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0화
“섣부른 판단은 무슨.”
톡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네놈들은 뭐지?”
경계심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다가온 젊은 사내가 자신의 모자를 고쳐 쓰며 날카롭게 노려본다.
깔끔한 군복 스타일의 디자인에 절도가 배인 몸짓. 이놈은 척 봐도 군인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 손에는 마법 지팡이를, 허리엔 검이. 그리고 나머지 손엔 채찍이 쥐어진 모양새를 보면 그가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왜 불러도 하필 여기로 부른 겁니까.”
내 물음에 프리아 여신은 태블릿을 들어 엉뚱한 단어를 남발했다.
[아아 무서워. 무서워.]
짜악!!!
그때 내 발밑으로 채찍이 날아들었다.
“소속을 밝혀라. 너희들은 누구지?”
장교의 외침에 주변의 시선도 한번에 모여들었다.
“지금 어딜 보는 거지?! 오늘까지 해야 하는 할당을 채우지 못하면 저녁 식사는 없다!”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한 것일까.
죽은듯한 시선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은 이내 다시금 자신들의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후 보는 이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그는 손에 든 마법 지팡이를 내게 겨누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노예는 아닌듯한데. 따라와라. 저항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의 말에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저 말없이 가리키는 그 모습에 그가 어리숙하게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빠악!!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귀찮게 뭐하는 짓인지…….”
더 이상 놀아나 줄 이유가 사라진 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금 허공을 찢으려 했다. 놈들이 이동한 고정좌표는 이미 확인했으니 다시 문을 열어 그녀들과 합류해야 했다.
페르세르크와 레이나만 두기엔 조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군인을 쓰러뜨림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없진 않았다.
순식간에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도 모자라 독특한 마나 파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신기한 방식이네 알람 같은 건가?”
소리가 울리는 것은 아니나 특수한 마나 파장이 퍼져나간다.
재밌는 방식의 알람. 대상은 알람이 울렸는지도 모를 것이고 해당 본인들만 알 수 있는 방식이다.
준비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 같은데. 제법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다수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프리아 여신을 안아 들고는 그대로 허공을 찢었다.
[그냥 가게?]
“그럼 여기 다 엎을까요?”
그래도 좋은데.
내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태블릿을 톡 두드렸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볼래?]
뭘 보여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들면 악몽 대신 내가 얼굴에 낙서를 해드리리다.
이미 나를 잡기 위해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저항하면 목숨은 없다!”
노예들은 겁을 먹었는지 잽싸게 도망치기 바빴고 어느새 주변은 나를 잡기 위해 모여든 군인들로 가득 찼다.
하나같이 빳빳한 군복을 입고 있는 이들.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고 마법을 쏘아 보낼 것 같았다.
검을 빼든 자와 마법을 준비하는 자.
보통이라면 퇴로가 막힌 지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소속을 밝혀라! 어디서 소속이지? 저항군인가?”
저항군?
이상하게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그건 내 알바가 아니렷다.
“이봐.”
내가 입을 열자 지목당한 군인 중 하나가 움찔한다.
“여기 북쪽이 어디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래. 쉽게 답해줄 거 같진 않더라.”
분위기가 삭막해져 가는 꼴을 보며 내가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 프리아 여신이 자신의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네 아이를 품은 심연의 아이는 돌려보냈어.]
“어디로?”
[집으로, 축복을 담은 아이가 많이 부담이 될거야.]
페르세르크는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녀가 따라가겠다 하였고, 내 곁에 있으면 문제가 없으려니 싶어서 바람이나 쐬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차원통로 자체가 그녀와 아이에게 부담이 된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리라.
스릉!!!
그때 귀를 간질이는 금속음과 함께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접근해왔다.
내가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제압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단순히 장비에만 의존했다고 볼 수 없는 날렵한 움직임.
단순히 수준으로 치면 익스퍼터 최상급에 달하는 속도였다.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과감하게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시작부터 화끈하게 들어오네.’
보통이라면 제압 이전에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탐색부터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동료가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완벽하게 나를 초격에 제압한다는 것을 초점 맞추고 있었다.
내가 피하면 프리아 여신을 노리고, 내가 피하지 않으면 정확히 나를 제압하려 든다.
그리고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만큼 접근한 그가 승리를 확신하며 내 몸에 손을 대려던 그 순간.
빠악!!!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모두가 내가 제압당할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바닥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닌 강한 힘을 지닌 사내였다.
“컥?!”
자신이 왜 쓰러진 건지 받아들이지도 못한 듯 의식을 잃어버린 그가 그대로 침묵해버리자 그것을 신호탄으로 삼듯 나머지 인원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뻗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양산형 방출 마법 지팡이.
구조가 같다면…….
[디스펠]
와장창!!!
못 부술 것도 없다.
너희 30여 명이 쏘는 똑같은 하위 마법보다 초대 리치 닉스가 사용하던 흑탄 마법이 더 복잡하겠다.
“어…… 어어?!”
“이게 왜 이래!”
제아무리 로봇같이 냉혈해 보이는 이들이라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마법이 갑자기 먹통이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조심해라! 처음 보는 장비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심해라! 놈은 평범한 침입자가 아니다!”
“폐하께 보고해 어서!”
자신들끼리 뭔가를 착각한 듯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떠올렸다.
폐하께 보고?
지금 황제가 여기 있다는 건가?
“처라!!!”
“남자는 위험하다! 여자부터 노려라!”
참 치졸해 보이지만 현실적인 대응방법이기도 했다.
개개인의 사견을 집어치우고 이기기 위한 최소한의 결정.
제법…… 냉혈한 놈들이지 않은가.
순식간에 프리아 여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놈들이지만 놈들이 모르는 사실이 한가지 있었다.
“이번에도 진짜 장난치면 저 당신 안 봅니다.”
내 말에 프리아 여신이 무표정하게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동시에.
“어…… 어어?”
그녀를 공격하려던 인간들이 갑자기 멈춰 서서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마치 신을 영접한 것처럼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그들의 표정은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낌새가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아주 약간의 신위로도 피조물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니까.
보통 프리아 여신은 이런 기운을 전혀 방출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자비로운 성정을 지닌 그녀였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제…… 젠장! 저 여자 뭔가 이상하다!! 지원을 불러!”
“기다려!”
황급히 통신용 아티펙트를 가동시키는 이들을 보며 나는 프리아 여신이 뭘 하려 했건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나는 양손에 무형의 마나를 모아 강제로 끌어모으듯 비틀었다.
[5서클]
[어스퀘이크]
쿠구구구구구궁!!!!
동시에 주변 일대 영역에 대규모 지진이 감지 되기 시작했다.
“크아악?!”
“으악!”
균형을 잡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려 애썼지만 어스퀘이크라는 게 보통 건물이나 공성 병기를 공략하기에 좋은 마법이라고 하기엔 응용범위가 너무 넓었다.
따악!!
콰드드득!!
내가 손가락을 튕겨 일정 지점에 진원지를 추가로 지정하자 대지가 비틀리며 부서졌고 그 틈으로 그들의 몸이 끼여 들어갔다.
순식간에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 그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레이나가 떨어지긴 했지만, 이곳이 어디건 복잡한 일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는 게 맞을 터다.
페르세르크와의 데이트는 물 건너갔지만 뭣하면 그녀를 데리고 다시 천중원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 보였다.
“방금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프리아 여신은 내가 황제를 바로 만나는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지만 언제까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었다.
“크윽?!”
몸이 빠져나오지 않아 버둥거리던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일순간 미소를 지웠다.
“황제. 지금 여기 있다고?”
* * *
“폐하. 하면 편히 쉬십시오.”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는 거한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나가자 젊은 사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목걸이의 장비를 작동시켰다.
우우우웅!!!
동시에 막대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하며 독특한 에너지가 그의 주변에 감돌았고, 젊은 남성의 모습에서 상당히 노쇠한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현 나차 제국의 황제.
아브조르바 델레맹코 프라시아스 나차.
그게 현 황제의 이름이었다.
“에너지가 줄어들고 있다…… 그전에 빨리 찾아야 하건만…….”
그는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은 자신의 목걸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을 젊은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물건이며, 제국 내에서 그를 신격화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늙지 않는 황제.
신수의 축복을 받은 존재.
작은 왕국이었던 나차를 차원을 이루는 대제국의 지배자로 만든 존재.
모든 것이 그를 위한 수식어였다.
과거엔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신수가 사라져 버린 시점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젊음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축복의 부산물인 레인보우 슬라임도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터라 제국내에서 잦은 사고들이 많이 터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새로 발견한 차원에서는 왜 아무런 연락이 없는게지?”
힘없이 중얼거리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와인병을 잔에 따른 그가 창밖을 보았다.
아직은 환한 대낮이다.
이곳은 과거엔 어땠건 지금은 정복한 차원의 국가들의 국민들을 이용해 특수 광물을 캐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것과 신수만 있으면 자신은 영원하리라. 그리고 영원하면 자신의 염원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던 찰나.
그의 시선에 비친 하늘에 하얀 불덩어리 같은 것들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처음엔 하나. 둘.
마치 도넛처럼 생긴 화염의 고리는 초라할 정도로 고요하게 하늘을 떠 있었다.
“저건 뭐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사람을 불러 저것을 조사하게 하려던 순간이었다.
“저게 뭔지 궁금해?”
들려와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가 흠칫 돌아섰다. 지금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그의 직속 호위를 제외하곤 말이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호위의 것과는 달랐다.
“하나 떨어지면 여기 일대가 전부 날아가는 재앙이야.”
고개를 돌린 그가 본 곳에는 다리를 꼰 채 앉아 고고하게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리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아니 저자는 누구일까.
그 의문 속에서 황제가 뭔가 입을 열려던 순간.
“자. 협상을 시작하자고.”
그가 씨익 웃었다.
“걱정 마. 순순히 응해도 유혈사태는 일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