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7화
놀라울 정도로 높은 정수가 담긴 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충 휘두른 일검도 아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일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면 그 성취를 못 알아볼 수 없는 검이기도 했다.
그 탓일까. 코시아의 곁에 있던 추종자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멍청한 놈. 그렇게 약하게 휘두르는 검에 누가 죽겠나.”
그들의 평가 따위는 상관없었다.
타디아가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과 깨달음, 그리고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경지는 고작 겉멋에 빠져 검을 휘두르는 이들이 알아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
실제로 바이스 브로커 교수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듯하더니 이내 채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제법이구나.”
“…….”
“하지만 엉성한 부분이 너무 많다. 부드러움에 치중하여 힘을 너무 뺐고, 겉멋이 너무 들어갔어. 검술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일한 무학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노려본다.
“검로가 깔끔하지 못하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놈이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
“못난 놈. 데이비 왕자께서 네놈 같은 평민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거늘.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의심을 품어!?”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게 뭐가 나쁜 겁니까?”
“뭐…… 뭐라?!”
“납득할 수 있는 평가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그의 외침에 속으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놈은 나머지 시험 모두 0점 처리하겠다!”
“시험 규정에 그런 건 없는 것으로…….”
콰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검이 풍압을 일으키며 내 폭파시켰다.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라. 타디아. 네놈의 재능은 알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네놈이 가진 재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네놈의 그런 오만한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검의 극의에 다다라 마나를 깨우칠 수 없다!”
엄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다음!!”
역시는 역시였다.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편애가 어딨어…….”
“유별날 정도로 타디아에게만 엄격하네…….”
불만을 토로하는 몇몇 학생들을 날카롭게 째려본 그가 말한다.
“불만이 있느냐?”
“……없습니다.”
조용히 대답한 나는 목검을 휙 던져버린 뒤 걸음을 옮겼다.
냉정하게 분석했을 때 타디아도 완벽하다 할 순 없다.
하지만 반대로 타디아의 실력이 이런 취급을 받을 수준은 분명 아니었다.
엄하게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못한다고 몰아붙인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코시아같이 정말로 겉멋에 맛을 들린 이들의 점수는 굉장히 높게 책정되었다.
겉보기엔 평민과 귀족자제 모두 평등하게 점수를 잰 것 같으나 그 실상은 달랐다.
몇몇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
이후 나는 타디아를 대신해 촌치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의학부 시험도 치렀다.
다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였다.
‘이것 봐라?’
도저히 10대 아카데미 생도가 풀 수 있는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다.
실습. 경험, 그 외 부가적인 지식까지.
내 시선에 서 봤을 때 도저히 이건 이 학생들이 풀기엔 난이도가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다.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육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제 기어가는 법을 배우는 아이들이 날아가는 방법을 시험받는 것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자 다수의 학생들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끙끙대며 문제를 풀고 있다.
반면 코시아를 포함한 몇몇은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단순 마치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거침이 없다.
이에 나는 적당히 답변을 써낸 뒤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섰다.
“데이비 오라버니. 고생하셨어요.”
시험장을 나선 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내게 다가오는 에이리아를 끌어안듯 안아 들었다.
“고생이라고 할 게 뭐 있어.”
“헤헤.”
옅게 웃어 보인 그녀가 귀를 쫑긋거렸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뭐, 별거 있나. 생각했던 대로지.”
상상 이상으로 평민 출신 생도들을 향한 차별이 있다.
“시험에 내가 덫을 좀 쳐놨으니까. 한번 낚이길 기도해봐야지.”
“피곤하시죠? 어깨라도 좀 주물러드릴까요?”
이상하리만치 적극적인 에이리아의 행동에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게 있구나?”
“네? 아…… 아 그게…….”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두번 밖에…….”
용기를 내서 말하나 그녀가 바라는 게 뭔지 알았다.
저돌적인 일리나와 은근슬쩍 리드하며 나를 가지고 노는 페르세르크와 다르게 에이리아는 욕망은 있어도 혹 내게 부담이 될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곤 했다.
그래서 평소엔 페르나 내가 배려해주는 편이었지만 타디아의 일로 생각지 못하고 있던 찰나였다.
“아. 그러네.”
픽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당기며 그대로 입을 맞춰주자 그녀의 꼬리가 빳빳하게 경직되고 귀가 쫑긋 솟았다.
청록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느낌이 들었다.
“데이비 오라버니.”
“음?”
“다시 인생을 살아도 같은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그녀의 물음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의 삶을 만족하고 있어. 페르세르크도 일리나도 에이리아 너도, 전부.”
살아가면서 정이 든다고 했던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리나도 에이리아도 이제는 없어선 안 될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 * *
시험이 끝난 이후 나는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을 모두 모았다.
“다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조금 논란이 있어서 말이죠.”
내 담담한 말에 교수들의 반응이 반반으로 갈렸다.
내게 직접 배웠던 이들은 경직된 얼굴을. 몇몇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논란이라 하시면 어떤…….”
논란이라는 말에 고르네오 남작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담담하게 차를 마시던 앨리스 대주교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냥 논란은 아니라는 소리겠네요.”
“맞습니다. 성적 조작 및 차별 대우라더군요.”
그 말에 앨리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사실이에요?”
“예.”
“워낙에 일이 중한 일이라 숨기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평등한 교육 제공이라는 하인스 아카데미의 기본 교칙을 개무시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어쩔 수가 없죠.”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촌치 교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바이스 브로커 교수 또한 거들었다.
“그래서요? 이 일. 지금에 와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미 범인을 찾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역시 앨리스 대주교, 정치 수완으로 성국 내에서 엄청난 입지를 다졌던 인물답게 눈치가 빠르다.
“저는 분명 수업 방식에 관해선 각 교수님들을 존중합니다. 방법이 엄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 이상 존중할 것이고요. 여러분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짧게 중얼거렸다.
“개인 사익을 위해서,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하거나, 생도들을 차별하는 건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가져온 시험지 두 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온 목검을 집어 들었다.
“데이비 왕자님?”
“바이스 브로커 교수님. 쟁쟁한 검술실력으로 유명한 분이시지요.”
“……네…… 가…… 감사합니다.”
“혹, 제 검술을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바이스 교수가 뜨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 소드마스터들도 경외하는 데이비 왕자님의 검술을 하찮은 눈을 가진 제가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는지…….”
“괜찮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눈을 믿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정확히. 타디아의 모습으로 시험을 쳤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관련 없는 교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붕!! 붕!!!
너무 뛰어나지도 너무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검기였다.
“냉정하게 평가해주세요.”
내 말에 바이스 브로커 교수가 짧게 침음성을 삼켰다.
“예…… 뭐, 솔직히 정말 무난한 검기였습니다. 딱히 흠잡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
그가 조용히 답변하자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럼 이번엔 어떤지 봐주시겠습니까?”
“예? 데이비 왕자님 지금 뭐하시는…….”
“보시면 압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나는 겉멋이 들어간 코시아의 검기를 정확히 재현해냈다.
동시에 검술학부 교수들의 표정이 굳는다.
“어떻습니까?”
“엉망진창이네요.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감자를 손에 쥐고 있던 젊은 교수 올만이었다.
앨리스 대주교와 고르네오 남작 등등 초창기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진을 차지하며 내게 직접 각 분야를 배웠던 자이기도 했다.
“눈이 썩는 기분입니다.”
“바이스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물음에 바이스 브로커는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겉멋이 잔뜩 든 끔찍한 검기입니다.”
“그렇죠?”
담담하게 말한 내가 목검을 던져버렸다.
터엉!!!!
동시에 목검이 허공을 날아 튕기고는 아카데미 교수 회의실 벽면에 가볍게 박혀버렸다.
“흡?!”
“세상에…….”
경악한 표정으로 교수진들이 탄식한다.
방금 목검을 던진 행동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소드마스터 조차 불가능한 경지의 검기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교수님들의 눈은 정확합니다. 제 눈에 두 검기 모두 잘났다고 할 수 없죠. 그래서 묻는 겁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왜 편파 판정을 저질렀습니까.”
“읏?!”
“바이스 브로커 교수.”
“…….”
“내가 방금 보인 두 번의 검술,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내가 품 안에서 영상석을 꺼내 들었다.
터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대리석제 테이블에 놓인 영상석이 거칠게 마나를 내뿜으며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코시아와 타디아가 검술 시험을 치르는 장면이었고, 그것을 평가하는 바이스 교수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타디아가 항의를 하고 바이스 교수가 역정을 내며 그를 실격처리하는 영상이었다.
“…….”
팔란 제국의 소드마스터. 이제는 하인스 아카데미에 장기 출장 중인 올만 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x 같네요.”
분명히 부드럽고 우아하며 교양 넘치는 소드마스터로 팔란 제국 내에서도 그 멋지고 교양 넘치는 모습으로 인해 수많은 영애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그였다.
그런 그도 이곳에 와서 참 많이 변했다.
앨리스 대주교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덜컹!!!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바이스 브로커 교수를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것 같은 시선이었다.
“바이스 교수님. 지금 내가 본 게 사실입니까?”
“이…… 이건 모함입니다! 데이비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억지 모함은 제게…….”
스르륵…….
그의 말이 멈춘다.
내 모습이 정확히 타디아처럼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런?!”
“정확히 같은 자세였습니다. 그런데 어째…… 그때와 평가가 다르네요? 뭐? 검로가 깔끔하지 못해? 완벽한 검술?”
내 말에 그가 퍼렇게 죽은 얼굴을 했다.
“이래도. 잡아뗄 겁니까? 내가 직접 보고 영상석에 담은 내용인데?”
타디아의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기회 주는 겁니다. 당신이 코시아 생도의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성적조작을 해주었던 지금까지의 사례들은 전부 확보됐고요.”
“…….”
“당신 입으로 스스로 실토하기를 바란 겁니다.”
“데…… 데이비 왕자님…….”
“당신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담담하게 말한 내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처음 꺼낸 두 장의 시험지를 촌치 교수 쪽으로 스윽 밀며 걸음을 계속해서 내디뎠다.
“이건 무슨…….”
“촌치 교수. 내가 시험문제를 살짝 바꾼 건 알고 있습니까?”
“그…… 그게 무슨?!”
“근데 말이죠. 기본 전문지식도 없는 생도가 답을 미리 알고 적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답변이 나왔던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내가 건 함정은 간단했다.
고등학생에게 상당한 난이도의 미분 문제를 던져준 것이다.
당연히 노력하면 풀 수는 있지만, 쉽게 풀 수는 없다.
큰 문제는 없다고 여긴 촌치 교수는 고득점을 위해 그것의 답변까지 그들에게 알려준 것이고.
그런데.
내가 중간에 시험지의 내용을 바꿔 출제했다.
단순한 난이도 있는 미분문제에서 박사학위조차 풀 수 없는 극악의 문제로 말이다.
문제는 그 시험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답안이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확하고 완벽한 답변인데. 문제요지도 파악 못 해요?”
“…….”
“코시아 학생 불러올까요?”
“…….”
사실 성적 조작에 대해 그들은 여러 함정을 쳐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했다.
“차라리 공정하게 테스트했으면 그나마 오래 버텼을 텐데.”
“그…… 그건…….”
“압니다. 내가 그렇게 못하게 했으니까.”
나는 이 모든 함정을 설치하기 전 하인스 아카데미에 툭 던지듯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이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한 것이다.
그 결과.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도 절대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촌치 교수와 바이스 브로커 교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
그대로 딱 걸렸다.
스으윽…….
바이스 교수를 향해 걸어가며 거대한 검술학 교본을 집어 든 내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뇌물수수, 성적조작. 이 모든 게 이 아카데미의 이미지를 개 박살 냈습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역전 용사들의 자식들을 제 말을 개무시하고 짓밟았죠.”
내 말에 앨리스 대주교가 한숨을 내쉰다.
“하아…… 어떤 새끼가 저런 인간들을 영입시킨 거야…….”
“데…… 데이비 왕자님!”
다급한 바이스 교수의 외침에 내가 붉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닿을 거리까지 가까이 간 채 그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선택하세요. 교본으로 맞아 뒤질래요? 아니면 목숨은 건질래요.”
“그…… 그게…….”
“참고로 후자를 고르면 살려는 즐겁습니다.”
차라리 뒤지는 게 좋다고 생각할 만큼 완벽하게 뭉개버릴 테지만.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 학생 모두 내게는 소중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 소중한 가족을 가지고 장난을 쳐? 앨리스 대주교.”
“대주교라 부르지 말고 교수님이라 불러주세요. 왕자님.”
“아 어쨌든. 이 사람. 내가 어떻게 할까요.”
내 물음에 그녀가 피식 웃어보였다.
“패 죽여요. 뭘 번거롭게.”
저게 전대 성녀 후보가 맞나…….
이에 나는 다른 교수들에게 물었다.
“올만 교수님.”
“예.”
감자를 씹어 삼키다가 움찔한 그가 나를 본다.
“어떻게 할까요.”
“독방에 가두고 감자 200개만 먹입시다.”
저놈의 감자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