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87화 (87/328)

제 87 화. 목소리(Voice) (2)

다음날, 최영현이 이쑤시개를 물고 사무실로 들어와 빙긋 웃는다.

“이야, 오랜만에 소고기를 먹어 그런가? 아주 밤새 이를 쑤셨네.”

미리 출근해 있던 관우가 실소를 지으며 목 뒤로 손 깍지를 낀다.

“아, 전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최영현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넌 인마. 매번 회식 때마다 취해서 민폐 끼치냐?”

“히히,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건 다 강한데 술이 약해서.”

“킬킬, 다른 거 뭐가 강한데?”

“어흠, 그런 게 있습니다.”

최영현이 회전의자를 엉덩이로 밀어 관우 자리로 미끄러진 후 목을 잡고 말한다.

“새끼, 뭐가 강하냐고? 응? 야한 거야? 그런 거야?”

“아아, 그런 거 아닙니다!”

“킥킥, 여자친구도 없는 놈이 무슨.”

“여자친구 있거든요!”

“어디? 너 새끼 아직도 집에 가면 방구석에 들어 앉아 만화 보지? 그러니까 술이 안 늘지, 인마.”

“만화 보는 게 뭐 어떻다고 그래요?”

“다 큰 놈이 만화는 무슨.”

“만화를 모욕하지 마세요!”

“킬킬, 오타쿠 새끼.”

“쳇.”

최영현이 고개를 들며 웃는다.

“이놈 이거 오타쿠 놈으로 유명한 거 모르셨죠, 팀장님?”

최영현이 보고 있는 곳. 원래 이정호가 팀장 시절에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최영현이 관우의 목을 붙잡고 말했다.

“이놈 맨날 집에 들어 앉아서 만화만 봅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안 생기지, 에이.”

관우가 가자미 눈을 뜨고 말한다.

“여자친구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전 우리 키코만 있으면 행복해요.”

키코? 일본 여자 이름 아닌가? 최영현이 관우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

“키코가 뭐야? 연예인이냐?”

“아! 놔요! 키코는 해바라기 소녀라는 뜻이라고요! 우리 키코가 얼마나 예쁜데!”

“헐, 그것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자야? 너 인마, 2D 속에서 여자 찾지 말고 3D를 찾으라고. 그러다 진짜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 인마.”

“키코는 원래 3D거든요! 무식한 돼지!”

“뭐, 인마? 이리 와!”

“아프다니까 자꾸 왜 이래요!”

나는 깍지를 끼고 관우를 놀려 대는 최영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팀장 자리가 이래서 팀장인 걸까? 이 위치에서 보니 팀원들이 뭘 하는지 훤히 보인다. 보통 때였다면 시끄럽다며 그만두라고 했겠지만 생소한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평화롭게 놀고 있는 팀원들이 어쩐지 귀여워 보인다.

복도 끝에서 나타난 김연주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176cm가량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가끔 길에서 모델 일을 해보지 않겠냐 제안도 받는다는 김연주의 걸음걸이는 꼭 불량한 고등학생 일진 같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크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곤 자리에 앉는 연주. 어제 술을 제일 많이 마신 건 그녀다. 하지만 이 중에 제일 멀쩡해 보인다. 술이 엄청 센 모양이다. 모두가 출근하자, 나는 팀원들을 호출했다.

“자, 다 왔으니 회의실로 모입시다.”

회의실로 오면서도 관우 목을 놓아주지 않는 최영현의 엄청난 덩치가 보인다. 관우는 허리를 숙이고 계속 놓으라고 소리치고 있지만 힘으로는 잽도 안 된다. 회의실에 들어온 후에 관우를 놓아준 최영현은 조금 전 장난을 치던 표정을 싹 치우고 물었다.

“회식자리에서 말한 그 사건 브리핑입니까?”

나는 자리에 앉은 팀원들을 쭉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브리핑 후 현장으로 갑니다. 자, 주목.”

나는 화이트 보드를 끌고 와 사진을 붙였다. 오전 일찍 받은 사건 파일에 있던 사진이다.

“사건일은 이틀 전, 시신의 발견 장소는 낙산 어린이 공원입니다.”

최영현이 손을 슬쩍 들며 웃는다.

“브리핑 할 때는 그냥 반말로 하시죠, 팀장님.”

최영현의 배려에 나는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럽시다.”

나는 시신의 사진을 꺼내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그러자 연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신에 뭘 입혀 놓은 거예요?”

나는 팀원들과 함께 사진을 보며 말했다.

“기모노.”

최영현이 끼어든다.

“옷 상태를 보니 죽은 후에 입힌 것 같은데요?”

시신의 옷 상태가 매우 멀쩡한 편이다. 피가 묻은 곳이 전혀 없으며 찢긴 부분도 없다. 나는 시신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시신은 목이 잘렸다. 하지만 목 주변에 약간의 혈흔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옷에 피가 튀지 않았다. KCSI 감정결과 복식이 입혀진 모양을 보았을 때 사망 후에 제3자에 의해 입혀졌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진 속 시신의 모습. 언론에 이 사진이 밝혀진다면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시신은 일반적인 기모노가 아닌 하얀색 기모노를 입고 있다. 꼭 상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시신은 잔디밭에 누워 있으며, 감식을 위해 바닥에 면을 깐 후 잘려 분리되어 있던 머리가 옆에 있다. 시신의 성별은 남자이다.

김연주가 펜을 든 손을 들고 물었다.

“옷에 대한 감식 결과는 나왔습니까?”

“현재 돌리는 중. 목과장님 말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하는 원단이 아니라고 한다.”

“일본에서 제작하는 원단인가요?”

“그래.”

“요즘 해외구매 대행이나 직구가 유행이니까 그쪽을 확인해 봐야겠군요.”

“그쪽은 연주가 맡아줘.”

“네, 팀장님.”

오늘 팀장으로 첫 날인데 다들 부드럽게 잘 적응해 주어 다행이다. 조금은 삐걱댈 거라 생각했는데 팀장 대접을 아주 잘해준다. 그때 최영현에게 붙잡혔던 목이 아픈지 구시렁대던 관우가 중얼거린다.

“제길, 돼지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저거 일반 기모노 아닌데.”

바로 옆에 있던 최영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크게 말해, 오타쿠.”

“오타쿠 아니거든요!”

“도둑놈이 나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 봤냐?”

“아오!”

나는 열 받아 하는 관우를 향해 물었다.

“관우야, 방금 뭐라고 했지? 이게 일반 기모노가 아니라고?”

관우가 슬쩍 최영현의 눈치를 본 뒤 고개를 끄덕인다.

“예, 기모노 계열이긴 한데, 이로무지(色無地)라고. 단색의 기모노로, 주로 다도를 할 때 많이 입습니다. 가몬을 넣어서 호몬기처럼 입을 수도 있고, 검은 오비를 둘러서 상복으로도 입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가몬은 뭐고, 호몬기는 또 뭐냐? 오비는 맥주 아니냐? 아무튼 관우 녀석이 이쪽을 잘 아는 모양이다.

“다도 할 때 입는 옷이라고?”

“예, 보통 그래요. 저기 허리 부분에 검은 띠가 있었다면 상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없네요.”

최영현의 말처럼 관우는 평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모양이다.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나는 연주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관우도 연주와 함께 옷에 대해 알아봐.”

“예, 팀장님.”

나는 현장 사진 하나를 더 꺼내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커다란 한지에 피로 쓰여진 글귀였다.

“마지막으로 이 글귀가 시신의 옆에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시신의 잘린 목 위쪽 잔디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최영현이 사진을 바라보다 말했다.

“한자? 아니, 일본어인가? 어이, 오타쿠. 저거 뭔 소리야?”

모두가 관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관우의 반응이 이상하다. 눈을 크게 뜨고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연주가 그런 관우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야, 왜 그래?”

“저거···”

최영현이 물었다.

“뭐라고 써 있는데?”

관우가 애니메이션으로 배운 일본어라고 믿기 어려운 멋진 발음으로 일본어를 읽는다.

“頑張れ, 人は心が原動力だから、心はどこまでも強くなれる.”

오, 뭔가 멋지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려줘야지, 이 자식아.

“무슨 뜻이지?”

관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힘내, 사람은 마음이 원동력이니까. 마음은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모두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살인현장에 남아 있을 글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힌트일까?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관우에게 가 있다.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관우의 얼굴 때문이다.

“관우.”

“··················.”

“관우야?”

관우가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본다. 나는 관우를 가만히 보며 사진을 눈짓했다.

“아는 글이야?”

관우가 침을 꿀꺽 삼킨다.

“저거···”

관우가 뭔가 알고 있다. 최영현이 재촉한다.

“아, 그냥 빨리 좀 말해, 인마!”

관우가 사진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저거··· 얼마 전에 엄청 유행했던 애니메이션 대사인데.”

모두의 눈이 커진다. 저게 애니메이션 대사라고? 초장부터 심상치 않은 사건이구나.

“어떤 애니메이션이지?”

관우가 핸드폰을 꺼내 검색한 후 내민다.

“이거···”

관우의 핸드폰 속. 짧은 머리의 남자 주인공이 일본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본어로 적힌 제목이라 읽을 수 없는 나는 핸드폰 속에 한글 설명을 확인했다.

“악귀의 검?”

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인기 엄청 많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최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또 또라이 출현인가? 뭔 내용이냐, 그건?”

관우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게,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귀들을 퇴치하는 용사들 이야기인데. 용사들마다 슬픈 사연이 있고, 악역들에게도 각기 다 슬픈 사연들이 있어요.”

김연주가 오만상을 구긴다.

“용사들 이야기라고?”

“어···”

“그럼 살인범이 지금 자기를 용사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그, 글쎄?”

연주가 관우를 째려보며 자기 팔을 만진다.

“소름 끼쳐, 미친.”

관우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야, 내가 했냐? 세상 모든 애니메이션 팬들을 모욕하지 마! 그건 게임에 빠져 현실 구분 못하고 범죄 저지르는 사람들 보며 세상 모든 게임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누가 뭐라고 했어?”

“그 눈빛! 지금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 다 알거든!”

“아닌데?”

“아니긴!”

또 싸우기 시작하는 팀원들. 나는 팔짱을 끼고 관우의 말을 생각했다.

‘범인은 자신을 악귀를 퇴치하는 용사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수도 있다는 쪽이 옳겠지. 범인은 관우가 말한 애니메이션의 팬이다. 살해 현장에 애니메이션 명대사를 남길 만큼 좋아한다.’

나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팀원들 앞에 서서 테이블을 쾅쾅 때렸다.

“조용.”

입은 다물었지만 억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관우. 나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이번 사건은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사건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쪽을 잘 알고 있는 관우가 제일 적격인 것 같네. 관우가 컨트롤 타워를 맡는다. 다들 이의 없지?”

최영현과 김연주가 동시에 입을 다문다. 오타쿠는 싫어도 이 사건의 적임자가 관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관우는 오타쿠 인생 처음으로 자기 취미가 현실에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화난 표정을 지우고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을 하고 있다.

“관우.”

“예, 팀장님!”

“이 애니메이션 봤어?”

“극장판 1기까지 봤습니다!”

그게 뭐냐?

“········· 그, 극장판?”

관우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예! 시즌 1이 끝나고 극장판 2기까지 나왔습니다. 올해 말에 시즌 2가 나온다는 소문입니다.”

“·····················.”

아직 안 끝났다는 말인가?

“음··· 뭐 하여간 봤다는 거지?”

“예, 사실 취향에 좀 안 맞아서 대충 보긴 했습니다.”

하긴, 취향이었으면 극장판 2기도 봤겠지.

“내용 다 기억 나?”

“대충이요.”

“좋아. 애니메이션 연구는 관우가 맡는다. 일단 관우는 수사비 지원해 줄 테니까 애니메이션 전편 구매해서 내용 확인해.”

“예!”

나는 최영현 쪽을 돌아보았다.

“최 경위님.”

“예.”

“범인이 애니메이션 광입니다. 그 속에서 범인은 악귀를 퇴치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최영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시신이 악당이란 거죠. 바로 전과기록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후, 시신의 범죄에 당한 피해자들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만약 시신에게 전과가 있다면 원한살인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야죠.”

역시 경험 많은 형사 답게 정확한 맥을 짚어준다. 나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 움직입시다. 새 출발한 우리 팀 첫 사건 잘 부탁합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리 짠 듯이 경례를 한다.

“예,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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