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9화
옥화 공주 수윤이 숨어있던 동굴을 위장하는 건 륀느의 몫이었다.
양손을 펼친 채 특유의 힘을 사용하는 륀느는 급기야 데스 로드, 로 아이아스 특유의 사령 마나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메커니즘으로 그녀의 사령 마나까지 자신의 힘에 보태어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의 원자력 발전 에너지에 가까운 무한한 힘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힘을 방출하고 있었다.
일루미나티와의 싸움, 그 과정에서 륀느는 데스 로드, 로 아이아스의 아티펙트를 다수 흡수했고, 상당량의 에너지를 몸 안에 축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팔짱을 낀 채 윤희령이 질문해왔다.
그녀의 표정은 뭔가 상황이 마뜩잖다는 듯 보였다.
“걱정 말거라. 소녀는 대 유나라의 공주이니라. 공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따윈 없음이니…….”
“여기 계세요.”
내 말에 옥화 공주 소윤이 나를 바라보았다.
“뭬야?”
“가서 말해본들 달라지는 거 없다고.”
내 말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무엄하구…….”
“데이비도 당신과 같은 왕족이니 입을 조심하시지요.”
무어라 말하려던 그녀가 멈칫한다.
마치 다른 세상의 힘처럼 주변을 일그러뜨려 공간을 숨겼던 벽 너머로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가 나타나 수윤에게 쏘아붙였다.
“본녀의 남편은 귀한 혈통이니.”
페르세르크의 폭탄 발언에 주변에서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뭘 봐.”
“…… 아뇨. 왕족치곤 굉장히 인간이 가벼워 보여서.”
“무게 잡고 무능한 것보단 낫지?”
저격한 한마디 때문에 수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무엄…… 아니, 무례하오!”
왕족이라는 말에 단어선택을 바꾼 수윤이 나를 째려보았다.
“소녀의 어디가 무능하단 말인가!”
“태자 월계우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녀는 훨씬 오래전부터 태자 월계우와 만나 이번 비무 대회를 준비해온 유나라 측 수장이다.
그런 그녀인 만큼 태자 월계우라는 인물은 우리 중 가장 익숙한 존재였을 터였다.
“무공에 관한 관심이 지대한 자였지.”
“저 봐, 저러니까 무능하다는 거지.”
“뭬이야?! 그럼 말해보시게! 소녀의 어디가 무능한 건지!”
“당신이 가서 말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고.”
구실을 잡은 환나라는, 반드시 유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월계우를 죽인 것이 유나라와 내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환나라는 어떻게든 꼬리를 물고 유나라를 물어 뜯을 겁니다.”
그게 월계우가 바란 바였으니까.
설마 본인의 목숨까지 저울에 올려놓게 될 줄 본인도 몰랐겠지만.
“그…… 그럼! 소녀가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그대도 말하지 않았는가! 소녀의 존재가 이번 사태를 타파할 수 있다고!”
자존심이 상한 수윤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일그러뜨리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자! 말해보게!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지원해주지!”
“추적자들은?”
“죄다 얼려놓았음이야. 한가락 하는 무인들이니 죽진 않을 테지만 그 이상 추적은 힘들겠지.”
혹한에 노출되어 몸이 일부가 얼어버린 이들은 내공을 일으켜 그것을 풀어내는 데에 많은 힘을 소모할 것이다.
한파를 피한 자들도 그 블리자드의 여파로 인해 함부로 추적해올 수 없을 테고.
“이제 말해줘. 대체 누구야?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악림문의 소교주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그런 강자가 소리 없이 살해당한 건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야.”
“옥화 공주님.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전쟁은 벌어집니다.”
“아…… 알고 있다! 해서 소녀가 가서 해명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녀는 자신을 암살하러 들어온 검은 심연의 존재.
형체 없는 그놈을 본 적이 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유발하는 그 끔찍한 모습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말해보라.”
“상황부터 정리해드릴게. 우선 월계우는 그놈에게 이미 살해당했습니다. 내가 손 쓰기엔 그 방식이 너무 더러워서 막을 수 없었기도 하고.”
죽은 지 얼마 안 된 그놈을 다시 살리기엔 너무 손해가 막심했다.
여분의 양도 가능한 잔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무림맹과 환나라는 이제 죽자고 나를 적대할 겁니다.”
환나라가 덤비지 못하게 만드는 법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수단은 최 하책이나 다름없다.
천중원의 균형을 수호할 수 없게 될테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잡혀줄 생각도 없고 놈들에게 꼬리를 내어줄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놈들은 내 소속을 공격하겠죠.”
백도 무림, 그리고 유나라를.
월계우는 전쟁의 구실만을 노리고 있었다.
절대 기회를 놓칠 놈들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은 계속 대외적으론 죽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같이 피해를 본 입장에서 환나라로써도 당장 나라는 존재를 쫓지 같은 피해자인 유나라와 백도 무림을 공격할 여유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공자님의 소속이 백도 무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쪽에서 그걸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적대한다는 소리였다.
“걱정 말아요. 환나라는 절대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니.”
내 말에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었지만 당연한 일이다.
압도적으로 위험한 적을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무시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내가 가진 모든 절대보옥들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한자리에 모으자 녹빛의 빛을 발하며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신비로운 현상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로 뭉쳐진 절대보옥의 파편은 손가락 마디만 한 보석이 되어 영롱한 벽옥의 빛을 퍼뜨렸다.
이후 나는 륀느의 힘으로 가려진 동굴을 빠져나온 뒤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나왔던 이들은 곧이어 내가 꺼낸 섭선과 방울 가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려고?”
“보고나 있어.”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간단하게 만든 것이라 효율은 기대할 수 없지만.
이미 있는걸 불러내는 데엔 어려울 것도 없다.
이윽고 내 입에서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계약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나의 염원에 의해 태어난 자들이여.
계약의 내용에 따라 이곳에 출근해라.
츠츠츳!!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와 함께 섭선을 펼쳐 들자 그 끝으로 뇌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1등은 이놈이네.”
콰르릉!!!
내 말과 함께. 하늘에 흑운이 가득해지기 시작하며 방대한 힘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도력을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저게…… 뭐야?!”
경악한 윤희령과 도화선녀 곽미영, 그리고 옥화 공주 수윤이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그들도 익히 아는 존재였다.
거대한 길이.
푸른 비늘과 한 쌍의 수염.
입에 물고 있는 힘의 상징과도 같은 여의주.
뇌기와 풍운을 몰고 오는 사신수.
청룡 쿠릉이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앙!!!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이 세상에 풍부하게 퍼진 힘을 마음껏 빨아들이기 시작한 사신수, 청룡은 평소보다 더 거대하고.
평소보다 더 위압적이며.
평소보다 더 압도적인 존재감을 사방에 흩뿌렸다.
“처…… 청룡?!”
“사신수라고?! 사신수가 실존했단 말이더냐!”
청룡 쿠릉이는 등장과 동시에 거대한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며 천천히 내게 내려왔다.
“요란스럽게도 나오는구나.”
그 모습을 본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다들 아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정말 사신수인 전설의 영물, 청룡을 불러낸 게 맞는지.
의혹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었지만 굳이 대답해주진 않았다.
하나로 그렇게 놀라서야 쓰나.
이후 다시 한번 방울 가지를 튕긴다.
동시에 섭선의 끝에 이번엔 뇌기가 아닌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나와라.”
그래도 첫째 녀석이니.
내가 대접해주마.
화르르르르륵!!!
강풍과 뇌운을 동반한 청룡의 등장에 이어 허공에 거대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문자를 만들어내듯 타오르기 시작한 화염은 곧이어 공간 전체를 불태워버렸고, 그 안에서 거대한 알을 만들어낸다.
“이…… 이토록 강렬한 화염이라니…… 제갈가에서 사신수의 힘을 사용한다고 들은 바는 있지만…….”
압도적인 열기에 주춤하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멋지구나…… 정말 경이로워…….”
모두가 주작 불닭이의 출현에 넋을 놓고 있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퍼뜩 튀어나와! 시간도 없는데 쓸데없이 폼 잡고 있어!”
-끼이이이이이익!!!!
내 외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알이 박살 나며 그 안에서 거대한 화염으로 둘러싸인 불의 새.
주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청룡과 주작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또 내게로 온다.
이번엔 또 뭘 보여줄 거냐고.
거 보채기는.
딸랑!!
이어서 다시 한번 방울을 딸랑이자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다른 사신수들은 엄청난 존재감과 크기,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채 나타났다.
한 놈은 분노조절 장애지만 자존심이 더럽게 강하고.
나머지 한 놈은 흉포하고 오만하지만, 자존심이 더럽게 강하다.
다만.
마지막 놈은 조금 달랐다.
드드드드드드득!!!
엄청난 소음과 함께 모습을 지면의 파편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호랑이의 형체를 만들어낸다.
불닭이와 쿠릉이에 비하면 그 크기는 작지만 품고 있는 힘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새로운 신수의 등장에 시선을 모았다.
청룡과 주작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엔 지의 사신수.
호랑이의 형상을 띤 거대한 신수의 등장에 모두가 직감했다.
지의 신수 백호로구나!
백호는 어떤 위압을 보여줄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렸다.
“…….”
“…….”
모두가 침묵한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지의 사신수, 백호는…….
드르렁…… 드르르엉…… 푸우…….
배를 까뒤집은 채 늘어져 잠들어있었다.
“저…… 저게 백호라고?”
“현명하기로는 사신수 중 상위 신수라던 백호?”
백호가 현명해?
“이놈은 고양잇과다.”
고양이와 놈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도도한 병신 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래. 차라리 저렇게 요란법석을 떨며 나타나는 놈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
배를 까뒤집은 채 주변에서 뭔 일이 나도 상관없다는 듯 잠들어있는 신수 백호 흰둥이의 모습에 모두가 벙찐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는 충격받은 얼굴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본 걸 쉬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백호 흰둥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에 뜬 저 철없는 두 녀석은 아주 신이 난 듯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말이다.
“당장 내려와 이 새끼들아!”
이윽고 놈들의 괴성을 참지 못한 내가 짜증스레 외치자 주작 불닭이와 쿠릉이의 눈에 불이 번뜩였다.
나를 바라보는 놈들의 시선.
그것은.
반항의 눈빛이다.
“저…… 화가 잔뜩 난 거 같은데?”
긴장한 얼굴로 윤희령이 나를 말려본다.
곽미영이나 수윤조차 내가 놈들을 향해 역정을 내는 것에 상당히 겁을 먹은 듯 보였다.
혹여라도 저 위대한 사신수가 분노라도 터뜨린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것이 내가 노린 바였다.
이 세계엔 주술과 사신수가 존재한다.
실질적으로 사신수인 이놈들이 이곳에서 더 강해지는 건 맞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최대의 메리트나 다름없다.
그리고.
나는 이놈들을 전면에 내세워 양국 전체가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리게 할 생각이었다.
물론.
-크르르르르.
-끼이이이이이!!
중원에 퍼진 주술적인 힘에 취해 더욱 강해지면서 겁대가리를 상실한 저놈들에게 위아래를 새겨주는 것이 우선인 듯 보였다.
츠츠츠츳!!!
이윽고 나는 아공간에서 커다란 금속의 창을 꺼내 들었다.
첫 번째 형태, 십자가 형태를 지닌 창, 신창 롱기누스.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이다.
“퉤!”
손바닥에 가볍게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나는 섬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강해져서 기분 좋은 거 알아. 그런데 겁을 잃으면 안 되지. 안 그래?”
내 말에 사신수를 자극하지 말라 경악하던 이들은 곧 벌어진 사태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그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