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7화
우우웅…… 철컥!
비화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에너지의 핵. 그것을 지켜보던 발키리아 종족인 케인과 프레이아는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야. 케인. 이거 안전한 거 아니야?”
“흥. 엄마 보고 싶어…….”
“하. 꼴통이 나왔네…….”
발키리아 케인에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
한 몸에서 나온 게 아닌 정확하게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론 굉장히 침착한 성격의 케인이 존재하지만, 간혹 이렇게 일리나만 찾는 녀석이 있을 때도 있었다.
“됐고, 나 없는 사이에 잘 봐. 문제 생기면 진짜 넌 내 손에 죽어.”
“으으…….”
프레이아가 날개를 펼치며 어디론가로 사라지자 케인은 우울한 얼굴로 힘의 핵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괜히 건들지 말라던 충고는 개나 줘버린 듯한 무심한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파직!
거대한 에너지 구체가 한순간 스파크를 일으키자 케인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어어어? 이거 왜 이래!”
당황한 그가 핵을 이리저리 건드려본다. 애초에 발키리아 정도의 힘으로는 이 핵을 어찌할 수단이 없지만, 내부에서 비화와 초단이가 날뛰면서 생긴 틈에 케인이 슬쩍 건드려버리면서 문제가 더욱 커진 것이다.
“으아아아!!”
화아악!!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케인은 곧이어 쏟아지는 빛무리에 휩싸였다.
동시에 그 빛무리 속에서 케인의 팔이 불쑥 빠져나오며 거대한 핵을 조율하는 비화의 신물에 손을 댄다.
파창!!!
동시에 신물의 빛이 서서히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던 핵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휴…… 큰일 날뻔했군…….”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었지만, 상당히 재수가 없었던 셈이었다.
츠팡!!
그리고 뒤이어 자리를 비웠던 프레이아가 손에 커다란 아티펙트를 들고 허겁지겁 들어온다.
“야!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
“지금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프레이아.”
“어…… 어어?”
“제 반쪽은 아직 미숙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혼자 둔 겁니까?”
“아…… 아니 그건…….”
“제가 급히 나와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두 신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뻔했습니다.”
“그, 그게…….”
“운 좋은 줄 아세요. 프레이아.”
프레이아는 자신이 혼나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케인의 압박에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안전장치가 수 겹으로 되어있기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해서 이 가상공간에 링크하고 있는 인간들의 의식에 문제가 가해지는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테스트 지역을 링크하고 있는 이들에겐 달랐다.
비화로 인해 시작된 불안정한 흐름의 영향은 기적처럼 한 명에게 적용된 후였다.
* * *
“로…… 로그아웃이 왜 안 되는데에에에에!!!”
-ㅋㅋㅋㅋㅋㅋㅋㅋ 보니까 도망쳤다고 로그아웃 막은 거 아님?ㅋㅋㅋ
시청자들은 그저 에반젤린이 기겁하면서 도망치는 걸 재밌게 볼 뿐이다.
일반적인 1인칭 시점이었다면 멀미가 심하게 와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얄밉게도 신의 힘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방송시스템 같은 부분에선 마치 카메라가 살아있는 것처럼 3인칭으로 에반젤린을 촬영해주고 있었다.
“아오. 진짜!!”
날렵하게 도망치며 손끝에 만든 화구를 냅다 던져보지만, 저 괴물들에게 닿아 파괴되어도 다시 어디선가 같은 수의 바퀴벌레들이 몰려나왔다.
“아니 그래서!! 어디냐고!! 어디까지 튀어야 하냐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벌레 더미에 휩싸였을 테지만 놀랍게도 에반젤린은 실시간 기록을 갱신 중이었다.
“아! 저기 포탈 있다! 끝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저 멀리 아주 작은 포탈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에반젤린은 발을 순간적으로 강하게 박차며 속도를 올렸다.
쿵!! 쿵!!
그때였다.
벌레들의 파도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에반젤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긴 머리카락에 기괴하게 생긴 몰골을 한 어떤 생명체였다.
사람의 팔다리 같지만, 그 길이가 끔찍할 정도로 길었고 마치 벌레의 관절처럼 역관절로 되어 징그러움을 한층 더 해주고 있었다.
“저…… 저건 또 뭔데!!”
일반적인 바퀴벌레와는 격이 다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괴물의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자 벌레의 입에 달린 작은 톱날 이빨 같은 것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것을 본 에반젤린은 입을 꾹 다물고 파랗게 질린 채 얼굴로 미친 듯이 속도를 올렸다.
마치 육상선수가 전력 질주를 하듯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도망가기 시작하자 괴물의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사실 상대의 속도에 맞춰서 점차 빨라지는 시스템인 것을 에반젤린은 몰랐다.
-와씨! 달려!
-미친 꿈에 나올까 무섭네.
-저건 아니지…….
즐거워하던 시청자들조차 질려 할 정도의 비주얼은 그야말로 호러계에서 극찬을 받아도 나쁘지 않을 모습이었다.
서서히 좁혀지는 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의 상당 부분을 억제당하고 있는 에반젤린은 본체로 현신할 수도 없는 만큼 부지런히 내달렸고, 잡히기 직전 포탈에 몸을 던졌다.
“하아…… 하아…… 진짜 끔찍하다…… 이거 대체 뭔데…….”
숨을 천천히 고르며 식은땀을 흘리는 에반젤린이 포탈을 보며 부르르 떨었다.
홍단이 청단이가 안에서 뭘 봤는지는 몰라도 기겁할만한 비주얼인 건 분명해 보였다.
“지쳤다…… 지쳤어…… 힐링 게임을 원해…….”
한껏 지친 얼굴로 동의를 구한다. 본래라면 웃기는 소리 말라며 에반젤린을 몰아넣었을 시청자들이지만 보는 이들조차 섬뜩하게 할 정도의 추격전에는 제법 지친 듯 보였다.
-동물의 집 같은 건 없음?
“잠시만…… 아 여기 하나 있다.”
에반젤린이 반투명한 창 하나를 카메라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거 어때요?”
-오.
-이건 뭐임?
에반젤린이 찾은 것은 힐링 게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잔잔한 농사게임이었다.
아기자기한 외향의 NPC들이 있는 게임에는 바퀴벌레나 괴물이 나오진 않겠지.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찬동을 얻어 게임을 링크하자 빛무리로 된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와아…….”
그녀의 눈에 척 봐도 따뜻하고 힐링이 되는듯한 풍경이 나타났다.
“세상에 처음부터 이런 거나 할걸.”
힐링 게임이라는 것에 신이나 이것저것 해보는 에반젤린과 달리 시청자들 중 일부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거…… 미완성이라고 붙어있던데. 괜찮은 거 맞음?
-아직 모른다. 뭐가 나올지.
-숨 참는다. 흡!
물론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젤린은 기본적인 튜토리얼을 끝낸 뒤 게임을 시작했다.
미완성이라는 경고문구와 현실 농사라는 게 마냥 힐링이 아니라는걸 모른 채로 말이다.
* * *
에반젤린이 선택한 농사게임에는 아직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다.
게임에는 모드가 여럿 존재했는데. 극한의 현실 모드가 존재했고, 초보자들을 위한 게임 모드가 존재했다.
물론, 그 외에 현실과 닮았다곤 해도 현실과 달리 게임적 요소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말이다.
“와…… 농사가 쉽지 않네…….”
-생긴 건 부잣집 아가씨인데 논에서 일을 하는 모습. 이거 귀하거든요.
-클립 따놨거든요. 죄다 수출할 거거든요.
“수출하지 마요. 앵무새들 저리 가.”
맨손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에반젤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힐링 되는 건 좋은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중노동인데? 힘들진 않아도 정신이 피곤해.”
-그럼, 농사가 쉬울 줄 알았음?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 이 말이야.
-아니, 솔직히 게임요소가 꽤 있는데도 이 정도임?ㅋㅋㅋ
“안 되겠다.”
결국, 에반젤린은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려 드러난 새하얀 다리를 찰박거리며 논 밖으로 걸어 나갔고 NPC가 대기하고 있는 한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는 뭔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이내 그녀의 앞에 거대한 기계 하나를 소환한다.
“역시 농사는 기술력 싸움이지.”
-ㅋㅋㅋㅋㅋㅋㅋ미친 ㅋㅋㅋ결국 구매했죠?ㅋㅋㅋ
-처음에 이런 거 쓰면 낭만이 없다던 방장 찾습니다.
처음 튜토리얼을 할 때 에반젤린은 손수 짓는 농사는 낭만이다 말했지만, 현실에 치여 타협을 하고 말았다.
그르르릉!! 소리를 내며 장비를 가동시킨 에반젤린은 신나하며 그대로 논으로 돌진했고,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농사를 이어나간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심심하지 않게 사운드를 꽉꽉 채워 넣었다.
“전에 이야기했던가? 우리 아빠가 처음 영지 발전시킬 때 제일 먼저 손댄 게 약초사업인 거?”
-??
-처음 들었네.
“달의 풀이라고 있어요. 대륙에서 굉장히 많이 쓰이는 약초인데, 예로 들어도 연금학회 마탑 신전 안 쓰는 데가 없거든.”
-그럼 다른 곳에서도 다했을 거 아님.
“그게 안 되죠. 달의 풀이 비싼 이유는 공급이 압도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이야 엄청 싸지긴 했지만, 옛날에 달의 풀은 생산 가능지역이 극단적이고 생산 성공률도 낮을 정도로 극악의 식물이라 매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하인스 영지의 기후를 조절해버리면서 달의 풀이 자라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버린 거죠.”
-떡잎부터 사기 치네.
-뭔 ㅋㅋㅋㅋ
“어쨌든. 그거 덕분에 하인스가 점점 큰 게 사실이니까요. 지금에 와서는 다른 사업도 많이 한다지만 그 당시엔 그게 하나의 기둥이었어요. 물론 나는 지금에 와서 본 게 전부지만.”
물론 그래 봐야 역사가 5년도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쨌든 농사라는 게 참 중요하잖아요? 결국, 먹을 것들을 만드는 숭고한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농촌 일이라는 건 굉장히 좋게 보고 있지만…….”
말을 끝낸 에반젤린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직접 하는 건 역시 힘들단 말이죠…….”
키득거리던 그녀가 문득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이후 에반젤린은 게임요소를 활용해 농사를 서서히 날로 먹기 시작했고, 완성된 작물들을 무더기로 팔아 새로운 장비를 사는 등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다.
“보통 1년 걸리는 농사가 짧게 끝나니까 미묘하긴 하네.”
-사실 힐링은 좋은데 너무 밋밋하긴 함.
-그나저나 방장 이젠 밀짚모자 꽤 잘 어울리게 됐네.
“그렇죠? 어때요?”
반으로 접어 올린 바지나 흙이 여기저기 묻은 티셔츠 그리고 커다란 밀짚모자를 자랑하며 그녀가 키득거렸다.
굉장히 후줄근한 디자인이지만 옷걸이가 다르니 느낌부터 다르다는 게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까 싶었다.
“그나저나 이것도 슬슬 질리네요. 너무 단조로워서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자 시청자들의 반응이 반으로 갈린다.
일부는 동감하는 이들이었고 일부는 꼭 그렇게 말하면 사고가 터진다며 우려를 표하던 이들이었다.
쿵!!!
그리고. 현실은 후자가 맞았다.
“어?”
갑작스러운 굉음에 트랙터를 멈추고 고개를 돌린 에반젤린이 밀짚모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 수억 수백억에 달하는 메뚜기 때가 순식간에 에반젤린이 열심히 만든 작물들을 모조리 갉아먹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이다.
“아…… 안돼! 안돼! 이딴 게 어딨어!”
허겁지겁 트랙터에서 뛰어내려 뛰어가 보지만 그녀가 여기저기 이름까지 지어주며 열심히 기른 작물들 대부분이 넝마가 된 후였다.
“안돼! 크리스! 맥스! 으아아!”
울먹거리며 깔끔하게 갉아 먹혀버린 벼들을 보던 에반젤린의 얼굴에 절망이 서린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버그라도 걸린 것인지 어느 쪽에선 대량의 고라니들이 산에서 내려와 그녀의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괘애애액! 소리를 내며 에반젤린을 놀리듯 작물을 짓밟고 먹어치운 뒤 도망가버리는 고라니들과 대체 왜 또 오는데 싶을 정도로 갑자기 밀려오는 메뚜기 떼.
눈앞에서 소중하게 기른 작물들을 모조리 빼앗기기 시작한 에반젤린의 눈에 살기가 서린다.
“저 개자식들 싹 다 묻어버려야겠어.”
작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그녀가 성큼성큼 가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병충해 방지 항목을 열었고…….
-미친…….
-이거 힐링 겜이라며…….
-레일건이 왜 있음????
-행성 방어용 다이슨스피어도 있는데요?
-저기 아직 미해금 된 ??? 암만 봐도 우주 전함 아님?ㅋㅋ 농작물 털어먹으려고 외계인까지 오냐?ㅋㅋㅋ
이 게임이 단순한 힐링 게임이 아님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