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1화
경이적일 정도로 오만하고, 섬뜩할 정도로 익숙하다.
남을 내려다보는 것 자체를 많이 해본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상위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를 내려다 보는듯한 차가움도 서려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이곳을 들어왔지?”
“기다리고 있었어.”
담담한 한마디. 즉 그의 호위와 그의 시선을 속이고 처음부터 이 방 안에 있었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 [아브조르바 델레맹코 프라시아스 나차] 는 알게 모르게 자신이 위압 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헛소리라 하고 싶지만 실제로 그는 근위대장의 시선을 속이고 들어왔다.
“흥. 별 볼 일 없는 암살자 놈이었나. 그래. 짐의 목숨을 노리러 왔느냐.”
“어떻게 보면 맞는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노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한낮 암살자주제에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흥. 허황된 목소리뿐이로구나.”
“황제. 이름이 뭐지?”
“감히 짐에게 질문하는 것이더냐. 당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리하면 네게 짐의 이름을 알현할 기회를 줄 것…….”
쨍그랑!!!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들고 있던 와인잔이 박살 나버렸다.
전혀 감지도 못했던 공격이었다. 만일 저 공격이 자신의 목을 노렸다면 대응할 수 있었을까.
“이봐 황제. 내가 지금 당신하고 예의나 차리자고 온 건 줄 알아?”
“…….”
“아직 못 믿는 듯하니 보여줄게.”
그말과 함께 청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하늘에 바깥에서 불현듯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깜짝 놀란 황제는 황급히 창밖을 바라보았고, 맹렬하게 회전하던 새하얀 원고리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대기를 찢어발기고 공간을 일그러뜨린 게 보인다.
“경고야. 두 번은 없어. 다음번엔 근처에 있는 병영에 떨어질 거다.”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위협이었다.
“대륙의 황제에겐 그에 걸맞는 대우는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당신은 예외야.”
“어째서지?”
“어째서긴. 남이 만들어놓은 물건 훔쳐 쓰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있던 차원까지 침공을 가하는 침략자에게 내가 예우를 갖춰줘야 하나?”
그 물음에 황제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자신이 침공한 차원 중 한 곳에서 왔다.
어디인가. 프랑시아인가, 혹은 조르드인가.
두 차원 모두 마법을 기반으로 한 평범한 차원이었고 오래 걸리지 않아 나차 제국에게 점령당한 곳이기도 했다.
둘 다 저항군은 존재하나 그래 봐야 자잘한 독립활동을 하는 자들일 뿐이다.
눈앞의 존재처럼 이런 존재가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암살 시도를 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최근에 발견된 수호신의 신호가 잡힌 차원에서 온 건가?”
그의 질문에 데이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난 이름을 물었어.”
쿵!!!!
엄청난 압박감이 그의 자세를 강제로 무너뜨렸다.
“크윽?!”
일반 인간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압박감에 황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름.”
다시 질문을 던졌으나 황제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게 돌아왔다.
쿠우우웅!!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두번은 없다고 했지.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게 부서질 거다.”
“괴물 같은 놈.”
“피차 괴물끼리 그러지 말자고.”
청년의 미소는 너무 싸늘했다.
“아브조르바 델레맹코, 프라시아스 나차다.”
“그래. 아브조르바 황제.”
그는 그제야 만족한 듯 말했다.
“모르고 그랬으니 왜 그랬냐는 비생산적인 질문은 그만두자고.”
“…….”
“이번엔 경고로 넘어가지. 내가 말하는 건 두 가지다. 첫째. 차원통로, 한 번만 더 사용하면 그땐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다. 둘째.”
그의 미소는 섬찟섬찟했다.
“대륙 내에서 뭔 짓을 하건 그건 그쪽 자유지만. 그걸 타 차원까지 끌고 가지 마라.”
침략행위를 멈춰라.
그 뜻이었다.
“내가 죽어도 제국은 멈추지 않을 거다.”
“그땐 내가 손수 차원을 박살 내는 수밖에.”
그의 심드렁한 말은 어조와 다르게 묵직했다.
“광오하구나. 일개 인간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일개 인간?”
그 물음에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전신에서 조금 이질적인 기운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일반인인 아브조르바 황제조차 확연히 느낄 정도의 무언가.
문제는 그 힘에 노출되기가 무섭게 몸을 들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무서워서?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네 눈엔 내가 인간으로 보였나?”
“네놈은…… 아니…… 당신은 누구지?”
그 질문에 청년은 빙그레 웃다가 더욱 기세를 끌어올렸다.
“크으으!!”
몸이 절로 복종하듯 내리눌린다. 결국, 그에게서 들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알아낸 것이라곤 그가 이번에 발견한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이라는 것.
이 방안에는 침입자의 마나의 활동을 억제하는 귀한 장비까지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힘을 발현하는 데에 전혀 제약이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쾅!!
“폐하! 괜찮으십니까!!”
문이 열리며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와 몇몇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자다!!”
“암살자가 폐하의 목숨을 노린다!! 근위대!!”
그들은 데이비를 발견함과 동시에 무기를 빼 들었다.
“경고만 하고 돌아갈까 했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지어진다.
마치 고삐가 풀리기 직전의 무언가처럼 말이다.
쌔앵- 카아아앙!!!!!
이윽고 가장 먼저 움직인 존재가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 들며 덤벼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은 이전 데이비에게 가해졌던 익스퍼터급 군인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데이비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그가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데이비가 허공에서 꺼낸 푸른 검이 그의 검을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흡!!”
막대한 체격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에서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한 탓일까.
거구 사내의 표정에 경계심이 어렸다.
“한낮 암살자가 겁도 없구나. 여기서 살아나갈 성싶으냐?”
그 질문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었다.
“죽여라!! 놈을 죽여!!”
그 와중에 아브조르바 황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이에 데이비가 한 행동은 간단했다.
“내 경고가 우스웠나 보네.”
파앙!!!!
한 손으로 검을 쥐고 한 손을 놀게 두었던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무형의 마탄이 쏘아져 나가 황제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제국을 통치한 나차 황제의 죽음치고는 너무 허무할 정도였다.
“폐…… 폐하!!!”
“이노오옴!!!”
황제가 쓰러진 직후 데이비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난 경고하러 온 거야. 겁도 없이 저지른 침공의 대가가 어떤 건지 보여줘야지.”
“닥쳐라!!”
“그런데 왜 내가 이걸 참고 있는지 모르겠네.”
데이비의 중얼거림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폐하를 시해하다니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을 죽이고 폐하를 지키지 못한 불충의 벌을 받겠다!!”
무거울 정도의 충정에 데이비의 얼굴에 일말의 지바가 사라졌다.
“그럼 별수 있나.”
스릉…… 카앙!!!
대치 중이던 데이비의 검이 살짝 비틀어진다.
순간적으로 힘의 무게가 바뀌면서 그의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마스터급 이상의 기사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금방 자세를 고쳐잡은 그가 다시 반격을 가하려 한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 거구의 근위대장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시야로 새파란 검신을 지닌 검이 날아드는 게 보였다.
막을 수가 없다.
어떻게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장비를 상대하면서 이렇게 빠르고 강한 육체능력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면 최소 큰 부상이며,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자네가 내 기사가 되었으면 하네. 이 나라는 언젠가 대륙의 최고에 오를 것이야. 모두가 이 나라를 부러워하게 만들겠네.]
오래전의 약속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아…… 아아…… 폐하. 불충한 신은 여기서 목숨을 걸겠나이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그는 죽음을 대가로 그에게 치명상을 남기기 위해 동귀어진을 하듯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갑자기 검을 회수하고 그를 걷어차 버린 데이비로 인해 무산되었다.
콰앙!!!
“커억…… 쿨럭!!”
기침을 하며 벽에 처박힌 그를 향해 기사들이 달려온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거구의 근위단장의 시선은 데이비를 향해 꽂혀있었다.
짜아악!!!
갑작스런 소리에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결국,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거니?]
어째서인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데이비의 뺨을 후려친 프리아 여신이 있었다.
[왕이 되지 않고 다른 길로 가였고, 기적을 바라 새로운 신격을 쥐었으나. 결국, 네가 도달할 목적지는 같았구나.]
“여신님.”
[사람은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
실망한듯한 글귀였다.
태블릿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글자를 바꾸었다.
[자아를 가졌기에 알겠구나, 마음이 너무 아파, 데이비. 블랙 슬라임이 왜 네게서 도망쳤는지. 넌 아직 모르는구나.]
* * *
어두운 옥좌.
검은 옥좌는 고고할 정도로 조용했다.
“폐하.”
“내 일부가 죽었구나.”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던 옥좌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 모습으로 변하기 전의 사내였다.
“일부라 하심은…….”
“마광 채굴지에 시찰을 떠난 육신이 죽었다는 뜻이다.”
“감히 누가!!”
놀란 목소리에 황제는 어두운 안광을 번뜩였다.
“그곳으로 병사를 보내라. 그를 찾아. 그와 관련된 모두도 찾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섬뜩하게 말했다.
“감히 짐을 죽인 차원이다. 토씨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태워버릴 준비를 하라.”
“하…… 하오나 저하! 이전에도 이미 많은 피가…….”
“감히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힘을 내재한듯한 또 다른 기사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 * *
“아아…… 아아아아아악!!!!”
새하얀 검을 이용해 도적단을 제압하고 있던 레이나는 갑작스런 격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그녀의 주변엔 부서진 마차와 피를 흘리고 있는 젊은 남녀가 있었고, 주변을 에워싸듯 엄청나게 많은 도적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랬다. 레이나는 우연찮게 이곳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새하얀 기검을 이용해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던 그녀가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비틀거리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 대장 저년 왜 저러는 겁니까!”
“몰라 이 새끼야! 일단 지금이 기회야 다들 덮쳐!! 어차피 혼자다! 몸으로 찍어누르면 꼼짝 못 해!!”
“알겠습니다!”
“죽이지 마라! 얼굴은 반반한 년이니 부하들을 죽인만큼의 값은 치러야겠다. 블랙마켓에 노예로 팔 테니 사로잡아!!”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외침에 하드 레더를 입은 근접조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몸에서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레이나는 그들을 신경쓰지 못했다.
“아악…… 악!! 아…… 안돼…… 안돼!!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제발 변하지 마!”
그리고. 이내 근접조들이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다. 그전엔 이 정도 거리도 허용하지 않은 채 허공에 띄운 열 자루의 새하얀 검들이 그들을 요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주인과 상태를 공명하듯 허공에서 파르르 떨며 부서질 뿐이었다.
“잡았다 이년!!”
이윽고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 하나가 레이나의 팔을 붙잡은 그 순간.
“아아아악!!!”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레이나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의 몸에서 회색의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돼!!!”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사라졌던 기검들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순수함을 상징하듯 새하얗던 기검들은 마치 피처럼 검었고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
조금 전까지 최대한 죽이지 않고 제압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달랐다.
푸슉!!!
수십 수백 자루로 늘어난 검이 일제히 날아들었고. 그녀를 에워싸던 이들을 모조리 뚫어 죽여버렸다.
“아……?”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사람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머리 위에 새빨간 티아라가 생겨난 레이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공허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