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6화
216. 검은 바닷속에 내팽개쳐진 여왕
어두운 공허. 그곳에 내팽개쳐진 검은 안개가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폭주하는 신은 도저히 신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추하고 나락까지 떨어진 무언가였다.
콰지직!! 콰직!!
검은 공간에서 무언가가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작은 소녀와 그 소녀를 내려다보는 주홍빛 눈의 검은 안개가 서로 마주했다.
검은 안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광에는 극도의 분노가 서린 게 보였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
[프…… 리아.]
쥐어 짜내는 듯한 누군가를 향한 갈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주홍빛의 눈동자를 가진 검은 안개는 곧이어 쓰러져 있는 고딕 레이스 풍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에게 스며들었다.
“아…… 아아…… 아아아악!!”
그리고. 쓰러진 소녀가 이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은 채 이를 악물고 있던 소녀가 눈을 부릅떴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의 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려워하라…… 나는 모든 근원의 어둠이니. 세상은 끝을 맞이하고. 곧 나의 분노를 세상에 알리리라.]
두려움을 자아내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녀가 파르르 떨 듯 머리를 짓누르며 손톱을 세우기 시작했다.
꽉 감고 있던 소녀의 눈이 일순간 뜨여지며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에서 거친 안광이 일렁였다.
“아직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수많은 감정이 서린 목소리였다.
“아직…… 지옥이…….”
소녀는 이를 악문 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총을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헤라…… 클…… 래스…….”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안개가 다시 그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던 투명한 눈물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부수겠다. 그리고…… 나를 되찾을지니…… 나를 찾아와라…… 그곳에 너를 초대할 테니. 프리아의 대리자…….”
좀 전과는 다르게 광기가 서린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데이비 왕자! 그렇지 않아도 당신을 만나…… 헙?!”
내게 다가오며 무언가 다급히 말하던 쿠틴 대통령이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환하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쿠당탕!!
반사적으로 뛰쳐나간 그가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아연실색했다.
하늘엔 마치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듯 다수의 검은 그림자들이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명할 시간을 30초.”
“…….”
쿠틴의 몸이 파르르 떨리며 돌아간다.
애초에 이런 상황 정도는 예-측했다.
그는 뛰어난 지도자. 그렇기에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가 입을 열어야 했다.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예상과 다른 답변이 나올 경우. 반드시 떨어뜨립니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주변의 공기부터가 섬뜩하게 떨려온다.
확실했다.
그는 지금 웃고 있지만,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상황보다 분노하고 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는 순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강대하던 국가의 통치권자였다곤 해도 지금 그는 호랑이 앞에 내던져진 토끼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존재는 같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였으니까.
“일단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러시아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쉬리릭 퍼엉!!
그 말과 함께 그의 얼굴 바로 옆 공간을 꿰뚫고 무언가가 지나갔다.
“적대할 생각이 없는데 페르를 공격했습니까? 분명 륀느가 한차례 당신들에게 상황을 전달했을 텐데요.”
데이비의 말에 쿠틴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온 옅은 청빛을 띠는 은발의 작은 소녀를 기억해냈다.
인간이 아닌 독특한 무언가였던 소녀는 존재만큼이나 독특한 어조로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달라 부탁하고 사라졌다.
자칫 그녀를 자극하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실제로 쿠틴 또한 이미 륀느와 페르세르크가 한차례 충돌하면서 어떤 대참사가 터졌는지 본 적이 있기에 당연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자연재해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장땡이니까.
그런 그녀를 그의 의도대로 공격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득이라곤 쥐뿔도 없는 지뢰일 뿐이다.
“알다시피 우리 러시아가 당신과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애써 숨기며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의 군대와 각성자들이 공격했죠.”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해서 빠르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쿠틴의 말에 데이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통수권자인 당신이 모르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겁니까?”
“현재로선 더 파악 중에 있습니다. 약속하지요. 그자들이 누구인지만 알아낸다면 반드시 잡아다가 당신의 앞…….”
콰앙!!!
“흐읍!?”
그가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왜 몰랐습니까? 당신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이…… 이건 전적으로 저의 불찰…….”
콰앙!!!
“끅!”
“그럼 할 말이 없는 거네요.”
빌어먹을!
쿠틴은 속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애써 숨겼다.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가 가진 정보 중 그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보고가 올라왔다.
“각하!”
다급히 들어온 한 사내의 외침에 쿠틴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잡았습니다! 공격 명령을 하달한 고르바 장군을 현재 잡아 이송 중입니다!”
눈을 크게 뜬 그가 데이비에게 시선을 돌린다.
“가시죠, 놈을 잡았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러시아는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자에 대한 신병을 넘겨주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일에 전적으로 지원하겠소.”
뭐가 되었건 지금에 와서 그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뭐든 해야 했다.
이거야 원.
[소비에트 붕괴가 우습게 들려올 때보다 더 거지 같은 상황일 거다. 이건.]
속으로 쓰게 중얼거리며 그는 데이비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침묵하던 데이비를 긴장한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았을까.
이내 서슬 퍼런 기세가 수그러들자 쿠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마음에 드는 답변을 내려야 할 겁니다.”
“물론. 놈이 어릴 적 이불에 지도를 몇 번 그렸는지까지 알아내 드리겠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고요.”
스산한 농담이 오간다.
* * *
쿠틴 대통령의 행동력은 칭찬할만했다.
순식간에 이번 일을 명령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에 쿠틴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면 더 이상 러시아에서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이미 잡힌 자들은 언제고 처단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들이 어떤 이유였건 간에.
참…… 베르단데와 비슷하지 않은가.
웃긴 일이다.
이후 러시아를 떠나 다시 페르세르크가 잠든 곳으로 온 나는 정체불명의 결계를 펼쳐놓은 베르단데를 볼 수 있었다.
“이건 뭐야.”
“네가 폭주할 경우 너를 막을 유일한 수단.”
나를 보며 베르단데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폭주?”
“저 여자를 구해내기 위해선 내 힘으로 널 그녀의 심층까지 날려 보낼 거야. 그동안 넌 심연의 영향을 받겠지. 육체가 날뛸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는 해야 하니까.”
“배신해놓고 말은 잘하네.”
“…….”
그 영향을 받은 육체가 멋대로 날뛰기 시작할 것이라는 소리였다.
“네가 미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미쳐버린다면 그땐 전부 끝장이니까.”
페르세르크를 구해내지 못하고, 시간이 오래 지속되어버리면 나까지 이클립스처럼 미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연.
고대룡의 수장 중 하나였던 이클립스조차 미쳐버리게 만든 검은 공간.
타나토스가 오랜 시간 갇혀있던 어둠의 끝이며. 현재 페르세르크가 갇혀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녀는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베르단데는 그녀를 구해낼 수 있게 조력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렇기에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네가 그녀를 구해오면. 그 후에 네 검에 목을 내어주던지 할 테니까.”
“…….”
“다만 나는 반대하고 싶어.”
성공률이 너무 희박하니까.
“그녀를 찾아낼 가능성도. 그녀를 구해낼 가능성도 너무 낮아. 자칫하면 그녀도 너도 모두 심연에 미쳐 폭주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물었다.
“이클립스도 그런 거냐?”
“…….”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도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녀는 당장은 아니니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마음을 준비하라 일렀다.
이미 한차례 배신한 대상이지만 도울 수 있는 이가 그녀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머리가 괜스레 복잡해진다.
“시작하자.”
이후 내가 그녀가 쳐놓은 결계 너머로 들어가자 그녀가 마법서를 들어 올려 허공에 띄웠다.
“우선 네 영혼을 분리할 거야. 넌 자체적인 저항력이 너무 강해. 그러니까 저항하지 마.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영원히 시도할 수 없어. 물론 네가 못 믿을 테니 기어스를 걸어도 좋아.”
그녀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흑마법인 종속 계약 마법.
로드 오브 기어스를 그녀에게 발현했다.
그녀는 내 마법을 거부하지 않았고 한가지 계약을 맺었다.
내가 페르세르크를 구해올 때까지 모든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배신할 경우. 그녀의 목숨이 아닌. 스쿨드의 목숨을 대가로 건다.
애초에 자기 목숨 버릴 생각으로 가득한 베르단데가 작정하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절대로 지키려고 하는 스쿨드의 목숨이라면.“
그녀는 내 결정에 조금 씁쓸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빠르게 그녀와 계약을 마치고 내 몸의 모든 저항하는 힘을 가라앉히자 몸이 부웅 뜨는 느낌이었다.
무슨 수로 그녀가 내 의식의 일부를 끌어내 심층으로 날려 보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게 가능한 건 심연이나 다름없는 그녀만이 가능하다.
이윽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과 함께 내 몸이 완전히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죽은 자가 된 느낌이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그녀가 만들어 놓은 결계의 한복판으로 내 육신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말없이 복잡한 심경을 담아 나를 보는 륀느를 뒤로한 채 내가 베르단데를 보자 그녀가 나를 정확히 직시하며 말했다.
“영체가 안정화될 때까지 반나절 정도 걸려. 그 상태로 원하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익숙해지도록 해. 최대한 익숙해야 그곳에서 네가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신을 떠나 이리저리 움직이다 날아올랐다.
륀느는 나를 보지 못한 듯하지만 베르단데는 정확히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움직였다.
첫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공정 아스가르드였다.
* * *
아스가르드 내부의 엘프나 드워프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에이리아 또한 마찬가지.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던 움직임도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사실 베르단데를 완전히 믿을 수 없기에 나름대로 보험을 깔아둔 것도 있지만 이런 식이라면 별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혼과 육신의 괴리가 거의 사라졌다곤 하지만 역시 내 영혼이 가진 힘의 한계는 회랑에서의 한계와 동일하기에 더욱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말없이 영체의 에너지를 끌어내 마법을 발현해보자 가볍게 마법이 시전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아스가르드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현아를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띠리링…….
아름다운 음색이 들려온다.
현아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테라스에 앉아 조용히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채 눈을 감고 연주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던 나는 곧이어 그녀를 떠나려 했다.
“뭐에요? 이젠 유령처럼 변하고?”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가 물어온다.
어라? 나를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그렇게 의문을 품던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아. 너 귀안이 아직 안 닫혔구나.”
내 물음에 그녀가 말없이 나를 본다.
“귀안? 설마…… 당신 죽은 거예요?!”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죽긴 누가 죽어. 그냥 영혼만 빼낸 거야.”
“세상에…….”
경악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괜히 변덕이 치고 올라왔다.
“잠시 떠날 거야. 어쩌면 못 돌아올지도 몰라.”
“……떠난다고요?”
“그래.”
“고향으로?”
“아니.”
내 말에 그녀는 불안한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페르세르크의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지?”
“모르면 멍청이죠. 세상이 지금 그녀의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폭주해버린 그녀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는 이가 있을까.
당연한 일이었다.
“페르세르크 언니를 구하러 가는 건가요?”
“그래.”
“위험하겠죠?”
“성공확률은 1퍼센트도 안 되겠지.”
내 말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뻗었다.
영체인데도 귀안이 열린 그녀는 내게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놀랐다.
“야.”
“안가면…….”
울음기 섞인 목소리다.
“안 돼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챈 듯 보였다. 확률도 확률이지만 내가 가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말이다.
“가지 말아요…… 거기 위험한 곳이잖아…….”
그녀의 행동에 나는 말 없이 그녀를 보다 물었다.
“페르가 기다리고 있어. 가야 해.”
“가지 말아요! 그냥……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왜 당신이 가야 하는데요?!”
“그럼 누가 대신 가는데?”
“…….”
“애초에 네가 왜 그렇게 필사적인데.”
그녀와 나름대로 미운 정이 든 건 사실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잠깐의 인연이다.
그런 것치고 그녀는 너무 필사적으로 나를 말리고 있었다.
내 물음에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 침묵했다.
“당신이 소중하니까요.”
그 말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신현수로서 화신이 되어 그녀와 만났을 때 아니겠지 하긴 했는데 설마……
“너…… 설마…….”
내가 놀란 듯 그녀를 보며 묻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맞아요.”
“너 설마 나를…….”
“맞아요. 나는 이제 알아요.”
잠시 침묵하던 나와 그녀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 좋아하냐?”
“당신이 현수 오빠라는 거.”
어?
그녀와 내가 동시에 벙 찐 표정으로 서로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