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 화. 목소리(Voice) (1)
두 달 뒤.
드디어 구치소에 있던 김상식의 판결이 떨어졌다. 판결은 모든 항소를 기각하며 무기 징역 확정. 나는 이 마음 시원한 장면을 보기 위해 법원까지 출두했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을 때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김상식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시원할 줄 알았지만 나는 조금 찜찜하다.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영현에게 속삭였다.
“결국 검찰도 12세 조카의 방화치사혐의는 못 밝혀 낸 겁니까?”
최영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예, 김상식 저 새끼가 조카가 집에 있는지 몰랐다는 일관된 진술을 하는 바람에 방화치사는 빠졌습니다.”
구형은 무기징역. 조카의 방화치사 혐의가 인정되었다면 사형까지 구형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도, 검찰도 그 사실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을 읽었던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분명 그 자식은 화장실에서 벌거벗고 나와 거실에서 잠들어 있던 조카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었다.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집에 불을 지르면 조카도 죽는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범행을 부정했다.
나는 구형이 끝나고 재판장들이 나간 후 교도행정국 직원들에 의해 끌려 가고 있는 김상식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더 능력 있는 경찰이었다면 꿈도 펼치지 못하고 죽은 아이의 억울함도 풀어줄 수 있었을 텐데.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지만 많이 아쉬운 사건이다.
판결을 취재 왔던 기자들도, 관객들도 모두 퇴장하고 있는 재판장. 우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가기 싫었기에 좀더 자리를 지켰다. 여러 사람들이 옆을 스쳐가는 도중 누군가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진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정연 전무이사님.”
죽은 이혜연씨의 언니이자 AB전자의 전무이사 이정연이다. 언제나 그랬듯 남편과 함께 있는 그녀는 약간 초췌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형사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조카 분 방화치사 혐의까지 밝혀내지 못해 송구합니다.”
조카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나오는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는 이정연. 나이 든 여성이지만 관리를 잘했는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정연의 실제 나이는 65세다. 잠시 눈물을 훔친 이정연이 코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혜연이 죽음을 밝혀 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드려요, 형사님.”
이정연이 내 뒤에 있는 최영현에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쪽 형사님도 감사합니다.”
최영현이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이정연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접대를 못 받게 되어 있어서.”
이정연의 남편이 나서며 내 어깨를 붙잡는다.
“3만원만 안 넘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마침 점심 때인데 칼국수라도 한 그릇 합시다. 3만원 안 넘는 걸로. 됐죠?”
음, 뭐 그런 거면 괜찮은데. 2만 9천원짜리 칼국수 없나? 기왕 먹는 건데.
**
한 시간 뒤, 법원 주차장.
최영현이 이쑤시개를 물고 너스레를 떤다.
“이야, 내가 살다 보니 AB전자 전무이사가 사주는 밥을 다 얻어먹어보네. 방금 그 칼국수 진짜 괜찮네요. 근데 무슨 칼국수가 2만 5천원이나 한답니까?”
진짜 2만원 넘는 칼국수가 있다니. 모든 재료가 유기농이라고 하긴 하는데··· 마트에서 사면 3천원이면 살 것 같은 양의 바지락이 든 칼국수가 그렇게 비쌀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부자들의 생활은 역시 우리와 다르구나. 뭐 대충 가게 인테리어 값인가 보다. 우리 테이블을 기준으로 반경 5미터 안에 다른 테이블이 없을 만큼 크고 넓은 식당이었으니까.
최영현이 주차된 차에 기대 담배를 문다. 판결이 날 때까지 지난 두 달간 두 개의 사건을 더 함께해 이제 내가 담배를 태우지 않는다는 걸 아는 최영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경위님.”
“예.”
“내 이제 경위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랍니다.”
“··················..”
“이번에 진짜 놀랐습니다.”
뭐, 인정해주면 고맙고. 근데 이 사람 날 보는 눈빛이 왜 이래? 그런 눈빛은 집에 가서 아내한테나 던지라고, 이 양반아. 부담스럽게. 최영현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말했다.
“서로 가시죠. 이정호 계장님 호출입니다.”
“저희 둘요?”
또 최영현과 함께 사건을 맡으라는 걸까? 꽤 능력 있는 아저씨라 같이 다니는 게 나쁘진 않다. 이제 내 말도 잘 들어준다. 문제는 저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이제 그만 편한 관우나 연주와 함께 하고 싶은데. 최영현이 재떨이에 담배 꽁초를 던진 후 말했다.
“아뇨, 강력 3반 전체 소집이요.”
잠시 후 이정호 계장 사무실.
관우, 연주가 먼저 와 있는 사무실에 들어와 이정호 계장에게 경례를 하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정호 계장이 웃으며 자리를 권한다.
“어, 앉아라.”
나와 최영현이 자리에 앉자 대뜸 재판결과부터 묻는 이정호 계장.
“김상식 재판결과는?”
“무기징역입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관우가 슬쩍 엄지를 치켜 세운다. 연주도 잘했다는 눈빛을 보내온다. 이정호 계장은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요즘 강력 3반 실적이 아주 좋아. 다들 잘해주고 있다.”
금일봉이라도 주려는 건가? 이정호가 계장이 된 후로 팀장이 없는 우리 팀은 회식하기도 힘들다. 오랜만에 금일봉이라도 받으면 회식이라도 할 텐데. 이정호가 우리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 전체 호출한 건 다름이 아니고.”
이정호가 잠시 뜸을 들인 후 깍지를 낀다.
“강력 3반을 더 이상 팀장 없이 돌리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런다. 이제 슬슬 팀장을 앉혀야 되는데. 외부에서 뽑아 오기도 그렇고. 자체 해결이 제일 좋겠지?”
다들 말이 없다. 이정호 계장이 나와 최영현을 번갈아 본다. 당연한 이야기다. 연주와 관우는 아직 경사다. 나와 최영현 둘 중 하나를 뽑아야 하는데 둘 다 계급이 같다. 최영현이 나보다 경험이 많으니 아마 팀장 자리는 그가 가져갈 거다.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최영현은 이제 내편이니까 일하는데 방해는 안 될 거다.
이정호 계장은 최영현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민주적으로 하자, 투표 어때?”
뭔 팀장을 투표로 뽑습니까, 그냥 임명이지. 최영현이 씩 웃으며 손을 든다. 이정호 계장이 반갑다는 듯 말했다.
“오, 최영현 출마?”
모두의 시선을 받은 최영현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뇨, 추천이요.”
“응?”
최영현이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현도경 경위님을 추천합니다.”
이정호 계장이 놀란 얼굴이 된다. 아니, 이 순간 제일 놀란 건 나다. 연주와 관우 녀석은 별로 놀라지 않고 당연하단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호 계장이 나와 최영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도경이를?”
최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하게 말한다.
“팀장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뭐··· 그렇지?”
최영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현 경위님이 하시는 게 맞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최영현의 질문에 연주와 관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정호 계장은 눈을 깜빡이며 상황 파악을 하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게 눈짓한다.
“와, 새끼. 사회생활 잘했나 보네.”
사회생활을··· 내가 뭘 했더라? 다 강혁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정호 계장이 소파 팔걸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긴 도경이 녀석이 제 공도 팀원들과 나누는 녀석이긴 하지. 강력계 온지 얼마 안 됐는데 굵직한 사건도 몇 개 해먹었고.”
연주는 단양연쇄살인사건, 관우는 영덕의 노인 연쇄살인사건, 최영현은 최근에 발생한 존속 연속살인사건을 함께 했다. 다들 사건을 함께하며 나에 대한 처우가 바뀐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이 우리 팀의 전부였구나.
관우가 넉살 좋게 입을 열었다.
“현 경위님이 팀장님 되시면 우리 팀 실적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계장님!”
이정호 계장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벌써 줄 서는 거냐?”
“아이고! 저 그런 놈 아닙니다.”
“킥킥. 연주 넌?”
김연주가 날 힐끔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전 단양 사건에서 경위님의 수사 방식을 봤습니다. 물론 저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이었지만 경위님은 항상 옳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팀장이라면 항상 팀원들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호 계장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최영현을 바라본다.
“괜찮겠어?”
최영현이 우리 중에 경력이 제일 긴 사람이고, 계급도 같기에 묻는 것이리라. 최영현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살면서 누군가 이렇게 인정해 본 건 처음이라. 저도 제가 신기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믿고 뒤를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허, 이 사람들. 처음 강력계 왔을 때 그렇게 갈구더니. 이젠 떠받들어 모시네. 이정호 계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날 바라본다.
“현도경.”
“예, 계장님.”
“어때? 강력 3반 맡아 볼래?”
모두가 날 바라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단지 단독수사를 하는 것과 팀을 움직이는 건 다른 이야기인데.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최영현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인다.
“뭐 하세요? 대답 안 해요?”
나는 팀원들을 한 명씩 바라보다 이정호 계장과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계장님.”
이정호 계장이 박수를 친 후 말했다.
“좋아, 이 시간부로 현도경을 강력 3반 팀장으로 임명한다. 다들 잘 따르고, 그만 가서 일들 봐. 도경이 넌 남고.”
모두가 웃음을 지으며 일어난다. 관우 녀석은 나가면서도 연신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 있고, 연주는 그런 관우의 엉덩이를 찬다. 최영현은 씩 웃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가고 있다. 그들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정호 계장이 둘만 남겨진 사무실에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새끼, 아주 잘하고 있네. 좋겠다? 강력계 6개월 만에 팀장 단 소감이 어때?”
“좀··· 얼떨떨합니다.”
“킬킬, 그렇겠지. 자, 받아라.”
이정호 계장이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낸다.
“금일봉이다. 원래 김상식 사건 때문에 주려고 한 건데. 그냥 이걸로 팀장 턱이나 쏴. 최영현 새끼가 아무리 많이 처먹어도 소고기 사줄 돈은 될 거다.”
“감사합니다, 계장님.”
얼마일까? 팀장은 처음 해보는 것이니 금일봉 같은 것도 처음 받아 본다. 당장 액수를 확인해 보고 싶지만 계장 앞에서 돈 세고 있는 꼴을 보일 순 없겠지. 안주머니에 돈봉투를 넣고 소중히 감싸는 걸 본 이정호 계장이 실소를 짓는다.
“야, 너 고시원 산다며?”
“예.”
“그냥 대출받아서 전세 나와, 인마.”
“어차피 들어가서 잠만 자는데요.”
“고시원에 들어 앉아 있으면 여자친구가 생기겠냐? 월세라도 네 집이 있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 인마.”
하, 강혁 아저씨도 그렇고 이 아저씨도 그렇고. 왜 다들 내 결혼에 관심이 많은 거냐? 남이야 결혼을 하든 말든 뭔 상관이래? 나는 대충 웃음 지으며 얼버무렸다. 이정호 계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까진 회식하고, 내일부터 새 사건이 배정될 거다.”
“몇 갭니까?”
“하나.”
“저와 최 경위가 맡으면 되겠네요.”
“아니, 넷 다 붙어.”
“연주와 관우는 도박장 폭행치사 사건 맡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 오늘 아침에 검찰 송치했어. 이거 봐. 팀장이 없으니 돌아가는 사정이 서로 공유가 안되잖아. 더 빨리 뽑았어야 되는데 씁.”
“························.”
혀를 차는 이정호 계장.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살인.”
제길, 종로가 무슨 고담 시티도 아니고 뭔 놈의 살인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냐?
“연쇄는 아니죠?”
“어, 피해자는 한 명이다.”
음, 크게 어려운 사건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건 이야기를 하자 이정호 계장의 표정이 불편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특이점이 있는 사건입니까?”
이정호 계장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쉰다.
“진짜 말세가 오려는 건가? 왜 이렇게 상 돌아이들이 설치지?”
무슨 말일까? 이정호 계장이 책상 서랍을 뒤져 사건 파일을 꺼내 테이블 위로 던진다.
“하, 직접 봐라. 미친, 내 살다가 시신에 기모노 코스프레 입혀서 전시한 사건은 처음 본다.”
기모노 코스프레? 그건 일본 전통 복장 아닌가? 시신에 그런 걸 입혔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사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