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0화
“선생님. 이 마을 맞아요?”
“그래. 정보대로라면 이곳에 기사단을 괴멸시킨 놈들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영지인데…….”
“용서할 수 없어요…….”
씁쓸함을 담아 샤이르 렌다가 중얼거렸다.
“샤이르 렌다. 기사단의 일에 사견을 넣으면 곤란하다.”
“아이들까지 다 죽인 악당들이에요! 선생님!”
“목소리를 낮춰라. 낮의 말은 새가 듣고, 밤의 말은 고블린이 듣는다고 했다.”
보리스의 엄한 목소리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괴멸한 기사단에는 기사단원들도 많았지만,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기사단의 인원을 채우는 방법은 버려진 아이, 혹은 부모를 일찍 잃거나 길거리에 내버려진 아이 중 재능있는 아이들을 데려가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들이 원치 않는다면 기억을 지우고 되돌려보내지만, 보통의 경우 그렇게 내몰린 아이들은 대개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기사단에 입단하는 경우가 많다.
대륙에는 여러 비밀 기사단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기사단 하나가 순식간에 괴멸한 이번 사태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기에 절대 수호지를 떠날 리 없는 앵커 나이트 소속의 기사 단원들까지 이동한 것이다.
“생존자는……”
“확률이 없진 않지. 하지만 지금까지 다른 기사단에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로 봐선 최악도 생각해놓아야 할 거다.”
그때, 테이블의 한쪽에서 말없이 보리스가 가진 술잔을 노려보던 다프네의 광신도, 루시아 쉘만이 손에 쥔 십자가를 꼭 쥐며 중얼거렸다.
“헌데, 어떻게 된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필디르,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배신자가 있었다지만……”
“루시아 쉘만. 동작 그만, 선생님이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니?”
빙그레 웃는 그 말에 루시아가 대놓고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쯧.”
그리고는 조심스레 보리스의 맥주잔을 가져가려던 손을 놓았다.
“너 지금 금욕 수행 중 아니었어? 술은 금지야 인마.”
동시에 그것을 뒤늦게 눈치챈 필디르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며 톡 쏘아붙였다.
“아니 어쨌건! 중요한 건 다른 거에요. 아무리 배신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정예가 집중된 기사단이 단시간에 그렇게 구조신호조차 못하고 무너지는 게 말이 되는 건가요?”
그 말에 보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데이비가 정령왕의 힘을 이용해 기억을 뽑아낸 대로라면 정말 특이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기사단을 괴멸시키는 이들의 모습이 찍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기사단의 상층부. 그러니까 실질적인 실력자들이 죽은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데이비 단원의 말로는 정령왕의 힘으로도 그 정도 복구하는 게 한계라고 했지.”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을 무슨 수로 찾을까.
“음 이거 맛있다. 펜디르, 이것도 먹어봐.”
“난 아까부터 먹고 있었거든?”
“야, 니들, 집중해.”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성기사 필디르가 훈계를 하자 샤이르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시선을 돌렸다.
“늬에늬에 알겠네요.”
“샤이르 렌다!”
“아 왜 짜증이야!”
씩씩거리며 싸우는 샤이르와 필디르의 모습에 펜디르와 루시아가 두 사람을 빠르게 말렸다.
“필디르! 샤이르 양!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건가요!”
“언니가 먹고 싶은 거 먹을 수도 있지 왜 언니에게만 뭐라 해?! 너도 그렇게 쉬지 않고 먹고 있으면서!”
서로 짜증을 부리는 그 모습에 보리스가 가볍게 손을 두드렸다.
투웅…….
동시에 네 사람의 몸이 우뚝 굳었다.
“다들 그만. 좋지 않은 일과 오랜 강행군 때문에 다들 예민해져 있을 거라곤 생각한다. 특히 샤이르 단원은…… 크흠! 몸이 좀 별로 좋지 않다고 했으니 필디르 단원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기사단에는 지원요청을 했으니 오래 걸리지 않아 지원이 올 거다.”
“하지만 보리스 선생님. 그들이 오기 전에 이곳에 있던 그 빌어먹을 놈들이 사라지면요?”
“아마 그러진 않을 거라 본다. 너희들이 보고한 대로 놈들은 지하산맥 쪽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가 데이비 단원에게 저지당했지. 모르긴 몰라도 쉽게 포기하려 하진 않을 거야.”
목적이 있는 놈들은 목적을 완수하기 전까지 쉽게 가지 않는다. 기사단 괴멸 같은 큰 사건을 저지른 놈들이 챙기는 것도 없이 도망친다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일 테니까.
“그러다가 저희에게 꼬리를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글쎄, 선생님이 생각하기엔 꼬리를 잘라낼 준비를 하고 강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그의 말에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먹거리는 샤이르렌다의 모습에 필디르가 떨떠름하게 입맛을 쩍쩍 다시자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술잔에 손을 뻗었다가 다시 치운 뒤 필디르의 귀를 잡아당겼다.
“따라 나와요. 사람이 섬세하지 못하게……. 그러니까 평생 연애한 번 제대로 못 하는 거예요.”
“우, 웃기는 소리! 난 프리아 여신님을 모시는 성기사로서…….”
“요즘 성기사님들도 다 혼인하시거든요? 초대 성녀님이신 다프네님도 배우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야야야! 잠깐! 좀 놔봐!”
자리에서 일어나 끌려나가려던 찰나였다.
쿠당탕!!!
두 사람이 투닥거리느라 뒤를 보지 못한 사이 한 사내가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들어와 달리다가 루시아와 부딪혀버렸다.
“꺄악!”
덜그럭!!
동시에 사내가 품에 움켜쥐고 있던 상자가 떨어졌다.
다만 단단하게 잠가놓은 탓인지 내용물이 드러나진 않았다.
“아야야……. 미안해요. 다친 곳은 없으……”
“뭐하는 거야! 이분이 뉘신 줄 알고!!”
그때였다.
사내의 뒤편에 있던 로브를 쓴 수행원 두명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며 루시아의 목에 검을 겨눈 것이다.
이에 필디르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루시아의 목에 검을 겨눈 이의 목을 점한다.
그리고 연쇄작용이라도 일어나듯 남은 수행원이 필디르의 목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연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자리에 앉아있던 쌍둥이 자매 샤이르와 펜디르가 앉은 채로 경고했다.
“검을 치우지 않으면 당장 당신들의 심장을 뚫어버릴 거야.”
싸늘하게 경고하는 모양새에 가변을 쓴 사내들이 움찔거렸다.
언제 날아들었는지 바람의 하급 정령과 물의 하급 정령이 칼날 같은 형태로 두 로브를 입은 사내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대치에 주변에서 깜짝 놀라 모두를 바라본다.
“감히…… 더러운 용병 따위가 이분께 검을 겨누겠다는 것인가?”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가면남의 말에 샤이르가 짜증스레 말한다.
“웃기고 자빠졌네. 먼저 검을 겨눈 게 누군데. 또 루시아와 부딪힌 것도 저 인간이잖아.”
“이년이……”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던 그 순간. 보리 맥주를 마시던 보리스와 바닥에 쓰러졌던 사내가 황급히 일어나며 동시에 소리 질렀다.
“그쯤 하시는 게 어떻겠소.”
보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보리스가 조용히 분위기를 짓눌렀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투기가 쏟아져 나오자 수행원들이 흠칫한다.
“피차 서로 실수였던 것 같소만. 그쪽이 조금 과하게 반응한 것 같구려.”
“네 이놈,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그러는 것이냐? 이분이 바로 럭니스 자작님이시다!”
수행원의 외침에 바닥에 쓰러져 엉금엉금 걸어가 상자를 품에 안은 사내가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몰골은 좋게 보기도 힘들었다.
비쩍 마른 몸에 며칠 잠을 못 잔 듯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있어 그 모습을 본 루시아가 흠칫하게 했다.
“이쪽에서 사과드리겠소. 다만, 의도하지 않은 불미스러운 사고였던 만큼……”
“그럼 냉큼 머리를 조아려 사과해야 할 것 아니냐!!”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던 럭니스 자작의 외침이 찢어질 듯 크게 울려 퍼지자 수행원 중 하나가 기습적으로 루시아의 오금을 걷어차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검을 치워라. 더러운 용병들.”
“이 자식이!”
“그만!!”
필디르가 짜증스레 외치려던 그 순간 그를 제지한 것은 보리스의 엄한 외침이었다.
“아직 잘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럭니스 자작님이라 하셨습니까.”
그가 거구의 체격을 이끌고 일어서자 럭니스 자작이 흠칫하며 한발 물러났다.
보리스의 풍채는 척 봐도 엄청난 탓에 위압감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보리스가 허리를 숙이자 필디르와 렌다 자매가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뭐하시는 겁이니까!!”
“선생님!! 저들이 잘못하고 부린 행패에 왜 선생님이 머리를 숙이시는 거예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루시아는 어찌해야 할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 뻐끔거렸다.
“제가 교육을 잘못시켰습니다. 부디 자비를.”
“흥! 사과하는 놈치고 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싸늘하게 쏘아붙인 럭니스 자작이 거드름을 피우듯 수염을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품에 상자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보리스에게 말했다.
“건방진 놈. 그것이 사과하는 자의 태도더냐. 내 명령 한 번이면 네놈의 목은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
“허면 어찌할까요.”
담담한 보리스의 말에 자작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동시에 다크서클이 짙게 낀 부리부리한 눈으로 루시아와 렌다 자매를 보고 혀를 핥았다.
“호오, 용병들치고는 제법 미색들이 곱구나.”
“……”
이를 빠득 깨물고 참는 기사단원들의 모습에 보리스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직 아이들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지요.”
“어흠! 뭐, 사과한다면 못 받아줄 것도 없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면야.”
“뭐야?!”
“이 자식이!!”
불같이 화를 내는 필디르와 샤이르의 외침에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지려던 찰나.
보리스가 두 사람을 제지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것으로 용서된다면.”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과 사는 철저했다.
루시아를 포함한 268기 기사단원들은 소드마스터급 힘을 지닌 보리스가 고작 자작급 귀족에게 무릎을 꿇고 조아리는 것에 피를 토하는 심정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왜 그러는지 모르진 않았다.
누가 잘못했건 그들은 비밀 기사단의 일원이다.
귀족과 엮인 사고에 연루되어 혹여라도 신변이 노출되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들 전부가 로밍 나이트가 아닌 앵커 나이트인 만큼 각별히 더 주의해야 했다.
“어서 꿇어라. 나는 대 팔란 제국의 수석 무역관인 럭니스 자작이다. 무려 팔란제국의 대공 중 한 분이신 아르티움 대공 저하께서 나를 봐주시고 계시지. 그뿐인 줄 아느냐.”
팔란제국. 그리고 엄청난 권세를 가진 아르티움 대공가와 연이 있는 귀족이라는 말에 가게 내부의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수석 무역관으로서 팔란 제국과 라운왕국의 하인스 영지의 관련 일을 하사받은 몸이라 이 말이다. 나를 건드리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성자라 불리시는 데이비 왕자님께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이제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알겠느냐.”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자작님.”
“어흠! 뭐하느냐 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 하였거늘.”
“그것으로 용서해주시는지요.”
“흠…… 너는 용서해주지. 하지만 이년들은 다르다. 감히 나의 수행원들에게 무기를 겨눈 벌, 그리고 감히 이 몸에 부딪히는 중죄를 저지른 이 세 년들은 따로 벌을 받아야겠다.”
그의 럭니스 자작의 말에 보리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찰나의 순간 268기 기사단원들은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수많은 갈등을 하는지 보고 이를 악물었다.
들키면 안 되기에, 연루되면 곤란하기에, 귀족과 충돌을 일으켜선 안 됐다.
특히 지금처럼 크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 중일 땐 말이다.
그때였다.
“음음, 그래서? 라운왕국 1왕자인 데이비 왕자와 친하다고?”
“암, 당연한 것을, 실제로 하인스 영지와 무역을 성사시키면서 그와 형제라고 불러도 될 만큼 친분을……”
“나는 그쪽을 처음 보는데. 언제부터 내가 당신의 형이 되었나?”
곧 죽어도 동생은 가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읏?!”
“팔란제국의 귀족이라는데?”
“비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년의 뒤로 나타난 소녀가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금발을 가볍게 튕겼다.
동시에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린 럭니스 자작이 가면을 쓴 일리나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푸욱!!
자작의 어깨에 신검이라 불리는 백은의 거검 칼디라스가 박히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그의 모습에 수행원들이 급히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지만 그들의 검은 마치 불량품이었다고 말하듯 한순간에 우수수 조각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녀가 나설 것도 없이 검을 박살 내버린 내가 손을 털어낸다.
내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 나와 친분이 있다고 사기를 치는 꼴이라니.
“고마운 줄 알아. 반역죄로 삼족이 멸해질 뻔한 걸 살렸으니.”
“대체 무슨……”
검이 박살 나버려 경악한 수행원들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나선 일리나가 싸늘한 얼굴로 자작의 가슴을 짓밟았다.
이제와서는 많이 누그러졌었지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차가운 눈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