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6화
“네겐 어떤 말을 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괜찮아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페르세포나를 바라보며 한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디 우리를 용서치 마라.”
“제 한 몸 희생해서 그녀와 세상 전부를 구원할 수 있다면. 거부하지 않아요.”
“그녀에겐 우리가 너를 이곳에 밀어 넣었다고 알릴 것이다.”
“이미 우리는 신념을 위해 한솥밥을 먹은 이들을 배신했으니 업을 하나 더 쌓는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
“…….”
페르세포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릴 절대 용서치 마라.”
다수의 기사들을 뒤로한 채 그녀는 균열로 이루어진 검은 세상.
지옥의 밑바닥이자 끝없는 나락인 [헬].
마굴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그녀의 기억은 잠시 끝을 맺었다.
* * *
일그러진 갑옷 속에 요시키의 육신이 보인다.
겉보기엔 요시키 그가 맞지만. 현재 그는 내부에 수많은 기사의 사념을 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미쳐버린 놈들로 말이다.
페르세포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프네는 롱기누스의 둔기 부분을 이용해 그를 더욱 압박했다.
“무슨 사정이 있건 그건 내 알바가 아닌데.”
터어엉!!!
“중요한 건 얘들이 지금 미쳐있다는 거잖아.”
“…….”
“게다가 널 이곳에 내던진 배신자 놈들 아냐?”
그 말에 페르세포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건…….”
“그럼 말 다했네.”
다프네가 다시 끝장내려 하자 그녀가 손을 뻗었다.
“잠깐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어!
“그딴 건 모르겠고.”
그녀가 끝장내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마치 수면에 파장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뭐야, 이건.”
그 파장 속에서 검은 손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오며 나와 다프네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은…… 반드시…… 그녀뿐이다!
다 죽어가던 놈의 괴성과 함께 주변 공간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곳은 마굴, 즉 헬과 중간계의 경계지점. 그렇기에 부서지면 어느 쪽이든 가까운 곳으로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다.
“데이비! 저거 지켜.”
콰드드드득!!!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듯한 크기를 지닌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이 나락의 끝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없는 지옥에서 끊임없이 뒤틀려버린 것들의 정수.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의도하지 않은 재앙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체였다.
“한때는 인류 수호의 기사라던 놈들이.”
“다프네.”
열이 받은 듯한 다프네를 제지한 나는 고개를 까딱여 그녀의 시선을 페르세포나에게 보냈다.
“1초라도 더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다프네는 말없이 눈동자를 노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이 중간지점이나 다름없는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다프네를 포함한 이들을 중간계 쪽으로 날려 보냈다.
“여왕의 위를 양도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잘 지켜줘.”
내 말에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순수한 질문을 던지는 그녀에게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잘 해결하고 오면 선물 줄게.”
과감하게 키스를 하고는 물러나며 배시시 웃는 그녀였다.
이윽고 방해가 되는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
바닥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검은 눈동자는 엄밀히 말하면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쌓아온 어마어마한 힘의 집합체이자 정신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심연에 비하면 진짜 별거 없긴 하다만.”
심연에 비교하면 침식력도 간섭력도 떨어지지만 여러 부분에서 헤라클래스가 완전히 파괴해버린 심연과 흡사한 감이 없잖아 있다.
타나토스는 이 헬을 기반으로 심연을 만든 게 아닐까.
거대한 정신체를 제거하기 위해 나락의 끝에 있는 놈과 정신 연결을 시도하려던 찰나였다.
쓰러져 있던 요시키. 아니. 기사들의 육신의 몸에서 검보랏빛의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알아서 나와주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거대한 정신체가 검보랏빛의 가루로 흩어지며 그 육신에 천천히 모여들 듯 스며들기 시작했다.
팔, 다리, 머리 몸통까지.
마치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하나에 모으기라도 하는 것처럼 힘이 응축되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일그러졌던 요시키의 갑옷이 변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일그러진 갑옷이 말끔하게 변하며 마치 어디 왕국 기사단, 정확히는 라스트 위스프 기사단의 수호자와 비슷한 형식의 실용적이고 멋들어진 갑옷이었다.
츠츠츠츳…….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가 헬름의 안으로 보랏빛 안광을 번뜩이며 단검을 버리고 롱소드를 내게 겨누었다.
동시에 검보랏빛의 스파크가 모여들며 검을 보강하여 얇은 롱소드가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나를 향해 검을 겨누는 그의 모습에 나는 홍단이와 청단이를 꺼내든 뒤 가볍게 내려 세웠다.
“이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지금까지 본 놈들과는 다른 개체라는 것을.
힘의 척도가 아니라 끈적끈적하던 다른 이들과 다르게 꽤 깔끔하고 정갈했다.
그러고 보니…….
“배신자 중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놈이 하나 있었다고 했는데.”
내 중얼거림에 스파크가 튀는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가 처음으로 내게 말했다.
-이름 따윈 없다.
“…….”
-지키다가 미쳐간 자일 뿐.
그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더는 대화가 필요 없음을 깨달은 나는 이내 기수식을 잡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피차 말씨름할 이유가 없긴 하지. 그럼 어디 와봐라.”
그 말과 함께.
그가 검을 품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검 끝을 내린 뒤 마치 돌진하듯 어마어마한 속도로 파고든다.
마스터급. 아니 그 이상.
[초중검]
[태산 쪼개기]
카아아아앙!!!
청단이를 빙그르르 돌린 뒤 놈이 휘두르는 묵직한 검에 맞춰 그대로 중검을 때려 박았다.
압도적인 중량이 서린 일검, 그것도 비 물리 법칙을 베는 청단이의 검이 놈의 스파크를 분해해버리며 롱소드와 강하게 충돌했다.
파직…… 파직!
단순히 육체능력이 아니라 검에 대한 조예가 깊은 놈이다.
그리고.
“너, 중검을 쓰는구나.”
내가 아는 선에서 칼디라스의 주인은 하레스 이후로 나온 적이 없다.
그럼 이놈은 무엇일까.
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지만, 놈은 그런 궁금증을 해결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엄청난 기동성을 보이며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카아앙!! 캉!!
“머리도 좋고. 청단이의 권능에도 저항하고.”
놈은 홍단이가 물리 법칙을 베어버리는 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놈은 내가 홍단이를 휘두르면 스파크를 일으켜 롱소드를 보호하고 반격해왔고, 청단이를 휘두르면 스파크를 지워버리고 롱소드를 휘둘러왔다.
단순 기사라고 보기엔 그 실력이 경악스러운 수준이라는 건 분명했다.
카앙!! 캉 캉!!!
굉장히 현실적인 중검이다.
비록 검신 하레스의 중검과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그 또한 중량을 다루는 검술이라는 건 분명 알 수 있었다.
“직접 칼디라스에게 배운 건 아닌 거 같고.”
콰아앙!!
다른 힘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검을 들고 중검으로 놈과 부딪힌다.
기사에 대한 예우?
상대를 봐주는 전략? 그런 게 아닌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놈은 대체 뭘까 하고.
그러면서도 나는 이놈에 대해 끊임없이 분석했다.
한번, 허초를 섞어볼까.
카가각-
나는 청단이를 역수로 틀어쥐고 그를 향해 가볍게 발을 튕겼다.
콰아앙!!
곧이어 홍단이가 휘둘러지자 스파크를 이용해 공격을 저지하려 드는 그였다.
카각!!
단순히 둘 중 하나만 공격이 들어오면 반드시 그에 맞는 것으로 대처한다.
그리고 엄청난 중량을 이용해 내 공격을 쳐낸다.
하지만 검에 대한 조예가 높다고는 하나. 역시 검신 하레스에 비하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카가가가각!
[마령검]
힘으로 내리찍는 도중에 검술을 바꿔 흘리기에 특화된 마령검으로 움직인다.
놈은 중검이 갑자기 힘을 빼고 자신을 흘려버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순식간에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빈틈에 청단이가 파고든다.
청단이의 강화된 권능인 영역 내 힘의 절단은 그에게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파고드는 것을 막을 힘은 없었다.
그그그극 카아앙!!!
그의 스파크가 일순간 전소되고, 그 틈을 파고 청단이가 놈의 어깻죽지를 강하게 관통했다가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는 그가 급히 자세를 잡으려 들지만, 그 뒤로 이미 홍단이가 파고들어 놈의 팔 한쪽을 날려버렸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잘려나간 팔을 바라보던 그가 보랏빛 안광을 번뜩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쯤 그가 내게 말했다.
-중검…… 극의.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극의. 직접 배운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중검의 의미와 이미지를 이용해 검술을 중검에 비슷하게 만들어낸 존재.
이쯤 되면 그가 검신 하레스의 후손이라는 건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검신 하레스의 자식으로 페르세르크가 있었지만, 대륙에는 분명 팔란의 후예들이 존재한다.
검신 하레스의 또 다른 자식에게서 흘러나온 핏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아, 중검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청단이와 홍단이를 충돌시킨 나는 두 검을 강제로 융합시켜 초단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고정시킨 뒤 지금까지 그가 휘두르면서 박아온 어마어마한 중량을 모조리 담았다.
“네가 내게 사용한 중량, 전부 잘 가져가마.”
[초중검 극의]
[노 네임드 킹]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중량에 그의 보랏빛 안광이 또 한차례 흔들렸다.
광기에 미쳐버렸으면서도 중검에 대한 갈망이 엿보일 지경이었다.
-고맙다.
“네가 바라는 건 구원 같은 게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낮춘 나는 그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그렇다.
“잘 가라.”
그 말과 함께 그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중검의 극의와 완성된 검신의 검술, 중검의 마지막 검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쩌억!!!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부서져 가고 있던 두 세계의 경계가 모조리 부서져 내리며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와장창!!!
그 후 초단이의 힘을 견디지 못한 그의 검이 완전히 스파크 채로 조각나버렸고, 검의 여파는 그것을 넘어 단단한 그의 갑주를 완전히 찢어발긴 뒤 육신까지 반으로 가르고 주변을 붕괴시켰다.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융합된 배신자들의 사념은 모두 그와 함께 사멸하기 시작했다.
육신의 숙주였던 요시키의 죽음은 애초에 당연한 결과였다.
마지막 방해꾼이 처리되었고, 그와 동시에 페르세포나가 중간계로 빠져나가 몬스터 여왕의 위를 모두 그 회색 괴물에게 넘겼는지 엄청난 힘의 파장이 느껴져 왔다.
부서지는 경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여파라면 대륙의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들은 모두가 느꼈으리라.
그렇게 무너져 사라져가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투구에 손을 닿았을 즈음.
그의 사념을 통해 어떤 기억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페르세포나.
그리고 그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였다.
-가지 말라 하여도 듣지 않겠다면. 내가 지켜주겠다.
-아르타 님.
-그들을 막을 명분이 내게는 없다. 명령이 없으니까. 하지만, 널 그곳으로 내던져야 한다면, 나 또한 기꺼이 그 지옥으로 몸을 던지겠다.
-당신도 배신자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순교자로 포장될 수 있지만 당신은…….
-기사에게 명예는 소중하나 맹약을 어기는 명예라면 배신자의 낙인으로도 충분하다.
미형의 젊은 남성은 조용히 페르세포나의 앞에 검을 꽂은 뒤 말했다.
-아르타 폰 팔란, 나의 마지막 충정을 그대에게 바치겠다.
미형의 사내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놈이 방금 내가 노 네임드 킹으로 베어버린 기사라는 것을.
그나저나 [폰]이라면, 페르세르크처럼 미들네임이 변형되기 전의 검신의 성이 아니던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