분은 골렘을 어떻게 하면 인간과 매우 흡사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인체학 전공인 연금술사들에게 많이 도움을 받고 계십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페니실린 수석연구원님!! 어서 나와보십시오!”
수석연구원을 따라온 수습 연구원의 외침에 그가 화들짝 놀란다.
“어이쿠! 이런, 잠시 차라도 한잔 하고 계십시오. 치료는 순조롭습니다. 이제 상황을 지켜보는 일만 남은 겁니다.”
그가 보기 드물게 들뜬 표정으로 하하 웃어 보였다.
“왕자님 덕분입니다. 저도 이제 마음 편하게 이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가 그리 말하며 나가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홀로 남게 된 나는 느긋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의 연구실을 스윽 훑어보았다.
연금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지 여기저기 열정의 흔적들이 보였다.
말없이 학술서를 스윽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법이네.”
제법 열정을 쏟아부어 만든 티가 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굉장히 어수룩해 보였다.
실제로 페니실린이 말한 골렘학파 연금술사 장로가 추구하는 정점이 바로 내 옆에 있으니 말이다.
자아를 가진 생체 골렘.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액스 마키나를 심장으로 두고 있는 초고대 문명 골렘의 정수.
생체 골렘 륀느가 말이다.
“데이비님. 이건 골렘?”
“그래. 너와 같은.”
“매우 낮은 품질. 데이비님이 만든 륀느의 후임과 비교할 가치가 못 된다고 분석.”
“그렇겠지. 그걸 알면 이 대륙의 연금술 실력이 여기서 멈췄겠냐.”
연금술 스승 이바가 살던 세계는 엄연히 연금술이 극도로 발달한 세계였다.
티오니스가 복합적으로 발달했다 해도 그 수준이 같을 순 없었다.
“데이비님, 륀느의 후임은?”
“메라몽은 좀 기다려. 그리고 디셉티콘 편대엔 새로 막내가 곧 태어날 거야.”
“막내!”
내 말에 녀석이 눈을 반짝였다.
“이름! 륀느가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판단!”
“이름? 그래. 붙여봐 그럼.”
내 말에 녀석이 고민하듯 한 손으로 입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타스크림!”
“…… 네 편 한대로 해라.”
컨셉도 마침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내 말에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데이비? 데이비.”
륀느와 대화를 하던 중 나는 문득 페르세르크가 내 뺨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러는 게야. 집중을 전혀 못 하잖아.”
그녀의 걱정 어린 질문에 나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골렘학파 장로가 건네주고 갔다는 골렘 설계도에 내가 펜으로 이리저리 그어놓아 버린 것이다.
잘못된 점을 그어버리고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골렘학파가 찾아온 학술서의 잘못된 점까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코멘트를 달아버렸다.
거의 무의식중에 달아버린 꼴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을 텐데.
정신을 잃으면서 집중력이 산만해진 탓인지 영 뭔가 이상했다.
“에이씨……”
한 장뿐이라 버리기도 뭣한 상황인 나는 말없이 설계도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오히려 보완해줬으니 괜찮겠지. 대충 놔두고 입 닫으면 페니실린 연구원이 했다고 생각할 거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시대를 넘어선 기술력을 코멘트로 달아버리긴 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마치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난 나는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데이비가 떠난 직후, 페니실린에게 인체학 전공의 연금술 도움을 받기 위해 설계도와 학술서를 들고 왔던 장로 프란시스는 묵묵히 페니실린의 천막으로 다가왔다.
페니실린은 천재였지만 그는 사람을 치료하는 쪽을 더 선호하는 연금술사였다.
하지만 인형사 프란시스라 불리는 그는 알고 있었다. 페니실린이 골렘의 인간화에 관해 얼마나 큰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인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 그가 혹할만한 자료를 들고 와 그를 설득하던 중, 잘 풀리지 않아 자리를 비웠던 참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 특이하게 젊은 소년을 만나긴 했지만, 관심 없었다.
“이보게 페니실린……”
천막으로 다시 들어온 프란시스는 곧 천막 내부에 페니실린이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한참을 실랑이하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곧 자신이 가져온 학술서와 골렘 설계도를 정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그의 눈에 유색 약으로 그어진 낙서들이 보였다.
“이건 또 뭔……”
말을 하던 그가 멈췄다.
숨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