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3화
마족 알리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녀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전해준 뒤 돌려보냈다.
그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직접 보고 싶어 했고 나는 가능한 선에서 인간이 결국 마족과 종족특성만 다를 뿐 결국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주었다.
물론, 힘적인 면에선 마족이 조금 우세할 수 있겠지만 인간 중에서도 충분히 강자는 많은 편이니까.
뿔이 있고, 귀의 형태에 차이가 조금 있고, 별 다른 게 있을까.
알리타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현아가 살고 있는 집과 하인스 영지의 영주성 사이에 이어붙인 작은 균열을 통해 초단이가 나를 만나러 왔다.
일리나는 라스트 위스프의 소집령으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페르세르크는 세계수 알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잠시 신목으로 가 있는 상황.
때문에 나는 에이리아와 함께 어딘가로 갈 계획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
“음?”
“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요.”
대뜸 허락을 구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에이리아의 숄을 정리해주던 것을 멈추고 돌아섰다.
“아르바이트? 뭘 하는데?”
“작은 카페를 할까 생각 중인데…….”
“왜?”
돈이 부족한 거라면 딱히 문제가 없었다. 비록 낭비를 금하게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할 만큼 엄하게 굴지는 않았다.
“세상 경험이잖아요. 지구의 문화를 공부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잠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냥…….”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것까지 캐묻는 건 부모로서도 할 짓은 아니리라.
아무리 초단이가 검이라고 해도 자아는 가지고 있으니까.
“좋아.”
“네?”
내가 흔쾌히 허락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대신 공부를 소홀히 할 정도면 못 하게 막을 거야.”
“자, 잘할 수 있어요!”
환해진 얼굴로 소리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레이나를 좀 데리고 가. 그리고, 아바마마라 불러볼래?”
내 물음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어지간히 아바마마라 부르는 게 상당히 낯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어? 안 해줘? 그럼 알바도 못 하게…….”
“아…… 아바마마!”
다급히 그녀가 소리치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듣는 것보다 가끔씩 이렇게 듣는 게 더 좋은 법이리라.
내가 만족스레 돌아서서 에이리아에게 자랑하듯 어깨를 펴자 그녀가 입을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는 초단이를 살짝 보며 말했다.
“저…… 초단아.”
“네? 어머니?”
“나…… 나도…… 어마마마라고 불러주면 안 돼?”
조심스러운 그 질문에 초단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초단이를 살짝 골려줄 겸 두 사람만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피곤한 표정. 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죄인을 바라보았다.
“유리아. 그리고 륀느.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에이미를 도와서 영지 관리 좀 잘 부탁할게.”
“…….
인상을 팍 찡그린 유리아는 내게 상당히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은공. 진짜 너무하셨어요.”
“뭐. 매달아 놓은 건 네 업보야.”
“아무리 그래도 제가 5년 동안 열심히 만든 조미료를 눈앞에서 드시는 건 아니죠!”
“너 그거 말고 숨긴 거 있지?”
“…….”
“그것도 먹어줄까?”
내 물음에 유리아가 입을 댓발 내민다.
“시간 정령 알타이르에게 부탁해줄까 했는데 태도가 재밌네?”
“아…… 아니에요. 은공!”
“응 늦었어~”
내 말에 유리아가 씩씩거린다.
그러게 누가 업보를 쌓으랬나.
미안하지만 나는 화가 아직 안 풀렸다 이 말이야.
* * *
린디스 제국, 국경지대.
제국의 불여우라 불리는 대공 카트린느는 사실상 제국의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했다.
하인스 영지가 없었다면 그녀는 사실상 대륙 최강자의 반열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고, 그녀 한 명으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뒤바뀌어버릴 만큼 전략핵병기나 다름없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격투술과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의 무위는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보통 이만한 힘을 지니면 성격이 오만하거나 할 법도 한데…….
“잘 오셨습니다. 이리 방문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청년이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이리아 왕자비님. 그리고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곧 대공과 대공비님이라 불러드려야겠군요.”
그가 피곤한 웃음을 보였다. 그 표정 안에 서린 것은 근심과 걱정이었다.
외부에 알려진 두 사람의 사이는 굉장히 금실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사람이 저하를 오래 기다렸습니다.”
과거 세계의 법칙이 뒤틀린 이후 인격이 비틀렸던 카트린느를 어렵게 본래대로 돌려놨지만, 그녀의 기억이 약 상당량 지워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 연 단위로 지워진 것이니까.
내가 카트린느 대공과의 인연이 약 3년 정도 이어졌으니 그 이상 지워진 게 확인된다면 사실상 그녀에게 나는 초면이나 다름없으리라.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카트린느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이제는 온전히 기억이 정착되어 더 이상 지워지진 않으리라.
그 정도까진 아닐 테지만…….
“그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전 왕자님께서 제 안사람을 치료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거야 별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에이리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대공은.”
“아.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에이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트린느 대공은 에이리아에게 있어서 중한 인물이었을 테니 말이다.
대공의 부군이 안내한 방은 그녀의 침실이었다.
“이곳입니다. 부디 많은 이야기를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달라.
그 한마디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어? 황녀저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쁜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타오르는 듯한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겉보기엔 멀쩡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말을 잠시 멈춘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황녀 저하께서 혼인하신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이시군.”
결국, 상당량이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아마 과거의 그녀와는 똑같은 삶을 살순 없으리라.
“안사람은 황녀 저하께서 병을 치료하기 전 정도까지 기억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엔 두 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듯한 그의 말에 카트린느 대공이 쓰게 웃었다.
그 미소가 평소에 잘 보기 힘든 부군을 떠올릴 때의 표정과 같다는 것을 보면 감정 자체가 완전히 비틀린 건 아닌 듯 보였다.
“기억이 어느 정도 날아갔습니까?”
“3년 정도 됩니다. 사실상 왕자님과 만난 이후부터 전부 사라졌네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대공. 오랜만입니다?”
“그런가요? 제게는 왕자님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수기에 적힌 대로 당신과의 제법 연이 깊었던 모양이더군요.”
“예. 이래저래 많이 엮였지요.”
“제 기억을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까?”
“기회를 받아왔으니 대가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확신이 서기에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온전히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다.
“거, 아쉽네요.”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내 곁에 있던 에이리아가 몸을 파르르 떨며 결국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아…… 아아…… 대공.”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가 카트린느에게 폭 안기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 황녀 저하 엄청 아름다워지셨네요.”
“카트린느…….”
“저 괜찮습니다. 고작 몇 년 치 기억 날아간다고 못사는 것도 아니고. 아쉽긴 하지만 제가 또 수기를 꼬박꼬박 적어두는 편이라 가끔씩 읽으면서 기억을 짜 맞추고 있거든요.”
“흐윽…… 제가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는데.”
“거참 괜찮다고 해도 그러시네.”
“이제부터라도 자주 찾아올게요. 대공…….”
그녀의 말에 카트린느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도. 실제로 저하가 병이 나은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그녀가 품에 안긴 에이리아를 다독이는 동안 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는 카트린느 대공의 부군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애초에 카트린느가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건 그녀가 충성을 바친 에이리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게 두기를 한 시간 정도 있었을까.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온 에이리아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그녀는 짧게 흐느끼며 내 품에 머리를 묻고 한참 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에반젤린도 완전히 되돌리지 못해서 강제로 성장시켜서 되돌려놓았다.
다른 이들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지금 내겐 없었다.
그저 3년 정도 기억을 잃은 거로 다행이라 말해주는 수밖에.
* * *
“저…… 나는 정말 괜찮은데.”
“안 돼요. 아버지가 꼭 데리고 가라고 하셨어요.”
용사 레이나는 최근 하인스 영지에 자리 잡음으로써 굉장히 밝아졌다고 할 수 있다.
평소 하듯 늘 검을 연습하고 나면 페르세르크와 체스를 두고 이야기를 하거나 일리나나 에이리아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씩. 이제는 가지 못할 평행선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거나 데이비가 괴롭힐 때면 다 같이 모여 데이비를 씹는 모임도 함께 가졌다.
레이나에게 있어서 데이비는 이성으로써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를 부모처럼 따르는 느낌은 피할 수가 없었다.
피에 새겨진 본능인 것인지. 느낌이 같을 순 없었다.
“여기에요.”
조금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레이나와 초단이는 확실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머리색부터가 굉장히 눈에 띄는 데다 레이나는 천족, 그리고 초단이는 귀여운 홍단이와 청단이가 성장하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둘 다 인외의 존재인 만큼 그 신비스러움은 더 할 수밖에 없었다.
초단이는 청색과 적색이 브릿지처럼 섞인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머리가 조금 불량해 보일까요?”
“글쎄. 예쁘기만 한데.”
“하지만 이 나라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색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럼 나도 검은색으로 바꿔야 하나?”
“끄응…….”
우울함을 드러내며 초단이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들락날락할 때와 다르게 지금은 아르바이트 면접을 위해 가고 있다.
그런 만큼 최대한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언니, 미리 발급된 신분증은 있죠?”
“응.”
레이나가 손에 든 임시 신분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레이나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찍혀있었다.
“후…… 긴장된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제법 아담한 카페였다.
에반젤린이 방송을 하는 스튜디오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적한 카페로 위치도 좋고 페이도 제법 괜찮은 곳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이력서를 넣긴 넣었는데…….
전화가 걸려오더니 굉장히 딱딱한 목소리의 남성이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조금 고민이 되는 것인지. 그래도 첫 아르바이트라 긴장한 채로 초단이가 심호흡을 했다.
“그 사람이 네가 잘 하는지 곁에서 지켜봐 주라고 했는데…… 이래서야 내가 더 말썽을 피우게 생겼네.”
“헤헤. 괜찮아요. 문제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초단이가 자동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러자 카운터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젊은 남성이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아, 안녕하세요. 이전에 아르바이트로 연락을 드렸던…….”
전화를 받았을 당시 워낙에 딱딱했던 목소리를 기억하는 터라 초단이가 조심스레 말하자 사내가 허겁지겁 카운터에서 나오더니 그녀를 안내했다.
“어,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합격이에요. 혹시 오늘부터 일 가능해요?”
“그…… 그럼요. 그런데 면접은…….”
“아니 뭐 면접이 중요한가? 보고 이 사람이다. 싶으면 쓰는 거지. 애초에 사람 뽑는 건 사장 마음이에요. 하하하.”
초단이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한순간 풀어진다. 마치 긴장의 끈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분명 굉장히 엄격한 면접을 예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면접에 관한 영상을 보면 하나같이 압박 면접들이 많았으니까.
혹시라도 실수할까 초단이는 이런저런 공부도 했고, 아르바이트를 신청한 곳의 정보까지 공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 보니 사장님의 이런 태도는 외려 조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럼 우선 말을 좀 놔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사장님이니.”
“아. 네! 편한 대로 부탁드려요!”
“후우, 긴장했네. 그래. 환영해. 간단한 페이나 근무환경에 대해선 조금 있다가 조율하도록 하고. 그…… 옆에 분은 친구분이니?”
그 물음에 초단이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레이나 언니에게요. 친혈육은 아니지만 일단 굉장히 소중한 언니라. 아버지께서 부탁하셨거든요.”
이에 레이나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레이나라고 합니다.”
“아. 이 카페의 사장인 정주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마치 소개팅하듯 분위기가 어색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레이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초단이를 바라보았다.
‘초단아 어떻게 좀 해봐.’
그런 시선을 받은 초단이가 눈을 반짝였다.
“저, 사장님. 혹시 레이나 언니도 같이 아르바이트가 가능할까요?”
그녀의 물음에 사장은 눈을 번뜩였다.
그는 사업가.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되지! 되고말고! 그럼! 바로 계약서 쓸까?”
그는 허겁지겁 준비실로 들어가더니 서류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두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한 뒤 두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우선 이력서에 적힌 걸 봤으니까 뭐, 복잡한 건 묻지 않을게. 어차피 한국 사람이 아니잖니.”
“아…… 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그 모습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사장은 오히려 신이 난 표정이었다.
“자. 유니폼은 여분이 몇 개 있으니까. 그걸 입도록 하고, 최근에 알바생이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혼자서 일하고 있었거든. 자잘한 건 내가 봐줄 테니까. 우선 두 사람 다 접객을 부탁해도 될까?”
“네.”
환하게 웃는 초단이를 보며 사장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며 중얼거린다.
‘홍보 확실하겠네.’
초단이와 레이나 둘 다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지만,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대신 곧 사장이 가져나온 베이지색의 유니폼을 보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저…… 사장님?”
“응? 무슨 일이야, 레이나.”
“저…… 죄송한데 혹시 좀 더 큰 옷은 없나요?”
그녀의 물음에 사장이 잠시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체격은 아담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사이즈가 상당히 컸다.
“아…… 미안해. 내가 배려가 부족했네. 우선 오늘만 그걸 입어줄래?”
“음 좀 끼이는 것 같은데…….”
“내가 내일까지 유니폼을 개량해둘 테니. 아참, 탈의실은 저 안쪽에 있어.”
안쪽 탈의실을 가리킨 사장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을 빠르게 갈아입고 나왔다.
딸랑~
동시에 손님이 들어서자 사장은 기회가 왔다는 듯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까. 옆에서 잘 봐. 어서 오세요. 어떤 거로 드릴까요?”
환한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장의 질문에도 손님은 잠시 멍하니 레이나와 초단이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굉장히 호남형의 잘생긴 손님이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모습이며, 키도 제법 컸다.
“저…… 손님?”
“네…… 아! 네. 아,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화들짝 놀란 젊은 청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태블릿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다.
이에 사장은 예상했다는 듯 실실 웃으며 계산을 했고, 이내 능숙하게 커피를 내린 뒤 초단이에게 건넸다.
“자. 초단이가 먼저 해볼래?”
“네, 해볼게요.”
그녀가 해맑게 웃자 사장이 씨익 웃어 보였다.
“어휴 내가 진짜 복을 받았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에 초단이는 가지런히 놓인 커피잔을 바라보다 이내 쭈뼛쭈뼛 다가오는 청년을 향해 환하게 미소지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 목소리…….”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초단이나 레이나나 얼굴이 실제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 카페를 찾아온 청년에겐 제법 익숙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저, 아가씨. 혹시 이름이.”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카페 직원에게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 부탁드릴게요.”
영업용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장이 끼어들자 청년이 떨떠름하게 초단이와 사장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가서 앉더니 태블릿을 켜고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한 갤러리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ㅋㅋㅋ 알바하는 카페 찾아냄. 부럽냐? 진짜 명불허전이더라. 아메리카노 땡기러 갔다가 눈 호강 제대로 하고 왔음.]
어그로 성이 가득한 한마디가 올라왔다.
보통 같으면 어그로로 그냥 넘겼을 말이었다.
하지만, 댓글은 그렇지 않았다.
[절제쉑 ㅋㅋㅋ 혼자 보고 왔다 이거지.]
[아 해명해, 에반젤린이랑 유착 관계 해명해.]
[나]
[락]
[나]
[락]
[아니 그래서, 어땠음. 솔직히 공식적으로 방송에 얼굴 비춘 적이 없어서 개 궁금하네. 티오니스 성자 장녀라더니만.]
[이름이 근데 초단임? 진짜 성자 이 개 나쁜쉑 ㅋㅋㅋ]
[어허 그러다가 훅 간다.]
[읍읍.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아니 그래서, 절제 이쉑은 방송은 안 하고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임. 혼자서 카페 찾아서 재미 보고 왔다 이거지?]
[그래서, 예쁘냐? 예쁘냐?]
[그래서 예쁘냐고.]
정신없이 올라오는 댓글들은 발화의 시작이었다.
물론 방송을 하는 이도 아닌 인물이니 그렇게 타오를 수 있겠냐 할 수 있지만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했다.
초단이가 굉장한 미인이며 한국대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말이다.
알음알음 이런저런 소문이 더해지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굉장히 예쁘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관련 방송을 봤던 이들로썬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당에, 장작을 쏟아 넣고 기름을 끼얹은 게 하필 스트리머 절제였다는 게 한몫했다.
[와, 진짜 내 눈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그, 레이나? 한 명 더 있었는데. 여튼 부럽냐?ㅋ]
가벼운 도발에 성질이 난 시청자들은 일순간 에반젤린의 채널로 몰려가서 해명하라는 어이없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정작 에반젤린은 머리에 자란 뿔이 침대 시트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상당히 저기압이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