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85화 (85/328)

제 85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20)

고시원 뒤편 포장마차.

언제나 그랬듯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타난 강혁 아저씨와 한잔 하는 자리. 나는 독한 소주를 한번에 털어 넣은 후 한숨을 쉬었다. 나는 보통 한잔을 두 번에 나눠 마시는 버릇이 있다. 술에 취하는 걸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벌써 다섯 잔이나 한번에 털어 넣었지만 아직 술이 취하지 않는다.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가는 독한 소주 맛이 오늘따라 아무렇지 않다.

“하···”

아저씨는 내 앞에 앉아 팔짱을 끼고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잔을 부딪히곤 함께 마셔 주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지켜봐 주시는 아저씨. 뭔가 물었다면 속 시원하게 가슴 속에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구멍들에 대해 토로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아저씨는 말이 없다.

나는 스스로 잔을 가득 채운 후 아저씨의 빈 잔을 채웠다. 채워 놓고 보니 버릇없이 지금껏 아저씨가 채워준 잔을 넙죽넙죽 받아만 마셨네. 아저씨 잔을 채워 드린 것이 처음이구나. 제길,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죄송해요.”

주어가 생략된 사과였지만 강혁 아저씨는 씩 웃는다.

“됐다.”

“··················”

“새끼, 형사 다 됐네?”

“하···”

“독한 소주 마시며 씁쓸한 속 달랠 줄도 알고, 우리 꼬마 도경이가 다 컸네, 다 컸어.”

언제나 따뜻한 아저씨. 하지만 오늘은 그 따뜻함이 마음까지 와 닿지 않는다. 김상식. 이 씹어 죽여도 모자란 새끼가 엄청난 변호사들을 고용해 법망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생각을 하자, 또 속이 타는 듯하다.

“한숨 밖에 안 나오네요, 정말.”

강혁 아저씨가 미소 짓는다.

“왜? 김상식이 변호사 앞세워 빠져나갈까 봐?”

아저씨의 웃음. 나는 순간적으로 아저씨의 얼굴과 김상식의 이죽거리는 얼굴이 겹치는 환상을 보았다. 그 씹어 죽일 새끼의 말이 떠오른다.

'낄낄, 너희 실수했어.'

'마약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

'뭐, 한 6년 살겠지. 소름 끼치는 거 말해줄까, 아저씨?'

'나 6년 살고 나와도 30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갱생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그 실수가 씻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리고 범죄자에게서 갱생은 커녕 반성의 기미도 안 보인다면 어찌해야 할까? 김상식은 부모와 조카를 죽였다. 그리고 부모의 재산을 가로챌 생각으로 동생 앞에서 거짓 연기까지 했다. 그런 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란 것을 인정하기도 싫은 마음이다.

“하···.”

다시 한숨을 쉬는 날 지그시 바라본 아저씨가 내 속을 더 긁는다.

“마약투약 혐의를 경찰이 밝혔지. 필리핀에서 했다는 보고서도 봤다. 해외에서 마약을 투여했고, 1회에 한해 인정했으니 그건 형 나와봐야 얼마 안 살 것이고. 마약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 살인을 했다면 존속살인이라도 감형된다.”

“·····················”

하, 나도 압니다, 아저씨. 그러니 지금 이 꼴로 술이나 퍼 마시고 있죠. 강혁 아저씨가 말을 잇는다.

“게다가 그 새끼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변호사가 소속된 사무실은 국내 굴지의 로펌이다. 최대한 형기를 줄이려 할 거야. 심하면 교도소 대신 정신병원에서 편하게 수감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

씨발, 진짜 그렇게 된다고? 죽을 똥을 싸며 잡았는데 내가 그 새끼 정신병원 가서 치료받게 하려고 개고생을 하며 잡은 줄 알아? 강혁 아저씨는 구겨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실소를 짓는다.

“법대로 하면 그렇지, 법대로.”

나는 강혁 아저씨를 가자미 눈으로 째려보았다.

“놀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지금 놀리고 계시잖아요.”

“아닌데?”

“하···”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강혁 아저씨가 오늘따라 얄밉다. 다시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 날 가만히 보는 아저씨.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 버렸다.

“그래요, 법대로 하면 그렇게 되겠죠. 처음으로 법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이 경찰이란 직업에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 새끼를 쏴 죽이고 싶었어요.”

경찰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날 이해해줄까? 아님 저런 사람은 경찰의 자질이 없다 욕을 할까? 나도 사람이다. 나도 당신들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강혁 아저씨는 푸념을 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아까 말했지? 법대로 하면 그렇다고.”

“··················.?”

무슨 말일까? 그럼 범죄자를 법대로 처리 안 하면?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까? 설마 이 아저씨. 영화에서나 보던 직접 범죄자를 죽여버리고 그게 정의라 믿는 경찰은 아니겠지? 내 미심쩍은 눈빛을 받은 아저씨가 실소를 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 자식아.”

“법대로 처리 안 하면 어떻게 합니까?”

“킬킬···”

강혁 아저씨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 마.”

“··················..”

겨우 그딴 걸 조언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래, 겨우 경찰 나부랭이가 뭘 할 수 있겠어?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겠지. 경찰인 내가 할 일은 여기가 한계다.

“후···”

속이 쓰리다. 꼭 내장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기분이다. 강혁 아저씨가 까칠한 수염을 문지르며 씩 웃는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도경아.”

“··················”

“너나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그 새낀 자멸할 거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소주 잔만 노려보고 있던 내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자 아저씨가 미소 짓고 있다.

“무슨 말이예요?”

강혁 아저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김상식이 감형을 받기 위한 필요 조건이 무엇인지 몰라?”

김상식이 감형을 받기 위한 조건. 마약투약으로 인한 심신미약이다. 이건 이미 경찰이 증명해 줬다. 이걸 어떻게 뒤집지? 변호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새끼 일단 잡아 족치자는 생각으로 마약 쪽으로 몰고 간 게 잘못이었어요.”

“킥킥, 그거 최영현 생각이지?”

“·········.. 그건 그렇지만 저도 동의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최영현 탓이라는 게 아니다, 인마.”

“··················..”

강혁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마약투약으로 인한 심신미약. 그게 감형을 받는데 있어 가장 큰 조건일까?”

“아닙니까?”

“아니다.”

응? 아니라고?

“그럼 뭐가 첫 번째 조건이예요?”

강혁 아저씨가 포장마차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내민다. 잠시 내 눈을 바라보고 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강한 힘을 가진 법률사무소다.”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김상식은 국내 굴지의 로펌에 변호를 맡기고 있다. 솔직히 심신미약에 대한 부분도 그들이 아니면 제대로 주장을 펼 수 없을 것이다. 김상식이 인정한 마약투여는 단 1회. 그것도 2년 전에 필리핀에서 투약을 인정했다. 다른 법률 사무소였다면 그렇게 오래된 투약혐의로 심신미약을 인정받을 수 없겠지만 김상식의 로펌은 다르다. 최영현의 말에 따르면 비슷한 다른 사건에 감형을 받은 판례를 이미 만든 전적이 있는 로펌이라고 했다.

“후··· 그래서요?”

강혁 아저씨는 생각해 보라는 듯 눈짓한다. 도대체 뭘 생각하라는 거야? 이미 궁지에 몰릴 만큼 몰렸는데.

“그냥 이야기해줘요.”

“씁, 자꾸 이러면 버릇 나빠지는데.”

확, 그냥 상 뒤엎기 전에 말해줘요. 지금 짜증이 한껏 치솟은 상태라고요. 내 눈빛이 사나워지자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눈 깔아, 인마. 내가 네놈 상사다. 어디 경위 나부랭이가.”

“··················.”

흠, 그렇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 아빠나 삼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수사본부장이다. 게다가 얼마전에 치안정감으로 승진까지 했다고 했다. 나 같은 경위 나부랭이는 겸상할 수도 없는 높은 양반이었다. 내가 슬쩍 눈에 힘을 풀자, 강혁 아저씨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로펌··· 말은 좋지. 그런데 변호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법조윤리? 억울한 사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

뭘 물어요, 그건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고.

“돈이요.”

강혁 아저씨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돈이다. 물론 모든 변호사가 그렇지는 않다. 진짜 정의의 편에 서서 약자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도 있다. 그렇지만 김상식의 변호를 맡은 법률사무소 같이 보유 변호사 수가 30명이 넘는 대형 로펌은 반드시 수익을 내야 사무실이 굴러 가지. 그러다 보면 돈을 쫓게 되어 있다.”

“하··· 당연한 소리 그만 하시고요.”

강혁 아저씨가 눈짓하며 웃는다.

“여기까지 와도 전혀 모르겠냐?”

“··················.”

지금 나랑 스무 고개 하는 겁니까? 법률 사무소가 돈 많은 놈에게 붙는 게 뭐가 이상해? 당연한 거 아닌가? 김상식이 재판에서 승소를 하면 그들은 승소에 대한 수당을 더 챙길 거다. 아마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라면 김상식이 엄청난 금액을 약속했겠지. 단순히 변호를 맡는데 드는 수임료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승소까진 아니더라도 김상식이 원하는 만큼의 감형이 이루어진다면? 법률 사무소의 수익은 엄청날 것이다.

김상식 새끼 돈 좀 쓰겠네. 아버지 재산이 워낙 많으니 어차피 티도 안 나겠지만. 그런 새끼가 또 다시 사회에 나온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난다. 돈 몇 푼 쓰고 죄를 사면 받다니.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을까? 김상식의 감형은 1년당 얼마일까? 10억? 20억? 법률사무소는 얼마나 챙기게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자,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

나는 급히 강혁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가 씩 웃는다.

“이제 알겠냐?”

“···············.”

이런 바보 같은! 이건 내가 김상식 놈에게 내 입으로 말해준 법인데!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민법 제 1004조,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사람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고 한 사람은 상속에서 제외된다···”

강혁 아저씨가 웃음 짓는다.

“킥킥, 이제 기억 났냐?”

“·····················”

“김상식은 상속에서 제외된다. 그건 감형을 받든 말든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지. 그 새끼가 운이 좋아서 정신병원에서 형을 살든 빵에 가든 전혀 상관없어. 심신미약이라도 어쨌든 존속살인에 대해서는 밝혔으니까.

그 새끼는 상속에서 제외된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깨닫게 되었다.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단한 법률사무소가 이걸 모를까?”

“··················”

변호인단은 돈으로 움직이는 거다. 그런데 자신들의 의뢰인이 빈털터리가 될 것이 확실하다면? 과연 법률사무소가 계속 김상식의 변호를 맡을까? 절대 아니다. 강혁 아저씨가 소주 잔을 들며 말했다.

“지금쯤 벌써 다 내뺐을 거다. 김상식은 변호인도 없이 전전긍긍하다 결국 다른 변호사를 찾겠지. 그런데 무일푼이란 말이야? 있는 거라고는 마피아에게 진 빚 뿐이지. 누가 변호를 맡을까? 남은 건 국선 변호사야. 국선 변호사가 굳이 존속살인범의 심신미약 혐의를 파 감형 받아 주려고 할까? 아니다.”

강혁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랑 내기해도 좋아. 난 그 새끼 무기 징역에 30만원 건다. 어때?”

마음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그렇게 믿고 있던 변호사들이 꽁지를 빼고 달아난 뒤 혼자 남은 김상식의 당황한 얼굴을 떠올리자 타버렸던 마음에 시원한 물 한사발을 끼얹은 기분이다. 나는 순식간에 좋아진 기분에 날아갈 듯하다. 나는 강혁 아저씨와 잔을 부딪히며 씩 웃었다.

“저도 무기 징역에 30.”

잔을 부딪힌 강혁 아저씨가 얼굴을 구긴다.

“뭐, 인마? 둘 다 같은데 걸면 내기 성립이 되냐?”

“하하.”

“뭘 웃어, 아 젠장 괜히 가르쳐줬네. 내기부터 하고 알려줄 걸.”

“킬킬.”

“웃지 마, 인마!”

다르게 말하면 김상식에게 아직 돈이 있다면 상황은 변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오늘만은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옆에 강혁 아저씨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얼굴이 벌개져서 고함을 치는 아저씨의 얼굴이 어쩐지 귀엽다.

“넌 인마! 다른 데 걸어! 어? 이 새끼 계속 웃네? 나랑 한판 뜰래,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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