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0화
“꺅!”
검을 쥐고 있던 에반젤린이 비명을 지르며 움찔거릴 정도의 광기였다.
두 눈을 번들거리며 휘적휘적 다가온 그가 에반젤린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마치 수일을 굶은 이처럼 휘적휘적 걸어가 에반젤린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되네! 그…… 그그그…… 그 검을 그러니까……”
말까지 더듬는 그는 마치 일생일대의 거대한 발견을 한 것처럼 침까지 튀기며 소리쳤다.
“어서!!”
그런 그의 뒷목을 내리친 건 다름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간다브 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할파스 경이 좀 많이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아뇨. 장인이면 그럴 만도 하죠.”
“그래도…….”
“다만. 다음엔 조심하라 일러주세요.”
담담하게 말한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든 건 어찌 되었습니까?”
“보시다시피…… 길을 뚫는 데엔 실패했습니다.”
나는 말 없이 다가가 단상 위에 놓인 검을 바라보았다.
나쁘진 않다.
지금까지 봐온 장인 중에선 사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야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벽을 넘지 못했고, 가장 큰 잠재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여튼 성질머리하곤…….”
그렇게 중얼거린 내가 에반젤린을 부른 뒤 그녀가 가진 검을 단상 위에 올려놓았다.
치이이이잉!!
동시에 빛과 함께 거대한 마지막 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반원형태의 공동이 모두를 맞이했다.
다만 발광석들이 주기적인 형태로 꽂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내부를 비춰주고 있었다.
물론,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생각보다 큰 공간이나 발광석 때문이 아니었다.
벽면에 걸린 수많은 무구와 방어구, 그 외에 여러 도구들이었다.
딱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하나같이 할파스가 살리반 황제에게 선물했던 미스릴 검 이상의 성능을 지닌 무기들이었다.
대륙의 평균을 생각하면 이건 엄청난 보물을 찾은 격이었다.
마치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으라는 듯 널려있는 장비들을 보며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뛰어들어갔다.
“자…… 잠시 기다리게! 함정 여부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게나!”
간다브 경이 급히 소리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함정은 없어요. 그냥 손대도 될 겁니다.”
“데이비 왕자님?”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저것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소립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것들.”
짧게 침묵한 나는 가차 없는 평을 내렸다.
“전부 실패작이에요.”
* * *
실패작이다.
수르트의 이름을 달고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무구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순차적으로 놓아두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계적인 실패작.”
“단계적인 실패작이요?”
“예. 천천히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변화를 준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야장이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기연이겠네요.”
물론, 시험이 요구한 검은 칼디라스 같은 어마어마한 검이 아니었다.
단순히 혼을 담을 수 있게 되는 경지를 뜻하는 것뿐이니까.
그런 정도 수준의 야장이라면 이곳의 검들을 보고 수르트가 쌓아온 수많은 실패작들을 되짚어 엄청난 실력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수르트는 후대에 찾아올 후배를 위해 나름대로 안배를 해둔 것이었다.
“세상에…… 초짜인 제가 봐도 하나같이 대단한 무기들인데…….”
“원래 보기에 따라 다른 겁니다.”
“찾았습니다!”
그때 야장 중 한 명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검 한 자루를 가지고 간다브 경과 아인츠 백작에게 다가왔다.
“그게 예의 그 역작이오?”
“예, 그림과 똑같은 검입니다.”
“아. 그건 제법 쓸만하네요. 혼이 담긴 무기에요.”
내 설명에 야장이 눈을 번쩍거렸다.
“단순히 보시는 것으로도 아시는 겁니까?!”
“이건 마법사라면 다 아는 거라…….”
내 대답에 간다브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안 보이는데요.”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오가던 도중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던 순간.
저 뒤에서 기절해있던 할파스 경이 눈을 부릅뜨며 엉기적엉기적 기어왔다.
그는 수르트의 작품들이 보관된 곳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에반젤린에게 기어오며 말했다.
“거…… 검을 보여주…….”
“와…… 이 양반 지독하네.”
질렸다는 표정으로 내가 그를 보자 그는 열망으로 가득한 눈으로 내게 소리쳤다.
“한 번이면 되오! 잠깐이면 되오!”
뭔가 절박해 보일 정도의 그 시선에 결국 에반젤린이 우물쭈물하다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 아주 잠깐이에요!”
“아…… 아아! 고맙네! 정말 고맙네!”
그리고 이내 검을 받아 트와일라잇을 천천히 뽑아 든 그가 주변에서 후려쳐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듯 검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아…… 아아…… 놀랍구나…… 금속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금속 자체에 영혼이 담긴 느낌이야. 게다가 기존의 공정방식을 버렸음에도 이 유려한 곡선, 아름다운 표면…… 게다가 내부에 있는…… 아아!! 내가 만든 것들은 전부 쓰레기였어!”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실 겉보기엔 트와일라잇은 단순히 단단하고 예쁜 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에반젤린이 들었을 때 진가가 드러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일까.
검에 담긴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혼을 담는 경지를 느끼기 직전인 야장들이 간혹 보이는 증상이다.
사실 다른 야장들은 독특한 단조방식에 놀라워했던 것이지 그 내부의 혼이 담긴 결은 보지 못했다.
특별한 마법적 처리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트와일라잇이 지닌 힘은 드래곤이 아니면 사실상 무 옵션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결국, 그 외에 남은 건 헬릭시윰의 고유 특성인 파괴 불가 능력과 형태 변환 능력이 전부였다.
본래 형태변환능력도 없을 예정이었으나 신력이 부여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그게 보입니까?”
“예? 아…… 아아 이상하군요. 겉보기엔 단순히 아름다운 검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밸런스가 잘 맞고 형태가 단단하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느끼시는 거죠.”
“…….”
“그걸 어렴풋이 눈치챘다면 당신은 벽을 넘어설 준비가 된 겁니다.”
갈 길은 멀지만, 대부분의 야장들은 이 경지를 넘지 못한다.
내 말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벽을…… 벽을 넘어설…….”
“네. 무기에 혼을 담는 경지죠. 솔직히 천일야장 정도로 혼을 담아내기엔 아직 한참 멀었지만.”
“당신은…… 혼을 담아낼 수 있소?”
“저요?”
피식 웃으며 내가 그를 지나쳤다.
“저도 신검 같은 자아를 지닌 검은 못 만듭니다.”
대신.
“저는 저만의 단조방식이 있거든요. 저 트와일라잇, 솔직히 말해서 신검에 비해 마냥 꿀리진 않을 겁니다.”
아니. 정확히는 에반젤린에게 가장 어울리며 에반젤린이 칼디라스와 트와일라잇을 들었을 때 오히려 트와일라잇이 그녀에게 더 잘 맞을 것이다.
수르트의 경지는 나조차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있지만, 역으로 수르트가 이루지 못하는 다른 방식의 단조방식을 나는 터득했다.
그게 마법을 배운 내가 가진 메리트였으니 말이다.
“바…… 받으시오. 내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겠소. 실력이 없는 자가 공방에 들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건만. 오히려 오만한 건 나였군…….”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말끝을 흐리는 그가 대답을 피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소리였다.
“자 일단 미궁 돌파는 끝났으니 어서 이곳의 유산을 가지고 복귀하도록 합시다.”
괜스레 무거워진 분위기를 해소하려는지 아인츠 백작이 손뼉을 쳤다.
“안 그래도 지금 반란을 일으킨 이들에 대한 처분으로 황실이 정신없을 겁니다. 어서 돌아가서 폐하의 손을 거들어야지요.”
“으잉?! 반란?! 어떤 놈이 감히 반란을 일으켰단 말이오!”
그제야 놀란 할파스가 격하게 소리 질렀다.
그 난리가 났는데도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으니 몰라도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가보면 압니다. 어서 나갑시다. 할파스 경.”
그렇게 조사대가 빠른 철수를 준비한다.
그동안 나는 공동을 지켜보던 중 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 어서 가서 의뢰해요! 저 이 검을 엄청 써보고 싶어요!”
에반젤린이 신이 난 듯 소리쳤다.
그때 나는 묘한 기시감이 드는 공동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에반젤린.”
“네?”
“저거 해치워볼래?”
내가 벽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좀 전까지만 해도 없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어라? 저게 무슨 구멍…….”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구멍이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고 그대로 나를 집어 삼켜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나를 한입에 집어삼킨 것은 마법으로 강화된 거대한 샌드웜.
보통 인간이라면 전신이 이빨에 찔려 구멍투성이가 되어야 하건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근잘근 씹히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샌드웜에게 먹히는 것도 헤라클래스가 지하에 던져넣은 이후로 오랜만이네. 그런데 왜 이곳에 강화 샌드웜이 있는 거지? 이건 보통 드래곤들이 자기 보고를 지킬 때 가져다 놓는 가디언인데.”
온몸을 잘근잘근 씹히면서도 나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아 거 좀 시원하게 물어봐. 이래야 자연 샌드웜보다 이가 약해.”
나는 가루처럼 바스러진 놈의 치아를 회복시켜주며 느긋하게 누워 기다렸다.
* * *
에이리아 알 린디스.
데이비의 부인이자 나인테일 종족, 그리고 린디스 제국의 황녀 출신인 그녀는 요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일리나를 따라 게임에 손을 댔다가. 친한 친구를 사귄 것이다.
처음 사귀어보는 격식 없는 친구라는 존재에 그녀는 금방 매료되었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금방 친해졌다.
상대도 에이리아와 같은 나이로 아직 미성년자지만 제법 말이 잘 통하는 친구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조금 소심한 성격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에이리아 또한 마찬가지인 것을.
“에이리아. 오늘 가는 거야?”
“네! 언니!”
일리나가 그녀의 머리를 손질해주며 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따라가 줄까?”
“아녜요 괜찮은걸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뿐인데.”
“흐음…… 페르 언니. 그래도 좀 걱정되지 않아요?”
“과보호는 좋지 않아.”
일리나와는 별개로 소설에 푹 빠져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페르세르크가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그래도 파리가 꼬일지 모르니 조심해야 해.”
“네에~”
옅게 웃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구로 놀러 온 세 사람답게 그들은 지구에 맞는 의상을 입고 자신들이 티오니스 사람이라는 티를 최대한 숨겼다.
청록색 머리칼은 티가 나지 않게 마법으로 염색했고, 귀나 꼬리도 마법을 통해 숨겼다.
“다리안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재밌게 놀고 와.”
“네!”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고 했던가.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백을 손에 쥐고 총총 걸어 약속장소로 걸어 나갔다.
조금 어둑하긴 하지만 잠깐 만나 이야기나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야. 내 말이 우습냐? x년아?”
퍽!!
약속장소에 다가왔을 때 즈음. 에이리아는 예리한 청각에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 미안해! 하지만 오늘은 제발 그냥 가줘!”
“하. 이년 웃긴다. 그치?”
퍽!! 퍽!!
묵직한 타격음이 들려오자 에이리아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다가갔다. 직감이란 때때로 무서운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