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7화
“후우…….”
“언니,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거라…….”
걱정 말라고 대답했지만, 페르세르크의 표정은 묘하게 복잡한 심리를 머금고 있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 아닌가요? 데이비 오라버니가 오시기 전에 간단히 진찰이라도 한번 받아보시는 게…….”
“데이비가 준 선물이 맛이 좋다 보니 조금 체한 모양이구나.”
가슴께를 콩콩 두드리며 그녀가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이리아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건 체한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간단히 말하자면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몸에 안 좋은 반응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상당히 거슬리는 느낌.
‘혹, 데이비가 본녀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건 아닐 테지.’
일단은 데이비에 대한 신뢰가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데이비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아는 만큼 그녀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아니, 데이비이기에 그냥 넘겨줄 것에도 무언가를 숨겼을지도 모를 일이지. 암, 그 녀석이라면 더욱 합리적이구나.’
하지만 데이비가 굳이 그녀에게 나쁜 것을 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기분이 든다.
표현하자면…….
짜증이 살살 솟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좀 전부터 미묘한 통증이 가슴께에서 복부로 살살 내려가고 있다.
“언니? 아무리 봐도 조금 불편해 보이시는데.”
“괜찮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래도!”
평소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하는 페르세르크 때문일까.
에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짓자 페르세르크도 앗차 하는 표정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구나. 조금 컨디션이 안 좋은 모양이니 쉬어야겠어.”
그녀는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그녀였다.
* * *
270기 막내 견습 기사들은 현재 죽을 맛이었다.
“젠장!! 젠장 도망쳐!”
“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불끈거리며 터질 것 같은 새하얀 근육질의 토끼 수십 마리에게 깔린 채 팔을 뻗어 도와달라 외치는 마법사 소녀를 두고 270기 견습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도망쳤다.
토끼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토끼 군단을 피해 도망친 한 견습 기사는 한참을 내달리고 나서야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숲속에 자신이 홀로 내던져졌음을 깨달았다.
“하아…… 하아…….”
극한의 공포가 그를 엄습해왔다.
기본적으로 닿는 차가운 공기와는 다른 알 수 없는 싸늘한 한기와 섬뜩할 정도의 싸늘한 분위기에 그는 숨이 점차 거칠어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멈췄다간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있던가.
자신의 힘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선배들과 모의전략전을 자주 했고 선생님들의 수업도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그를 극한으로 내몬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실제상황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공포.
268기 선배들은, 괴물들이었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한 손에 쥔 횃불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점점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그때였다.
“불……불빛!!”
동기 견습 기사들과 어떻게든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어떻게든 제 동기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둘이 혼자보단 덜 두려울 테니까.
그런 마당에 숲 저편에서 갑자기 불빛이 보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든 하늘은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하아! 하아! 하아!”
자신의 페이스도 잃어버린 채 미친 듯이 내달린 그는 곧이어 나무에 걸린 등불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분명 자신들의 동기가 가지고 있을 등불이 맞다.
하지만 그토록 찾아 헤맨 동기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여기 뭐냐고!”
이런 숲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단 말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횃불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나와!! 나오라고!! 당장 나와!!!”
격하게 소리 질러보지만, 등불은 고요히 놓여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를 불러들였던 등불이 지직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분해되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휘이이잉…….
차디찬 바람이 그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툭.
그리고, 그의 앞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작은 나뭇가지였다.
“뭐야…….”
바람이 불어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중 그는 문득 숲속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고개를 기괴한 각도로 꺾은 채 서 있는 어떤 인간의 모습이었다.
침묵이 오간다. 싸늘한 바람 속에서 견습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색빛의 깡마른 피부에 기괴한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는 마치 동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건 살아있다! 본능적으로 느낀 그는 도망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움직였다간 저게 당장이라도 쫓아올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점차 숨이 거칠어져 가던 찰나.
그가 살짝 뺀 발이 조금 전 날아온 나뭇가지를 밟고 바스락 소리를 냈다.
“흡!”
눈을 부릅 뜬 그가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그 괴형체는 견습 기사와 눈을 마주친 후였다.
그렇게 잠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견습 기사 판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한발. 또 한발 물러났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그를 이끈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회색의 인간이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끄우우우우어어어어어어!!!
섬뜩한 소리를 냄과 동시에 녀석의 입이 세로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함이 그를 지배했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밴시나 망령형 몬스터를 보고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없다.
마물과 싸워 기사단을 지키는 숭고한 기사가 괴물을 대상으로 도망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괴성을 내지르는 괴물이 이윽고 뒤틀린다.
끔찍한 형태로 변하더니 이내 수십 가닥의 촉수들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져 내렸고 스르륵 몸으로 끌려가더니 다시 펄떡펄떡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그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무조건 저것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서…… 기사단에 알려야 한다! 저건 훈련에서 본 것들이 아니었다.
저건, 엄연히 실전이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내달렸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그 촉수 괴물이 아니었다.
숲 저편에서 보이는 또 다른 등불 때문이었다.
한번 당한 게 있기에 또 속진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이번엔 속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동기가 아니다.
그의 시야에 비친 것은 반대편으로 향해있는 어떤 흔들의자와.
그 흔들의자에 앉아 기괴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떤 엘프였다.
그래. 엘프.
있을 리 없는 엘프가 청아하지만 묘하게 섬뜩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린 엘프의 눈이 분홍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소리를 질렀다.
“으그아아아아악!!!”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답지만 섬뜩할 정도로 감정이 없어 보이는 표정을 한 그녀가 고개를 돌린 채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움직인다.
머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는 듯한 느낌이 들며 그녀의 뒤로 시커먼 무언가가 스르륵 일어났다.
도망쳐야 한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등 뒤에 포근한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상대가 뭔지 깨달은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와들와들 떨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고개를 기이하게 꺾은 채 분홍빛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엘프, 에나벨을.
같.이.놀.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머리카락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으…… 으으…… 으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디셉티콘과 다르게 비밀리에 움직이는 어벤저 편대. 메라몽과 에나벨의 합류. 그리고 미치광이 근육쟁이들의 사냥 같은 훈련은 계속되었다.
270기 동기들에게 있어서 지금 이건 모의 전략전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했으니까.
거대한 톱과 드릴을 들고 돌진해오는 거대한 금속 골렘을 보고 겁에 질린 견습 기사.
새하얀 토끼에게 둘러싸여 패닉에 빠진 견습 기사.
그들에게서 도망치다 에나벨과 메라몽이 장악한 검은 숲에 발을 들여놓은 견습 기사.
운 좋게 검은 숲에 들어서진 않았지만, 별자리인 타우르스를 놔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도깨비 두억시니의 끔찍한 환영에 빠져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견습 기사까지.
어렵게 그들을 벗어나 이 지옥을 끝내기 위해 코어를 만지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자리인 금우궁 타우르스라는 존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270기 견습 기사들은 침대에 누운 채 모두가 끙끙 앓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이제…… 그만하고 싶어.”
진실을 알아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공포라는 게 있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 깨달았던 모양이다.
“야…… 얘들 괜찮은 거 맞아?”
“어째 상태가 좀…….”
선배들이 기겁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270기 기수들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놓은 채 침대에 누워 끙끙 앓는 것이 보는 것조차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들에게 270기는 말도 안 듣고 위계질서도 엉망으로 만드는 놈들이지만 지금은 측은지심이 강하게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얘들 괜찮은 거 맞아? 우리도 오랜만에 스트레스나 풀 겸 좀 과하긴 했는데…….”
“금방 일어날 거다.”
그리고는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부딪혔다.
[웨이크]
그러자.
“흐업?!”
“컥!?”
갑자기 강제로 기상 당한 것처럼 막내 견습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실력에 심취해서 선배 보기를 뭣 같이 하던 놈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 과한 터라 이게 무슨 공정한 모의전이냐면서 대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서……선배!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효과는 굉장했다!
“본래 너희의 몸 상태를 진단해줄 선생님이 너희에 관한 건 내게 위임하셨다. 의원으로서의 소견을 말하자면 지금 너희 몸은 아마 멀쩡할 거다.”
그 말에 270기 막내 견습 기사 녀석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린다.
“참고로 너희 선배들은 이 모의전을 전부 이겨냈다.”
물론 꽤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말에 270기 녀석들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마……말도 안 돼…….”
“어떻게…….”
“아 물론, 그 근육쟁이 놈들은 조금 예외긴 하지만 별 차이는 없네.”
처음부터 녀석들에게 힌트를 계속해서 던져주었으니까.
“선배들이 너희들을 몰아넣으면서 계속해서 모의전략전에서 이길 방법에 대한 힌트를 제공했다. 그걸 알아내지 못한 건 너희들이야.”
애초에 이기는 건 관심 밖의 일. 선배들이 후배 기수와 모의전략전을 하는 것은 후배 기수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
“아직. 너희 선배들이 우습게 보이나?”
“그건…….”
쉽게 답하지 못하는 270기 팀장 바루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 다음 훈련으로 넘어가자.”
“으……으아아아악!! 자,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 테니 제발 용서해주세요!!”
비명을 지르는 녀석들은 당장 다음 훈련에 들어갈까 기겁하며 모여들었고 모여들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걸 보니 효과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고개를 돌려 266기 선배들을 보자 그들은 사람이 좋은 건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에 그 미소를 본 270기 녀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 그 순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들, 그 정도면 됩니까?”
“응, 그래.”
예쁘게 웃는 여성 마법사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훈련은 앞으로 3번만 더한다. 걱정 마라. 죽이진 않으마.”
270기 견습 기사들의 얼굴이 검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 * *
270기 막내 견습 기사 녀석들이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한 채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기사단장들을 만나러 갔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들.”
“어서 와. 데이비. 그새 더 멋있어졌구나.”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이아니스 단장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를 보자 하신 용건은 뭡니까?”
“사실. 넌 대륙 내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 굳이 널 현장에 투입시키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기사단장들의 표정이 심상찮다.
“어떤 균열을 발견했거든.”
균열이라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균열이요?”
“그래. 다만 간혹 보이는 뒤틀린 균열과 다르게 이번 건…… 조금 형태가 달라.”
형태가 다른 균열 그 말을 듣자마자 어째서인지 한가지가 떠올랐다.
차라리 감이 좋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사가 완전히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대, 기사단내에서 가장 위험한 균열로 치부되는 마굴이라는 것과 흡사하다고 보고 있어.”
마굴. 그 이름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몬스터 여왕 페르세포나가 빨려 들어갔던 곳이고, 과거 몬스터의 근원이었던 균열이었으니 말이다.
“마굴이라…… 그거에 대해 잘 아시는 겁니까?”
“아니. 현재로선 정황상 마굴이라는 기사단 비서고에 기록된 최악의 균열이라는 것까지만 추측할 뿐이야.
그거면 충분했다.
“그거. 제가 한번 가서 보겠습니다.”
지구의 균열을 한번 해방한 것 때문에 티오니스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내가 처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