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4화
이번엔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다.
천갈궁 스콜피오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감히 별자리의 존재를 한낱 인간이 부린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가 데리고 있던 금발의 작은 인간 소녀는 그의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인간이 아니다.
그녀에게선 독특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어떤 힘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역겹기 그지없군.”
황금빛 사슬이 더욱더 강하게 움직이며 금우궁 타우르스와 대족장 쓰를 묶었다.
“타우르스. 네놈이 여기 있다는 건 조금 놀랍지만. 생각보다 별거 없구나.”
정확히 말해서 금우궁 타우르스는 상성 면에서 천갈궁 스콜피오에게 굉장히 불리한 편이었다.
그가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의아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여기서 방해가 되는 이들을 모두 해치우고 난 뒤 그다음은 본래 목적인 그 소녀를 회수하면 되는 일이다.
“크윽! 단단하군!”
대족장 쓰가 인상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고 기합을 터뜨린다.
하지만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사라진 천갈궁의 사슬은 도저히 힘으로 끊어낼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 사슬은 힘으로 끊을 수 있는 부류의 물질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사슬을 잡아당기는 타우르스를 올려다본 천갈궁이 씨익 웃었다.
“난 평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타우르스.”
촤르르르르륵!!! 사슬을 더욱 압박하며 저항하는 타우르스를 향해 다가간 천갈궁이 거무튀튀한 전갈 꼬리를 구현해냈다.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진 말…….”
촤르르르르륵 채애앵!!!
그때였다.
대족장 쓰와 금우궁 타우르스를 끝내려던 천갈궁 스콜피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돌아서며 손을 뻗은 것이다
그곳에는 엄청난 근육을 지닌 붉은 눈동자의 토끼가 그에게 주먹을 내지르다 사슬에 묶여 있었다.
새하얀 토끼의 등장.
그 모습에 대족장 쓰와 금우궁 타우르스가 움찔거렸고, 천갈궁 스콜피오는 무언가 굉장한 트라우마를 자극당한 것처럼 잔뜩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네놈이구나.”
뀨.
콩알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힘으로 사슬을 끌어당기는 그를 향해 스콜피오가 차갑게 웃었다.
“하! 힘으로 당긴다고 끊어질 리가 있나. 이전에 잠깐 놀아준 것으로 쓸데없이 자신감만 붙은 모양이군.”
절대 끊을 수 없다.
물리력에 한해선 절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내성을 지니고 있는 게 바로 이 사슬이었으니 말이다.
“잘됐군. 꼴 보기 싫은 금우궁이나 내게 두 번이나 덤벼든 네놈 모두 한꺼번에 녹여 주지.”
그가 손끝을 뻗어 비틀자 손가락 끝에서 보랏빛 액체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주변의 대지가 일그러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갈궁의 두 번째 힘. 바로 극독이었다.
“이런!”
대족장 쓰가 당황하며 버둥거리지만 사슬은 더욱더 그의 사지를 강하게 결박했다.
그때였다.
고요해진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천갈궁 스콜피오는 문득 새하얀 괴물 토끼와 금우궁 타우르스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극독이 자신들의 근처까지 왔음에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서로를 노려보는 듯 가만히 있던 도중 갑작스레 괴이한 토끼. 보팔레빗이 전신의 터질 듯한 근육에 핏줄을 일으켰다.
끄그그그그극!!!
동시에 좀 전까지 단단하게 포박하고 있던 온전한 사슬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
이에 놀란 천갈궁이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인간의 육신에 들어가 있어서 제힘을 전부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사슬의 강도는 절대 물리적으로 끊을 수 없다.
이전 놈이 끊은 사슬과는 격이 다른 온전한 사슬이었으니까.
하지만 본능이 외친다.
저거…….
끊어진다!
와장창!!!!
동시에 보팔레빗을 포박하던 사슬이 끊어졌고 보팔레빗은 망설임 없이 이두박근을 불끈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뀨.
동시에 보팔레빗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린다.
문제는 그 웃음이 천갈궁을 향한 웃음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금우궁 타우르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그그그그극!!!
기괴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사슬이 끊어지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천갈궁이 비명을 내질렀다.
“말도 안 돼!!”
콰창!!!!
마치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듯 금우궁 타우르스조차 무식한 힘으로 사슬을 끊어 버린다.
그리고는 모스큘라 자세를 대뜸 취하며 토끼를 바라보았다.
이후 이 무식한 근육쟁이들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갔고.
콰앙!!!
서로의 오른손을 마주 잡으며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를 인정한 듯한 그 모습이었다.
“이…… 이 무식한 놈들이!!”
이에 당황한 천갈궁이 중얼거렸다.
뭔가 잘못됐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별자리인 자신의 힘을 탈출하다니.
타우르스는 같은 별자리라 해도 상성 면에서. 새하얀 토끼는 그 힘의 총량에서 자신에게 분명히 밀렸다.
한데 둘다 자신의 사슬을 끊어낸 것이다.
경악한 그를 향해 손가락을 뚜둑 꺾으며 다가온 두 기괴한 근육 괴물들은 이내 서로를 보더니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 천갈궁은 볼 수 있었다.
금우궁 타우르스의 가호가 새하얀 토끼에게 스며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새하얀 토끼에게서 흘러나온 어떤 힘이 현신하며 약해진 금우궁의 힘을 일부분 되찾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대상에게 나와 비슷하게 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거든.]
실제로 보팔레빗은 마계에서 마족들 중 일부를 그와 비슷한 몰골로 만든 적이 있지만 천갈궁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이 미친놈들이 서로에게 자신의 힘을 부여해 한계를 넘어서는 괴이한 짓을 저질렀다.
본래라면 절대 만날 수 없는 고대 마수와 힘이 약화된 별자리가 서로를 보완한 것이다.
아무리 상성이 좋아도 저 정도로 힘을 찾아 버린 금우궁이라면…….
“빌어먹을!!”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지만…….
이미 그의 양팔은 양쪽에서 두터운 손으로 낚아챈 새하얀 토끼와 금우궁에 의해 단단히 붙잡힌 후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시너지는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다!!!”
비명을 지르는 그를 향해 금우궁 타우르스의 주먹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날아들었다.
별자리 중 전갈자리가 빛을 잃기 시작한다.
에반젤린을 노린 천갈궁의 습격은 어처구니 없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두 근육덩어리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 * *
“당신의 수준을 예상했어도 직접 보니 할 말이 없네요.”
막대한 여파에 노출되었던 로키가 비틀거렸다.
별자리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마나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의 힘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땐 정말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다시 없을 천재 중 하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재능 자체는 뛰어났다.
게다가 단순 재능만으로 올린 경지도 아니었다. 아마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정말 엄청난 노력을 했으리라.
그렇기에 저렇게 미친 발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 같은 존재라면 모르지 않을 텐데요. 이 세상은 수많은 불합리로 가득합니다. 아트렐리아만 해도 그렇지요. 마법 재능이 뛰어난 이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자라게 됩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아이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커 가게 되겠지요.”
후에 커서도 그 카스트제도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된 건…….”
그 같은 계급제를 만들어낸 원흉은 마나니까.
“과거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던 오딘은 그런 불합리에 맞서기 위해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그게…….”
“우로보로스라고?”
“잘 알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그녀의 제자라고 그녀에게 들었습니다. 한데 왜 방해하는 겁니까.”
그가 피를 울컥 토해낸 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후우, 제안하겠습니다. 마나가 없다 하여 인간이 죽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몬스터들은 마나를 통해 생겨나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압도적으로 강한 몬스터들. 그들은 마나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줄어들고, 어느새 사라질 겁니다.”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세계를 구한 적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 같은 행동을…….”
서걱!!
내게 뻗은 그의 팔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떨어져 나간 것이다.
동시에 섬광처럼 날아든 내가 왼손에는 잔불을 들고 오른손으로 전신이 압박된 놈의 안대를 붙잡았다.
“우선 착각하는 것 같아서 먼저 말해 두지만.”
마나가 존재하기에.
이형의 비물리 법칙이 존재하기에.
“생명체가 살고 차원이 유지되는 거다.”
이놈은 근본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든 마법 학문의 법칙을 조사해도 절대 그런 결론에는 이를 수가…….”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기존의 법칙을 아무리 연구해 봐도 그 학설이 틀리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진실이 그런 것을 어쩌리요.
“그러니까. 정말 궁금하면, 직접 한번 봐라.”
그 말과 함께 나는 놈의 안대를 완전히 벗겨냈다.
동시에 흰자위가 있어야 할 부분이 검고, 동공이 있어야 할 부분이 새하얗게 일렁이고 있는 기괴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오딘의 눈과 다르게 불안정하기 그지없다.
“크윽?!”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는 안대가 강제로 개방 당하면서 눈이 세상을 담기 시작하자 막대한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오딘과 다르게 이놈은 자신의 눈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가 가진 눈은 오딘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방식은 비슷하다.
세상의 진리와 연결되는 문.
예전에 그녀의 그 눈을 두고 진리의 눈깔이라고 웃어 댔다가 죽도록 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눈은 오딘이 반신급 이상의 위계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며. 그렇게 포기했음에도 그녀가 타나토스 같은 신에게 극도로 치명적인 힘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타나토스나 넬타리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그녀는 아주 조금, 아주 극히 드물게 눈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연결을 차단시켜도 그녀와 로키의 눈은 끊임없이 세상의 진리에 연결되려 하기 때문에 오딘은 특수한 안대를 만들어 자신의 눈과 세상을 차단시켰다.
물론, 로키의 눈은 불완전하기에 준비 없이 제대로 연결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나는 이미 프리아 여신에게서 다량의 권능을 받아 보유하고 있다.
비록 사용할 수 없는 권능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주입식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줄게.”
나는 신격을 모조리 끌어올려 놈의 흑안을 모조리 강제 활성화시킨 뒤 링크시켰다.
세상의 진리.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파괴될 것 같은 숨겨진 기원을 모조리 받아내기 시작했다.
나와 그에게 동시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어떤 기원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난다.
신격으로 영혼을 보호한 나는 육신만 부서졌고,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그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영혼과 육신 전체가 부서져 내렸다.
-그아아아아악!! 이건…… 이게 뭐야!!
경악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나는 더욱더 그를 강하게 압박하며 말했다.
“뭐긴 뭐야. 네가 그토록 바라던 창세의 기원이고, 창세신의 경지지.”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숨겨진 모든 법칙을 고작 네깟 게 감당 가능할 거라 생각했나.
-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정말로 굉장히 달콤한 과실 같은 말이다.
신.
듣기만 해도 광오한 이름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뭐든지 이뤄낼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존재가 착각하는 것이며 대부분의 존재가 잘못 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좋은 점만 보고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 외의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막대한 힘을 얻는 대가로 잃어야 할 것. 그 기회 비용으로 제공해야 할 것들이 뭔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자의 최후는 꽤 명백했다.
-아악!! 안 돼! 안 돼!!!
처참한 비명과 함께 그의 영혼이 부서지고, 신격까지 두른 내 육신도 부서져 내렸다.
로키 데반.
그는 분명 모종의 갖은 수단을 써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여러 방법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이 살아도 영혼이 분해되어 버린다면 부활은 의미가 없다.
그는 그대로 무너져 영혼인 채로 바스러졌고.
나 또한 상당한 부하로 육신이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스르르르르륵!!
내가 왼손에 쥐고 있던 잔불이 부서지던 내 육신을 강제로 복구시킨다.
그리고.
로키의 영혼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을 때.
나는 비틀거리며 내 육신을 완전히 복구시켰다.
“미친 짓이지 진짜.”
짧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일어난 내 곁으로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찡그린 채 노려본다.
좀 전까지 탑 안에 있던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온 이유는 간단했다.
오딘과 만났고, 그녀를 저지하려다가 역으로 당해서 튕겨 나온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이미 넝마가 되어 있었다.
오딘의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닌. 오딘의 의식 결계를 부수다가 그 반탄력에 당한 것이다.
“굳이 그대가 죽을 이유는 없었어.”
“그래 보여?”
“다시는 그런 자학을 하지 말아. 그대의 육신을 일부러 부수지 않고서도 해결이 가능했을 텐데.”
단단히 화가 난 듯 말하는 그녀를 향해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잔불은 사실 이놈 때문에 쓴 게 아니야.”
내가 신격을 이용해 로키의 흑안을 세상의 진리와 강제로 커넥팅 시켰을 때. 나는 얼마든지 그 부작용을 내게 오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꿎은 잔불을 써 가면서까지 일부러 로키가 흑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의 일부를 내게 받아들였다.
“세상에는 말이야. 받아들이기 정말로 힘들지만 어떤 방식이든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하기만 하면 막대한 힘을 부릴 수 있는 법칙도 존재하거든.”
존재 인지가 불가능한 법칙을 강제로 받아들인 결과. 내 육신은 한 번 부서졌지만.
이것으로 오딘과 정면 승부수를 띄워도 될 만큼의 어떤 힘을 아주 잠깐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프리아 여신도 가지고 있으나 그녀의 위계 때문에 한 번도 사용된 바 없는 창세의 진리.
하지만 나는 위계 같은 문제도 전혀 거리낄 게 없이 이것을 사용할 수 있다.
프리아 여신님.
당신 법칙 쩔더라.
나는 아주 일부지만 내 영혼에 각인된 어떤 일부의 법칙이 가져오는 힘을 손에 머금었다.
타나토스를 달로 만들 때 이후로 더 무식한 힘을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흑안과 잔불로 이런 꼼수를 쓰게 되리라는 걸 프리아 여신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