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6화
홍단이와 청단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비화와 초단이 사이엔 사실 알량한 싸움이 존재했다.
비화는 데이비를 아프게 하면서도 인지도 못 하고 있는 초단이가 미웠고, 초단이는 초단이 나름의 이유로 비화에게 울컥한 게 있었다.
그럼에도 초단이가 비화와 크게 충돌하지 않는 것은 엄연히 그녀 스스로도 데이비를 고통스럽게 만든 전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자매끼리는 치고받고 싸운다고 하지만 초단이와 비화는 사실상 친자매와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이서 태어난 탓에 서로 비슷하면서도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초단이와 비화가 이제 격하게 싸우지 않는 이유는 현실이라는 문제점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게임이라면?
타아앙!!!
폐허가 된 지하 시설 속 비화는 양손에 거대한 권총 두 자루를 든 채 저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초단이를 올려다보았고 초단이는 커다란 자동 샷건을 한 손에 길게 늘어뜨린 채 비화를 내려다본다.
“하…….”
그리고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러분 저거 어떻게 말리죠?”
-몰?루.
-ㅋㅋㅋ 개꿀잼인데 뭐하러 말려ㅋㅋ
“쫓겨나고 싶어요?”
-ㅈㅅ……ㅋㅋ
“지금 저거 보여요?”
에반젤린이 하늘 쪽을 가리켰다.
본래라면 하늘에 떠 있어야 할 이곳은 가상현실임을 인지시켜주는 장치들이 흐려져 있다.
“비화 언니가 여길 현실의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바꾸고 있는 거 같아요. 단순히 총질이 아니라 진짜 대판 싸울 삘이거든요?”
여긴 게임이니까. 마구잡이로 싸워서 다쳐도, 죽을 만큼의 타격을 받아도 실제로는 영향이 없다.
그래서 비화와 초단이가 서로에게 총질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날아다니던 새들이 날개를 꺾인 시점에서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다.
암묵적으로 이 가상 공간 안에 정렬된 규칙을 임의적으로 바꾸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비화는 이 가상공간의 주인이나 다름없다.
그런 만큼 그녀에게 규칙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었다.
-방장. 방장도 최근에 경지 올랐다면서. 들어가서 말려. 말로 안 되면 힘으로 말려야지. 우리 방장 쌔잖아.
“그게요…… 저도 센 건 맞는데…… 비화 언니는 정말로 자신이 없거든요? 그나마 초단이 언니는 본신의 힘이 센 거지, 경험이라든지 직접 싸우는 건 약한…….”
스르륵…….
초단이의 얼굴에 가면이 쓰인다.
“둘 다 안돼. 초단이 언니 저렇게 되면 나도 안돼. 아빠한테 일러야겠다. 아빠! 보고 있어요? 저 둘 좀 말려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빠른 포기.ㅋㅋㅋㅋ
당연 조금 전에 데이비가 방송에 있었으니 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에반젤린의 요청을 데이비는 무참히 짓밟았다.
-에린아. 끝나는 대로 둘이 데리고 돌아와.
“아빠아아아!!”
-ㅋㅋㅋㅋㅋㅋㅋㅋ
-저짝은 존버타는데?ㅋㅋㅋ
-어디 해봐. 하고 싶은 대로 해봐 ㅋㅋㅋㅋ
콰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달려든 것은 비화였다.
비화는 양손에 든 권총을 정확히 초단이의 미간에 노리고 쏘며 섬광처럼 쏘아져 나갔고 초단이는 한 손에 샷건을 한 손에 붉은 기검을 만들어내 덤벼들었다.
카아앙!! 캉!! 캉!!
순식간에 폐허를 종횡무진하며 한바탕 싸우는 초단이와 비화의 속도는 점차 빨라져 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 ㅋㅋㅋ
-세상에 ㅋㅋㅋ
시청자들의 시선에선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비화의 힘이었으나 어느새 자신도 흉내 낼 수 있게 된 초단이는 검으로 비화의 탄환을 쳐내고 그녀의 몸에 샷건을 박아넣었다.
단순한 탄환이 아니었다.
초단이는 그녀가 가진 권능을 탄환에 담아 비화의 방어를 단번에 깨부숴버렸고 비화는 자신의 신력까지 담아 방출해 초단이를 뒤흔들어놓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죽일 듯이 싸워댔다.
타다다다당!!
마치 탄막을 흩뿌리듯 비화의 탄환이 사방에서 쏘아지자 초단이의 가면 너머 안광이 일렁이더니 붉은빛의 잔상을 남겼다.
동시에 시간이 살짝 멈추는듯한 착각이 일었고 초단이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가속화며 허공에 수십 수백의 붉은색과 푸른색의 잔상을 남겼다.
비화가 쏟아낸 탄환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것이다.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속도에 에반젤린과 비화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여진다.
반면 이 꼴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허공에서 무언가 꽃잎처럼 팍팍 터져나가는 걸 신기하게만 바라보았다.
텁!!
그리고는 안광을 일렁이며 비화의 몸에 샷건을 직격타로 박아넣어 버렸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비화의 몸이 튕겨 나가 한바탕 구르기가 무섭게 초단이는 추가타를 넣기 위해 몸을 살짝 숙였다.
하지만 비화의 반격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다.
비화의 날개 옷자락이 빠르게 날아들어 초단이의 다리를 휘감았고 그대로 그녀를 한쪽 잔해더미 속에 처박아 넣어버렸다.
타앙!!
동시에 그녀의 탄이 한발 발사되었고 급히 일어난 초단이가 그것을 베어내려던 순간.
쩌엉!!!
독특한 소리와 함께 탄환이 스스로 폭발하며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연쇄 폭발.
일반적인 TNT가 터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이 서린 폭발에 초단이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폭발에 노출되었다.
단순한 자매싸움을 넘어 서로 죽자고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가 게임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비록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힘을 구현하기 시작했다지만 이곳은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이다. 고통도 없고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리미트가 풀려버린 둘의 싸움이 커진 것도 한몫하지만 말이다.
“초단이 언니!”
격하게 초단이를 부르며 잔해 쪽으로 뛰어가려던 그 순간.
비화가 손을 뻗는다.
“가지마.”
콰아아앙!!!
뒤이어 잔해가 폭발하듯 비산하며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옷가지는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그녀의 가면에 쓰여진 안광은 과거 비화가 초단이의 내면에 있을 때보다 더 스산했다.
“미친년, 저걸 아주 지 껄로 만들어놨네.”
황당해하는 비화가 손을 움직여 탄창을 휙 뺀 뒤 다시 채워 넣었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초단이의 손에는 샷건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손엔 붉은 기검을 한 손에 푸른 기검을 들고 있었다.
“그래. 전부터 너랑 나랑 어디 한 번 제대로 한판 붙어보고 싶었잖아. 안 그래?”
비화가 실실 웃으며 말하자 초단이는 붉고 푸른 양쪽 안광을 일렁이며 한발 내디뎠다.
터어어엉!!!
동시에 초단이와 비화가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초단이는 에반젤린의 PTSD를 강하게 유발시켰다.
“이 미친년이?!”
초단이의 검에 맞서 힘겨루기를 하던 순간. 초단이의 몸이 빛으로 화하더니 순간적으로 청단이와 홍단이로 나뉜다.
당연하게도 가면을 쓰고 있는 홍단이와 청단이는 마치 서로가 한 몸인 양 필요할 때 검으로 변했다가 사람으로 변하며 맹렬하게 비화를 몰아붙였다.
아무리 여신이라도 초단이의 힘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일까.
비화가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한다.
“으악!!”
작은 체구와 그렇지않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비화의 틈을 파고들던 홍단이가 푸른 검을 던지자마자 푸른 검이 청단이가 되며 홍단이를 검으로 바꿔 들고 날카롭게 찔러넣었다.
이에 격분한 비화가 광역 포격을 쏟아 넣듯 신의 힘을 발휘하자 청단이는 홍단이를 허공에 던지고는 폴짝폴짝 뛰며 잔해더미를 맹렬하게 피해 다녔다.
날다람쥐처럼 날렵하게 피하는 청단이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비화는 점차 그 속도를 올라나갔고 허공으로 던져진 홍단이를 신경 쓰지 못했다.
푸욱!!
뒤이어 검으로 변해있던 홍단이가 스스로 날아와 비화의 등을 크게 베어 넘긴다.
홍단이의 권능이라면 두 동강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화력이지만 비화는 버텨냈다.
하지만 잠깐 홍단이에게 어그로가 끌린 것은 청단이에게 기회를 준 꼴이었다.
언제 점프했는지 폐허의 천장까지 날아오른 홍단이가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대로 낙하하듯 비화에게 낙하 드롭킥을 박아넣었다.
“으읏?!”
청단이의 공격에 그녀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당연 홍단이에게 반격하려던 것도 무산되었고 두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초단이로 융합하며 마지막 한 수를 준비했다.
동시에 비화 또한 자신의 힘을 더욱 방출시켜 이 공간을 마치 현실처럼 동화시키려 했다.
싸우다 보니 분위기가 더욱 과격해진 것이다.
띠링.
-화내기 전에 적당히 하거라.
“흐읍?!”
비화에게 크게 하방 먹이려던 초단이가 주춤하며 주저앉아버리고 비화 또한 겁을 먹은 듯 움찔했다.
도네이션으로 들려온 페르세르크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고, 비화와 초단이가 싸우는 소리는 거대했지만 그런 소리의 차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둘 모두가 파랗게 질린 채 주저앉아버렸다.
데이비가 경고하던 때와는 비교 못 할 냉기가 차갑게 서린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좀 좋아…….”
돌 부스러기 틈새에 처박혀있던 에반젤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렸다.
그대로 굳어있는 둘을 보던 에반젤린은 질린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다시는 언니들이랑 게임 안 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머리의 열이 식어버린 비화와 초단이가 황급히 에반젤린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에반젤린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고 때문에 들어왔다가 제대로 휘말렸쥬?ㅋㅋ
-한마디로 정리해버리는 걸 보면 역시 어머니가 집안의 서열 1위라는 건 만국 공통이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그어 포탈을 만들어낸 뒤 멍하니 앉아있는 두 소녀를 향해 혀를 쏙 내밀고는 들어가 버렸다.
* * *
안내역을 맡은 비화를 버려두고 온 탓에 본래의 계획을 밀고 갈 수 없게 된 에반젤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해야 할까요.”
에반젤린의 질문에 시청자들의 반응도 한결같았다.
-몰?루.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앜ㅋㅋ
-빨리 아무거나 해보라고.
“음…… 잠시만요. 여기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허공에 손짓을 하던 그녀의 앞에 반투명한 창이 여럿 드러났다.
그곳에는 이미 출시된 것들을 제외하고도 아직 출시가 안 된 비화의 어카운트 콘텐츠들이 들어있었다.
초창기에 에반젤린이 함께 즐긴 크리처를 사냥하며 탈출하는 게임도 그중 하나였다.
“오. 이거 신기해 보인다. 이거 해볼까요?”
에반젤린은 독특한 섬네일을 지닌 이름 없는 프로그램을 바라봤다.
-저거 아까 쪼꼬미들 들어갔다가 울면서 나온 그거 아님?
“아 그래요?”
-대체 안에서 뭘 봤길래?
“잠시만요 설명서 좀 읽어볼게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에반젤린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이건 하지 말죠.”
-???
-어디서 개수작이야. 얼른 포탈 못 열어
비화가 홍단이와 청단이를 놀릴 때 썼던 공포맵은 다름 아닌 입장한 이의 심층에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보여주는 콘텐츠로 담력 테스트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기도 했다.
“아니 내가 뭐 겁나는 게 있겠어요?”
에반젤린은 식은땀을 애써 숨기며 어차피 가도 볼 것도 없을 거라 의견을 피력했지만…….
띠링!
사수자리 님께서 1,0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들어가.
“아니…….”
사수자리 님께서 2,0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들어가.
“아니 보내지 말라니까요? 이걸 리액션을 해줄 수도 없고…….”
사수자리 님께서 5,0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이래도 안 들어가? 이 돈이면 가챠를 몇 번이나 할 수 있는데?
“으윽……”
에반젤린의 얼굴에 고민이 서린다.
띠링!
-사수자리 님께서 5,0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이거 받으면 절제 백 퍼센트 바를 수 있다.
“콜!”
결국, 자본앞에 무릎을 굽히고 만 에반젤린은 포탈로 몸을 던졌다.
가상공간에서 에반젤린의 정신을 침범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겁나는 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사각사각사각사각…….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아니지? 미친! 아니라고 해! 빨리!!”
-오우…… 조졌다.
-미친. 화면 끔.
-아씨 밥 먹는데 진짜 ㅋㅋㅋ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밀고 온다.
겁이 나는 게 아닌 혐오하는 것.
아직 미완성인 이 콘텐츠는 에반젤린의 견고한 정신을 뚫지 못했고, 다른 이의 기억 속에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구현해버렸다.
종이 한 장 차이의 공포가 에반젤린을 덮쳐오자 그녀는 급히 포탈을 열고 다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조작 미스로 인해 포탈이 닫혀버렸고 결국 에반젤린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어두운 복도를 내달려야 했다.
“꺄아악! 싫어 미친!”
사각사각사각사각-
거대한 바퀴벌레의 파도가 에반젤린을 향해 미친 듯이 밀려왔다.
에반젤린이 질색하며 도망치는 도중에 막대한 에너지가 공간을 뒤흔든다.
이에 공간이 극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다른 것들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에반젤린의 앞에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건 또 뭔데!!”
-어? 저거 그거 아님?
-미친. 얼굴 보지 마셈. 보면 죽을 때까지 달려듦.
인터넷에서 유명한 어떤 괴물이었다.
얼굴을 본 이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인다는 괴물.
그런 괴물의 등에 에반젤린은 가차 없이 괴물을 걷어차 날려버리고는 뛰었다.
“됐고! 바퀴벌레보단 나아! 뛰어! 내가 다시는 저 인간 미션 안 받는다 진짜!”
에반젤린의 힘이 그대로 서린 한방이 괴물의 사지육신을 조각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