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9화
주기적으로 힘을 받아 발동해야 할 마법진이 동력원을 잃고 서서히 빛이 꺼지기 시작하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당장 마법진을 본래대로 되돌려라!!]
하지만 좀 전처럼 주변을 짓누르는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봉인을 풀어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일대에 놈의 힘의 여파가 전해지는 매개체가 사라져버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놈!!! 네놈을 기억해두겠다! 내 이 땅을 벗어나는 그 날! 네놈을 가장 먼저 집어삼키리라!]
“아예, 기대하지요.”
[크아아아아!! 네…….]
저주 섞인 외침이 서서히 멎어 들자 나는 담담하게 아공간을 열어 부적을 제작할 때 사용했던 마나 스크롤 용지를 서너 장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주변에 박살 난 나무를 몽마가 떨어뜨린 검으로 적당히 깎아 묘비를 만든 뒤 글귀를 새겼다.
[배고픈 댕댕이, 여기 잠들다.]
“푸웁……. 세상에…… 그 무서운 마수를 댕댕이라고 부른 거야?”
“목줄 묶인 놈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서? 이건?”
“그냥 두면 조금 귀찮을 것 같아서.”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터다.
“이봐. 리리네라고 했나?”
“네? 네!”
“펜릴과 꿈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했지?”
“지금으로썬…… 당신들과 저…… 셋뿐이에요. 직접 고대 마수 펜릴과 접촉할 수 있는 건 마르카가 전부였지만……”
“그래. 그럼 됐다.”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청단이의 검날로 손끝을 찌른 나는 방울방울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번지게 한 뒤 글귀를 새기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문자네……”
“이쪽 세상 문자가 아니야.”
“그럼 네 전…… 흡……”
내 전생을 언급하려다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
“상관없어, 듣는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익숙하게 문자를 새긴 나는 하얀 인첸트 스크롤에 도력이 스며들어 활성화되는 것을 본 뒤 묘비에 가볍게 찰싹 붙였다.
[3급 봉인진]
[사주금진]
동시에 총 4장의 부적이 서로 연동되듯 스파크를 튀기며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고 이내 스르륵 사라지듯 묘비에 스며들었다.
사주금진은 사방신의 힘을 토대로 만든 봉인 진이었다.
비록 지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신수는 주작, 청룡, 백호 셋이지만.
그것으로도 효과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됐다.”
“뭘 한 거야?”
“혹시 몰라서 이중 잠금이라도 해뒀다.”
그래 본들 낮은 수준의 3급 주박술이다. 2급 이상 주박술을 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거니와 당장 놈의 힘과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에 지금으로썬 이게 한계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내 말에 일리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흐응, 너라면 당장 놈을 끄집어내서 잡아버릴 줄 알았는데.”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거든.”
“너도 못 이길 정도라고?”
“아니, 다만 이놈이 쉽진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지.”
단순히 힘을 먹고 산 마수라면 함정에 빠뜨려 끝을 볼 수야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수의 힘을 먹었다면 그냥 상대할 순 없다.
내 발언에 일리나가 심란한 표정으로 묘비를 바라보았다.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쫄 것도 없이 베팅하면 그만이지만…….
이 땅 아래 잠든 이 괴물 놈은 완벽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아마 세계수의 힘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리라.
특히 마나는 물론이고 다수의 힘이 통하지 않는 그 억지 같은 힘을 흡수한 게 맞는다면…….
지금처럼 아무런 준비도 안 한 상태에서 싸웠을 때 자칫 내가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메가로드리아나 레바테인을 생각하면 이쪽도 승산은 충분하지만 말이다.
[신기한 힘이로군.]
아직 동화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몸이 화염으로 순간 일렁였다.
이프리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녀석과의 동화를 풀어 역소환 해버렸다.
[으억?! 계약자 너 이 자식!! 그만둬!]
“안돼, 돌아가.”
마계에서의 볼일은 끝이 났다.
아니, 아직 조금 남긴 했다만……, 몽마 유시르나 리리네를 살려두었으니 그것으로 준비는 되었다.
“일리나. 쟤 풀어줘.”
“어? 응?”
“지원군 왔으니까.”
콰앙!!!!!!
그 말과 동시에.
흑빛의 탄환 수십 수백 발이 내게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출력에 일리나가 다급하게 검막을 펼쳐 그것을 막아냈지만 전부 막아내진 못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마왕!!!”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내와 검은 로브를 입은 수많은 마족이었다.
좀 전 날아든 수많은 다크스피어는 아마 대공 아스타로트.
이전에 봤을 땐 그래도 풍채가 제법이었는데 힘의 소모가 극심했는지 그의 몰골은 상당히 초로 해져있었다.
“구면인데, 그사이에 많이도 약해졌네.”
그 약해진 힘으로도 일리나에겐 마냥 쉽지 않은 듯하지만 말이다.
한때 대 세력을 일궈낸 마족이니 당연하긴 하지만.
일리나를 죽이기 위해 날아든 마창을 맨손으로 집어 막아내자 놈의 마기가 내 몸을 침식하기 위해 격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곧 마왕의 마기가 흘러나오며 놈의 힘을 강제로 흩어버렸다.
이거, 제법 쓸모있는 힘이네.
위계질서가 너무 확실하니 이런 점에서 이득이 상당한 편이다.
“리리네를 풀어주어라!! 어떻게 네놈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냐!”
그녀의 말에 나는 일리나의 곁에 주저앉아있는 리리네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가.”
“……”
“가라고.”
미련 없이 그녀를 풀어주자 리리네는 등 뒤에 작은 날개를 펄럭이더니 작은 몸을 띄워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리리네!”
“아, 아버님!”
대공 아스타로트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기자 아스타로트는 말없이 그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다…… 괜찮아……. 이 아비가 왔으니 이제 겁먹지 말아라.”
“흑, 흐흑……”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에 마족들의 적의가 더욱 강해진다.
“마왕 쟁탈은 아직 시간이 이른데? 내 기억으론 10년 아니었나?”
“닥쳐라!! 비록 네놈이 괴물 같은 힘으로 우리를 몰아냈을지라도 우리의 정신마저 꺾지는 못하리라! 마병단!!”
아스타로트의 외침에 마족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 보였다.
마왕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크나큰 페널티를 가진다.
실제로 내게 공격을 가했던 이들의 육신에 검은 스파크가 튀어 놈들을 끝없이 괴롭혔지만, 마족들의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용서한다.”
말없이 그들의 자멸을 지켜보던 내가 천천히 입을 열자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스파크가 일제히 멎었다.
“무, 무슨 짓을……”
“돌아가. 아무리 적이라도 은원관계는 확실히 해야지.”
내 말에 리리네가 아스타로트의 팔을 꼭 잡았다.
“아버님……”
“……”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는 주먹이 부서져라 강하게 쥐었고 이내 나를 노려보았다.
“대공이시여. 제압 마법진을 준비할까요.”
“제압 마법진?”
한번 당했으니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리리네, 다친 곳은 없느냐.”
“……네, 죄송해요. 명령을 완수하지 못 했……어요.”
“괜찮다. 괜찮아…… 내 어찌 너를 탓할까.”
짧게 중얼거린 그는 나를 죽을 듯 노려보다 짧게 숨을 내뱉었다.
“마병단…… 기세를 거둬라.”
“하, 하지만 대공!”
“저자는 마왕 위를 빼앗아간 존재입니다!! 이곳까지 멋대로 밀고 들어온 자를 살려둘 순……”
다급히 외치던 로브를 입은 마족 하나의 말에 아스타로트가 그를 바라본다.
동시에 마족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체념의 의지를 띠었다.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동시에 마족들의 손에 모인 검은 마기들이 일순간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릴 포위하고 있던 지독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일리나는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 어떻게 이 마계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대륙과 마계를 오가기 위해선 대량의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
아스타로트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마계가 난장판이라더니. 이런 의미였나 싶었다.
“몰랐나?”
“뭐라?”
“대충 마계 상황이 어떤지 알겠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품 안에서 쓰고남은 빈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 응고되지 않아 피가 뚝뚝 흐르는 손으로 문양을 새긴 뒤 그에게 날려 보냈다.
“받아.”
“이게 무엇이냐.”
“찢으면 내가 알 수 있다. 나중에 필요할 거야.”
담담하게 말한 내가 몸을 돌렸다.
“가자.”
“응, 응? 꺄악!”:
나는 일리나를 한 손으로 끌어안듯 안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한 뒤 그대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대규모 마법이 발현된다.
* * *
모든 마족을 속이고 아니, 마족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 모두를 속인 속을 알 수 없는 청년, 데이비가 사라졌다.
그의 모습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인간의 생태를 생각하면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여전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대공!! 어찌하여 그들을 그냥 보내신 것이옵니까!”
“맞습니다! 비록 마왕 쟁탈의 의무가 주기적으로 행해진다지만 지금이라면 당장 그 인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이미 신뢰를 많이 잃었다.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던 마족 중에서도 이제는 그를 의심하는 자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제는…… 격풍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구나.’
마계는 혼란 그 자체였다.
마왕은 마족의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탐했으니 이런 상황은 예측했어야 했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수많은 권능을 얻은 소수의 마족은 자신들을 마왕이라 일컬으며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서로서로 죽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공통된 적을 잃어버린 자들에 걸맞은 최후였다.
“아버님……”
“괜찮다. 리리네.”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리리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는 곧이어 그녀의 몸에 새겨진 가증스러운 몽마의 여제.
자신을 파괴의 마왕이라 일컫던 마르카가 걸었던 저주를 해제시켰다.
동시에 작디작은 리리네의 몸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며 본래의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공!!”
“멍청한 놈들. 전혀 보지 못하겠느냐.”
그 말에 마족들이 움찔거렸다.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그들을 향해 아스타로트는 마기를 일으켜 손을 휘저었다.
비록 세력싸움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그도 많이 초췌해졌지만, 이 정도도 못해서야 마족 최고의 강자라 불리던 이름값이 아까울 것이다.
우우웅…….
이윽고 그의 마기가 일대 영역을 모조리 뒤덮었다.
처음 나타난 것은 아스타로트의 명에 따라 마병단의 인원들이 데이비 몰래 설치해둔 수많은 요격 마법진과 제압 마법진들이었다.
“이건, 저희들이 설치한 마법…….”
그 모습에 마병단에서 의문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아스타로트가 가리킨 하늘을 보고 모두가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무슨……”
“말도 안 돼…….”
“어떻게 일개 생명체가 저런 힘을……”
하늘에 보이는 것은 도저히 한 생명체가 만들었다고 보기 힘든 수많은 마법진들이었다.
아스타로트의 마기가 주변을 밝혀가며 그 마법진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놈이 우리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설치한 것들이다.”
간단한 마법부터 트랩 마법, 방어마법, 요격마법 등등.
무서운 점은 단순히 압도적인 기량으로 마법진을 설치한 게 아니라 마법진 하나하나를 연동시켜서 적은 소모로 최대량의 효율을 끌어냈다는 점이었다.
마법을 배운 이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면 단순히 마나의 양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압도적인 경험과 깨달음의 차이.
섬뜩함에 오한이 전신에 돋았다.
마병단과 아스타로트가 설치했던 캐스팅 마법진들이 샘물이었다면 데이비라는 인간 마왕이 홀로 설치한 마법진은 거대한 급물살을 지닌 강이었다.
만나자마자 이러한 대처를 할 정도로 그의 대처는 빨랐다.
게다가 그 마법진들 위엔 아스타로트조차 감 잡을 수 없는 정교함을 지닌 마법진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예전엔 인간과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비록 비열한 방법을 저주한다고 했지만, 인간과의 전투에선 그런 것조차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마계의 여론이 뒤흔들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돼……”
“맙소사.”
“전투가 벌어졌다면 모두가 죽었을 테지……”
하늘을 가득 메우는듯한 마법진의 흔적을 보며 마병단의 마족 몇몇은 겁에 질린 듯 주저앉아 버렸다.
아스타로트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 죽일 수 있음에도 그는 자신들을 살려두는 것뿐만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 리리네를 모른 척 살려두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와 마법을 준비하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 정체 모를 힘이 담긴 종이를 건네주었다.
찢으면 자신에게 신호가 올 거라고?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려지는 기분이 드는 그였다.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건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