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화. 박제(剝製) (23)
“오크 통 옮겨!”
“빨리, 빨리!”
오크 통의 수도꼭지를 틀자 폭포수처럼 흩어지는 포르말린의 강한 냄새를 맡은 단양형사들이 날래게 움직여 통들을 옮긴다. 이런 경우 오크 통 뒤에 숨겨진 공간이 있기 마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손에 묻은 포르말린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김연주가 손가락 냄새를 맡고 있는 내 팔을 붙잡는다.
“중추신경의 억제나 호흡곤란, 신장장해 등의 급성 독성이 있을 수 있어요.”
소량을 냄새만 맡는 정도로 그렇게 될 리는 없지만 일단 조심하라는 뜻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단양형사들과 함께 통을 밀어냈다. 모든 통에 약품들이 가득 들어 있어 그런지 무게가 엄청나다. 김연주가 통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성의 힘으로는 움직이기 어렵다.
“이 정도 양이면 통 당 300리터는 들어가겠죠?”
대강 눈대중으로 보니 그쯤은 될 것 같다. 통당 300리터. 얼핏 세어 보아도 마흔 개는 넘어 보이는 통들. 이 모든 통에 약물이 저장되어 있다면 만 이천 리터 이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사들이 낑낑대며 통을 밀어내고 있지만 통이 너무 무거워 하나를 옮기는데 네 명은 달라붙어야 했기에 속도가 더디다.
형사 중 한 명이 도저히 안되겠는지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한다.
“단양성당으로 전경 2개 중대만 지원 보내, 지금 당장.”
전경이면 군인인데. 새벽녘이라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인데 비상 사이렌과 함께 벌떡 일어날 젊은 군인들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감이 든다. 지원을 불렀다고 손 놓고 놀고 있을 수 없으니 열심히 통을 옮기고 있기를 삼십 분 가량. 곧 천장에서 수를 셀 수 없는 군화 소리가 들려온다. 전경 중대가 도착한 모양이다.
중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인사를 나눈 형사들이 지시를 하자, 장정 240명이 한꺼번에 통을 옮기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힘 좋은 나이에 훈련까지 받은 군인들이 투입되자, 오크 통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통이 사라지고 뒤에 벽돌로 지어진 벽이 나왔을 때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단단한 벽돌 벽이 보일 뿐, 동굴이나 통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신도 보이지 않는다.
전경들과 함께 통을 옮기느라 땀범벅이 되어 주저앉아 버린 단양형사들도 허탈한 표정이 된다. 김연주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중앙 테이블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하.. 이제 어쩌죠?”
나라고 뾰족한 수는 없다. 분명 여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일단 장진수가 다량의 약품을 저장하고 있는 공간은 알아냈으니 영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텅 빈 벽돌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기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장진수의 기억 속에서 부른 노래와 일치하는 곳은 여기 뿐이야. 내가 뭘 놓쳤지? 뭐가 더 있는 걸까?
지쳐 바닥에 널브러진 형사들의 원망 섞인 시선 속에 선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놓친 단서. 그건 분명 내가 읽은 기억들과 그와의 대화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뇌리에 장진수와 나눈 모든 대화를 떠올려 보고도 아무 것도 잡아내지 못했다.
“하···”
어디야? 도대체 어디에 시신을 숨겨둔 거냐? 나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와의 내기에서 진 걸까? 내기도 내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 나는 그의 비웃음 앞에 설 수밖에 없는 걸까? 이대로 희대의 살인마를 세 건의 엽기적인 살인만 저지른 범인으로 검거할 수밖에 없는 걸까?
고개 숙인 내 앞에 발 한 쌍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검은 남자 구두다. 고개를 들어보니 상진성당 신부님이 날 내려보고 계신다.
“신부님···”
어릴 때 신부님과 수녀님 손에 커 맹목적인 존경심을 가진 나는 꼭 실패한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 어리광을 부리듯 한숨을 쉬었다. 신부님은 아무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주신다. 큰 위로의 말은 없었지만 따뜻한 그의 손이 내게 위로가 된다.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형제님.”
“·····················.”
나는 고개를 들어 신부님을 올려 보았다. 짧고 뻔한 위로의 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이 분 밖에 없다.
“감사합니다, 신···.”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려던 바로 그때, 내 눈에 신부님의 옆구리에 끼워진 성경책이 보였다.
‘장진수는 강상원의 살해 현장에 누가복음을 남겼다!’
의미 없는 단서는 없다. 그냥 종교에 미친 돌아이가 살해 현장에 그런 글귀를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유일하게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던 것이 바로 현장에 남은 성경구절.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신부님의 손을 붙잡았다.
“누가복음, 잘 아시죠?”
신부님은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이내 말했다.
“예, 물론입니다.”
“24장에 대해 아십니까?”
성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모든 신부님을 웃음짓게 하는 모양이다. 우리 보육원 신부님도 그랬듯 상진성당의 신부님도 마찬가지로 빙긋 웃는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지요.”
부활과 승천?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잇는 최종 메시지이긴 하지만 누가의 기록은 예수의 부활이 허구가 아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들어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부님의 말씀을 끊지는 않았다. 그가 계속 말을 잇는다.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과 승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연주는 나와 신부님의 대화가 장진수가 사건현장에 남긴 성경구절 때문임을 알고 끼어 들어 물었다.
“보혜사가 뭐예요, 신부님?”
신부님이 웃으며 말했다.
“보혜사(保惠師). ‘도울 보, 은혜 혜, 스승 사’자를 써서 ‘은혜로 돕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대부분 성령님을 뜻하지요.”
성령. 이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느님을 이루는 세 위격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느님이 사용하는 강력한 영, 즉 활동력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빠져 들었다. 장진수는 단순히 쾌락만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성령이라 믿는 마음 속 목소리를 따라 살인을 저지르며 그것이 신성한 의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건과 누가복음 사이에 연결점을 이해하지 못한 김연주가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종교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신부님의 성경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성경 좀 빌려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신부님이 내미는 성경.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날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고 있는 형사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단서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누가복음 24장을 찾아 1절부터 읽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첫 구절을 보고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돌을 무덤에서 굴려 옮긴 것. 그것은 오크 통을 옮긴 것과 마찬가지다. 통을 옮겨도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그때 누군가가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묻는다. 장진수에게 자신이 만든 작품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절대 죽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제길, 처음부터 성경을 확인했어야 했다.
김연주가 성경을 확인하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경위님, 갑자기 뭐 하시는 거예요?”
그래, 당신들 눈으로 보기엔 내가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그렇지만 기다려. 반드시 이 안에 답이 있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형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 잠도 못 자고 나왔는데 허탕이네.”
“이게 도대체 뭘 하는 짓인지. 신성한 성당 다 망가뜨렸는데 겨우 용액만 찾았네.”
원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들끼리 숨 죽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워낙 조용한 곳이라 그들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귀를 파고든다. 나는 잠시 고개를 털어 다시 집중력을 돋우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신경 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손에 침을 발라가며 성경을 넘겨 보기를 몇 분. 나는 어느 대목에서 눈을 멈췄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나는 벌떡 일어나 신부님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신부님!”
책을 너무 가까이 들이밀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신부님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여기, 24장 23절. 이거 무슨 말입니까?”
“···············..”
신부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날 한참 보다 품에서 돋보기를 꺼내 쓴 후 성경구절을 읽어본 후 말했다.
“음,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라는 말과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한' 일은 1에서 8절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천사? 천사를 만났다고?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오크 통으로 들어찬 지하공간. 방금 전경 중대가 치워준 한쪽 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에 아직도 많은 오크 통들이 세워져 있다. 나는 전면에 보이는 오크 통을 슬쩍 밀어보았다. 비어 있는 통이라 쉽게 흔들린다.
“전경중대! 벽에 있는 모든 오크 통을 치워 주세요.”
전경들이 자신의 중대장 눈치를 본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중대장이 단양형사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자주 보는 사이라 유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형사들 중 리더가 날 가만히 바라본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밤새 수색을 하고도 별 다른 수확이 없으니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다.
“여기 뭐가 있는 건 확실한 겁니까?”
상대는 나보다 계급이 낮지만 나이는 훨씬 많은 연륜 있는 형사다. 계급만 높은 애송이 형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가뜩이나 고까울 것인데 지금껏 잘 따라준 것이 고맙긴 하지만 마지막 한번만, 한번만 더 따라줘.
나는 그의 말에 답하기 전, 신부님을 보았다.
“이 성당에 천사는 어디 있습니까?”
내 질문에 순간 다들 날 미친놈 바라보듯 한다. 하지만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예배당 창문에도 계시고, 십자가 양 옆에도 계시지요.”
예배당 창문에 있는 건 그림일 것이고, 십자가 양 옆에 있는 건 조각일 것이다. 그런 곳에 비밀공간을 만들 순 없으니 반드시 여기 있다. 나는 다시 단양 형사의 리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여기 있습니다. 한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계급으로 들이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고개까지 숙일지 몰랐는지 움찔 놀라더니 한참 날 바라보다 결국 전경 중대장을 향해 눈짓한다. 그러자, 마침내 중대장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중대! 전원 오크 통을 중앙으로 옮긴다. 벽이 보이도록 가운데로 옮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