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4화
세상을 구경하길 좋아하는 페르세르크나 경험이 부족한 륀느나 두 아이는 마차 여행을 제법 선호하는 편이었다.
물론, 마차 여행 자체가 워낙에 지루하고 불편한 행동이지만.
이미 수차례 연금술로 메이드 인 고대놀러지를 실현했던 나는 마법을 통한 강제 편의시스템을 만들어버렸다.
공간확장과 충격완화,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이전엔 이런 것 하나 만드는데에도 제법 신경 쓰더니 이제는 손 한 번 까딱이면 끝이야?”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겉보기엔 사람 3~4명 탈법한 마차지만 내부는 수십 명이 앉아 티타임을 가져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확장된 마차의 벽에다 바깥과의 시야를 연결해 마치 거대한 창문이 바깥을 출력하도록 만드는 기행을 보였다.
“황실 마차도 이토록 호화스럽진 않을걸? 폐쇄적인 국가에서 이런 걸 몰았다간 왕보다 더 좋은 마차를 몬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을 거야.”
일리나는 일찍이 내게 대련을 제안해왔지만, 굳이 당장에 일을 치기보다는 일자에 맞추기 위해 곧바로 브리우크 왕국으로 출발했다.
“우와아!”
척 봐도 아름다운 절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 아이와 그 두 아이의 얌전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륀느를 바라보며 쿡쿡거리던 일리나는 문득 페르세르크가 가지고 있는 붉은 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 궁금했던 건데, 대체 그게 뭐예요?”
“글쎄. 알이 아닐까 싶어서 이리 가지고 있는 게지.”
“알……, 이라고요?”
“그래.”
아무리 봐도 보석만큼 반짝거리는데 보석이라고 보기엔 너무 매끄러운 표면이었다.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페르세르크가 장난기가 돋았다.
“뭐, 이리 해본들 깨어날 생각을 안 하니 별수 없는 게지. 어디 만져보겠느냐?”
“아. 괜찮아요?”
“문제 될게 무에 있는가.”
밤새 페르세르크와 나는 이 정체불명의 알을 조사해보았지만,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세계수 알과 연결해 알의 정체를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답변만 주었다.
결국, 뭐가 되었건 태어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일리나가 알을 받아들었다.
“솔직히 알보다는 그냥 보석 같기도 한…….”
나름대로 보석에 조예가 깊은 일리나가 정밀하게 검사하듯 살펴보며 중얼거리던 중이었다.
쩌적.
갑자기 붉은 표면에 금이 쩌적 하고 가버렸다.
“흣?!”
“금이 가?”
“아, 아냐! 나는 분명 손만 댔는데!”
“야, 좀 더 끌어안아 봐.”
“그래, 좀 더 품어보는 게야!”
눈을 번쩍이며 압박하는 나와 페르세르크에 일리나는 기겁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쩌적…… 쩌저적!!
그녀가 끌어안을수록 알은 더 빠르게 금이 간다.
동시에 페르세르크와 나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오호라 이 자식 보게.”
“속이 빈 껍데기를 찾아?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지.”
많은 것을 알아챌 순 없었지만, 알이 무슨 힘을 품는지, 또 그 알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내 눈엔 훤히 보였다.
“데이비, 예상이 맞는 것 같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마차를 멈춰.”
그리고는 마부에게 명령을 내린 뒤 일리나를 데리고 곧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데, 데이비?! 갑자기 왜…….”
당황한 일리나와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끄는 내 모습에 일리나의 호위기사들과 라운왕국의 근위대의 표정에 의문이 어린다.
“좋아. 거기, 거기 딱 그대로 앉아.”
이윽고 나는 그녀를 적당한 공터에 앉게 한 다음 알을 품게 했다.
“좋아……. 입질이 온다.”
뭐가 되었든 알에서 흘러나온 정체모를 힘이 일리나에게 스며들며 그녀의 힘과 공명한다.
쩌저적…… 쩍!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균열이 크게 깨어졌을 때.
일리나의 눈이 크게 떴고, 나는 표정을 굳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알에서 흘러나온 힘은 신성력이었다.
하지만 그 신성력의 느낌은 주신 프리아 여신의 신성력과 달랐다.
나를 현대의 가상현실 게임으로 초대한 이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알.
그 알에서 나온 것은 주신 프리아 여신이 아닌 다른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힘이 서린 알이다.
콰작!!
이윽고 알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아, 아기?!”
기겁한 일리나가 알 속에서 태어난 아기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바닥만큼 작은 아기는 인간과 달랐다.
머리는 새파란 색이었고 뿔이 있을법한 장소엔 깃털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등 뒤엔 한 쌍의 날개가 고이 접혀있었다.
“응애!! 응애!!”
울음을 토해내는 아이의 모습에 일리나는 기겁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주변의 시선이 가관이었다.
* * *
“저…… 으음, 까꿍?”
“우아아앙!! 우앙!!”
계속해서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는 일리나를 멀리서 지켜보며 나는 륀느와 페르세르크에게 물었다.
“저거, 성장하고 있는 거 맞지?”
“벌써 몸이 변하기 시작했어. 이 속도라면 다 자라서 얼마나 커질지 모르겠군.”
수차례 가설을 세웠다.
첫 번째 단추가 맞아떨어졌다. 이동하면서 풍부한 마나의 다양성을 빨아들인 알은 페르세르크나 내가 아닌 일리나의 힘에 이끌렸다.
첫째, 어느 정도 힘이 필요하다.
둘째, 신의 힘을 몸에 품지 않은 자가 필요하다.
신의 위계를 지닌 주제에 프리아 여신과는 다르다 생각해서 혹시나 해서 실험을 해보았는데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주신 프리아 여신의 힘을 품은 내 몸에 알은 반응하지 않았고 좋든 싫든 심연의 힘을 품고 있는 페르세르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는 심연에서 여왕이라 불리던 존재, 그게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녀가 품은 권능은 일개 생명체가 품을 힘이 아니다. 가능성을 놓고 보자면 심연의 신이 있고 그 신의 힘이 깃들었다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두 사람이 되지 않았으니 이제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면서도 신의 힘이 깃들지 않은 유일한 존재, 일리나의 힘에 공명하며 아이가 깨어났다.
첫 번째 가설이 들어맞았다.
주신 프리아 여신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신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몰라도 나는 주신 프리아 여신의 영향권을 벗어나 그 힘에 초대되었고 거기서 알을 양도받았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 맞아떨어지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많지 않지 특히 그대 같은 고위의 성자는 오히려 고여서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텐데 말이야.”
“상식을 으깨는 작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어찌 되었건 일리나의 힘과 공명하고 그 힘을 받아 부화한 게 맞다면. 당분간 일리나의 곁에 붙여두는 게 맞겠지.”
성장 속도가 빠르다. 뭐가 되었건 저놈이 모조리 큰다면 무언가 단서라도 잡을 수 있으리라.
만약 제3의 신의 존재가 확립된다면 그 신은 무언가 나와의 접촉을 위해 저것을 내려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와서 새로운 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지금 알이 내뿜는 상위 신성력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심연과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세력의 출현이라면 이건 나름대로 골치 아파진다.
어느 쪽과 손을 잡던 결국 남는 것은 하나가 될 테니 말이다.
“데이비, 저 아이와 대련을 해봐.”
“대련?”
“그래, 일리나 저 아이의 힘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대련을 빙자해서 힘을 끌어낸다면?”
페르세르크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린다. 동시에 그녀를 보던 내 얼굴에도 느긋한 장난기가 돋았다.
“어디 해보자.”
어차피 대련신청은 저쪽에서 해왔으니까.
* * *
“어디 원하는 대로 들어와 봐.”
어릴 때부터 그녀는 천재였다.
다른 점을 떠나 검을 잡은 그녀는 도저히 동년배와 겨룰 수 없을 만큼 고강했고, 그 검술 실력은 대륙에서도 그녀를 검의 공주님이라 부를 만큼 압도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실력은 같은 검을 익히는 이들로 하여금 박탈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그런 그녀는 17살의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이르는 전무후무한 사기급 재능을 선보였고 빠르게 성장해왔다. 그리고, 한 소년과의 만남으로 그 속도가 급속도로 증폭되어 결국 마스터의 벽을 넘어섰다.
그녀의 목표는 검을 즐기는 것에서 어느새 한 소년을 따라잡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일리나가 검을 들어 보였다.
신검 칼디라스.
[일리나, 긴장해. 저 자식 힘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 그새 산삼 한뿌리라도 씹어먹었나…….]
“환골탈태를 한 모양이야.”
[저 육신에 저 재능에 환골탈태? 미친 거 아니야?!]
기겁하는 칼디라스의 말을 무시한 채 일리나는 전신에 푸른 기류를 끌어올렸다.
중검의 기수식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덤벼들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상대하고 있는 데이비는 손에 쥔 나뭇가지를 휙휙 저으며 느긋함을 선보였다.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갈게.”
짧게 중얼거린 그녀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류가 쏟아진다.
그 사이에 데이비의 검을 보며 수많은 검술과 묘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쉽게 당하진 않으리라.
그때 데이비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아이고, 한잔 거하게 했더니 머리가 영 울리네.”
마치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그 모습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빈틈들이 보였다.
보통 이들이라면 눈치도 못 챌 빈틈이다.
일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기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한 방 먹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뭐해, 일어나.”
일리나는 자신의 시야에 비치는 새파란 하늘과 경악하는 주변 기사들의 얼굴, 그리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데이비를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엉성하게 움직여서 빈틈투성이였는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심드렁하게 답해주었다.
“취검이라는 건데, 이전에 본적 이 있지 않나?”
그 말에 일리나의 표정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다시 와.”
이윽고 데이비의 말에 일리나가 전신에 모든 기류를 폭사시켰다. 어설픈 검술은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방을 크게 노린다.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두르는 데이비를 보며 그녀가 눈을 번뜩였다.
투쾅!!!
수 미터 지면이 갈라지고 박살 나며 그녀를 튕겨낸다.
포탄처럼 쏘아져 들어간 일리나의 눈이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게 빛났다.
[중검]
[바위 깨기]
막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격, 그녀는 내 자존심을 건드려 피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기엔 조금 버거워 보이는 공격을 감행해온다. 명백히 내가 나뭇가지를 버리고 덤벼들기를 바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힘을 빠르게 흡수하고 변하고 있는 날개 달린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손바닥만 하던 아이는.
어느새 작은 아이만큼 커져 있었다.
빙고.
예상대로 들어맞기가 무섭게 나 또한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환골탈태 이후 제어가 쉽지 않은 육신을 제어한다.
[마령검]
[심검류]
[무장해제]
카아아아앙!!!
나뭇가지를 허공에 던져버린 내가 맨손을 펼친 뒤 손가락만 접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피하지 않고 한발 내디디며 그대로 손을 내뻗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
마음으로 벼려진 검이 순식간에 칼디라스와 충돌했고.
백은의 거검이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힘을 머금은 채 돌진해온 일리나의 무장을 해제시켜버린 나는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 당겼고, 나머지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한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고 내 주먹이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후웅!!
투쾅!!!!
직접 닿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는 있었다.
그녀의 신형 뒤편으로 이어진 울창한 숲에 거대한 충격파가 일더니 마치 칼날 바람처럼 나무들이 수십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 갈라져 버린 것이다.
“이거……, 너무 세졌는데.”
힘은 반절 정도 돌아왔다.
그런데.
자잘한 기술 하나하나 사용하는 데에 들어가는 효율이 막대하게 상승했다.
이 정도면 단순 반이라고 봐도 되는 수준인 것일까.
“아마…… 모든 힘을 되찾으면…….”
“회랑 때보다 더 강해지겠지.”
계산대로라면.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일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후방의 참상에 허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잡힌 채 멍하니 있던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극도의 분함이었다.
당연한 걸 알고 있지만 검에 평생을 쏟아온 그녀였기에 자신이 느낄 무력감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성장하던 아이의 눈이 서서히 뜨여진다.
“데이비님!”
그런 아이를 지켜보던 륀느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질렀다.
“후퇴를 높게 평가!!!”
그 말과 함께.
아이의 눈이 새파란 빛으로 번뜩이더니 일리나의 몸에서 정체 모를 기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한발 두발 물러난 내가 있던 장소에 거대한 엑스자형의 흉터가 생겨났다.
쩌적!!
카앙!!
반사적으로 심검을 끌어올린 나는 곧 아이의 힘에 잠식되듯 일어나는 일리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께 위해를 끼치는 자, 위대하신 신의 이름인 넬타리드의 이름으로 저지하겠다”
그 목소리는 아이에게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태어난 지 고작 한 시간도 안된 아이가.
이만한 신성력에 힘을 품는다.
퍽 웃긴 일이었다.
넬타리드라.
계속해서 의문이던 것이 몇 차례의 실험과 함정 모략으로 모조리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