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 화. 목소리(Voice) (3)
낙산 어린이공원으로 가는 차 안.
아무래도 이쪽의 정보에 밝은 관우에게 기모노 구입처에 대한 조사를 맡긴 연주가 현장방문에 동승했다. 연주는 조수석에 앉아 관우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말했다.
“애니메이션이나 TV프로그램에 나오는 물건 중에 상품화 시킨 것들을 Goods 라고 부르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그··· 뭐라고 했더라?”
운전대를 잡은 내가 답했다.
“이로무지.”
“아, 그거는 공식홈페이지 상품에 없다고 해요. 아마 따로 일본 전통 복장을 구매한 걸로 보인답니다.”
“굿즈라고 했지? 보통 뭘 팔아?”
연주가 인상을 구긴다.
“보통 여주인공 몸이 그려진 쿠션이나··· 아 짜증나. 말하기도 싫어요. 가끔 가슴 큰 여주인공으로 마우스 패드도 만들어요.”
“···············..”
가슴 큰? 그걸로 마우스 패드를 만들면··· 대충 어디에 손목이 올라갈 지 상상이 된다. 참 기발한 놈들이다.
“옷도 팔아?”
“네, 할로윈 복장으로 많이들 선택하거든요. 그런데 보통 주인공이나,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메인 악역의 복장만 팔아요.”
“현장에서 발견된 건 주인공 복식은 아니겠지.”
당연하다.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되니까. 요즘은 가끔 주인공도 죽이는 애니메이션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네, 저도 잘 모르지만 관우 말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악귀의 복장이란 건데.”
“관우 말로는 각자 사연 있는 악귀가 엄청 많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 중 누군가의 복장인 것 같아요. 관우가 지금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음, 일단 거기서 뭔가 힌트가 나오겠지.”
낙산 어린이공원에 도착하자, 경비원이 마중을 나와 있다.
“종로경찰서에서 오셨습니까?”
차에서 내리자 마자 날아오는 질문. 나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관리인이십니까?”
“관리 책임자입니다.”
“현장이 어디입니까?”
“이쪽으로.”
낙산 어린이공원은 혜화동, 일명 대학로로 불리는 사람 많은 지역의 뒤편에 있다. 야경 명소라 밤에도 사람이 많은 곳이다. 나는 공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CCTV 위치를 살폈다.
“저거 작동되는 거 맞죠?”
“예, 모두 작동됩니다.”
나는 연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연주가 관리인에게 말했다.
“모니터링 관리실이 어디에 있죠?”
“저쪽 회색 건물입니다.”
연주가 CCTV를 회수하러 가고 관리인과 나 둘만 남자 다시 현장으로 걸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최초 발견자가 누구입니까?”
“야간 관리자입니다.”
“몇 시에 발견했죠?”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어서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발견한 겁니까?”
“밤에 순찰 돌다 확인했답니다.”
낙산 어린이공원. 야경 명소라 밤에도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시체를 놓아 두었다. 그런데 발견 시간이 새벽 다섯 시 경이라고 한다.
“여기, 보통 몇 시까지 사람들이 오갑니까?”
관리인이 잠시 생각해본 뒤 말했다.
“주말에는 새벽 두 시에도 사람들이 오갑니다. 금, 토요일은 정말 많죠. 일요일은 상대적으로 한산하고 대학로 연극이 쉬는 월요일은 거의 사람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후, 시신이 발견된 건 월요일 새벽이다. 차라리 주말이었다면 사건 시간을 유추하기 쉬웠을 텐데.
“최초 발견자 좀 봅시다.”
“아··· 지금 초소에 있을 텐데. 불러올 까요?”
“예, 현장에는 저 혼자 가죠.”
조금 멀리 폴리스 라인이 보인다. 현장이 어디인지 알았으니 관리인과 함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관리인이 최초 발견자를 데리러 가고 혼자 오르막 길을 오르는 나. 평소 운동을 즐겨 하는 나도 꽤나 숨이 차는 가파른 경사다. 돌담을 따라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 정상에 다다르자,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보인다. 경비를 서는 순경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례를 해온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폴리스라인 아래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이미 KCSI가 시신을 가져갔기에 바닥에 남은 핏자국만 보이는 현장. 낙산공원이라고 양각되어 있는 커다란 간판 앞, 사람 세 명정도는 누울 수 있는 잔디로 된 공간이 있다. 바로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시신 때문에 아직도 누워 있는 잔디를 슬쩍 만졌다.
살인을 하는 놈 치고 멀쩡한 정신 가진 놈은 없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사람을 죽여 놓고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복장과 명대사를 남겼다?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묘하게 CCTV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시신. 이곳에 올라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CCTV 지대를 피할 공간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맨 먼저, 낙산공원이라 양각된 간판의 뒤편. 약 2미터 정도의 수풀을 넘으면 가능하다. 다음으로, 돌담 아래에 허리를 숙이고 진입하는 방법. CCTV는 돌담의 중간 위치부터 그 위를 비추고 있다. 허리를 바짝 숙이고 전진하면 CCTV를 피할 수 있다.
“뭐가 이렇게 허술해?”
나는 돌담 사이 잔디에서 뛰어내려 양 옆의 CCTV를 바라보았다. 각도가 좀 이상하다. 나는 양 쪽의 각도를 계산해 가며 카메라 가운데에 섰다. 젠장, 여기는 안 잡힐 것 같다.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길. 내가 지금 서 있는 길을 벗어나지 않고 직선으로 걷는다면 양쪽 CCTV의 각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길 한가운데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면 CCTV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병신이 카메라를 이따위로 설치해둔 걸까? 뭐 범인이 꼭 이 길로 지나갔을 거란 확신은 없으니까 그건 CCTV 분석 후에 결과가 나오겠지.
그때, 품 안에서 전화가 울린다. 액정을 보니 최영현이다.
“예, 경위님.”
-팀장님, 하··· 피해자 김현우 말입니다.
김현우. 이틀 전 바로 이곳에서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된 사람의 이름이다.
“예. 전과 있었습니까?”
-전과··· 7범입니다.
“·····················.”
7범이라니. 그렇게 감옥에 많이 간 사람이란 말인가?
“죄목은요?”
-절도, 강도, 폭행치사 뭐 이런 건데··· 강간도 하나 있습니다.
내 눈이 빛났다. 절도나 강도, 폭행치사의 원한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매우 높은 확률로 복수를 위한 원한범죄가 일어나는 하나의 죄목. 그것은 바로 강간이었다.
“강간 피해자 확인했습니까?’
-예, 이름 황지영, 20세입니다.
바로 그녀를 확인하라는 말을 하려던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20세?”
-············.예.
잠깐, 지금 20세라고? 김현우가 지금 밖을 돌아다녔다는 건 형집행이 끝났다는 뜻인데 그럼 황지영은 강간을 언제 당했단 말일까?
“김현우 강간 사건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7년 전입니다, 하.
“··················”
7년 전. 그럼 13세 여아를 강간했단 말이야? 이 짐승 같은 새끼를 봤나. 충격적인 사실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최영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황지영씨 댁으로 갑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
7년 전에 있었던 충격적 사건. 그로 인해 어린 여성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인 용의자로 다시 조사를 한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또 이런 상처를 줘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안 할 수도 없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가죠··· 문자로 주소 보내주세요.”
-예, 팀장님.
전화를 끊고 바로 온 문자. 주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쉬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욕을 내뱉고 말았다.
“씨발···”
CCTV를 회수해 온 연주와 함께 시신 최초발견자와 잠시 인터뷰를 한 후 최영현이 말한 주소로 오자, 빌라 앞에 주차를 하고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가 보인다. 내 차를 보고 손을 드는 최영현. 대충 주차를 하고 베이지색 빌라를 올려 보자, 최영현이 담배를 물고 말했다.
“3층 302호입니다.”
“동거인은?”
“오빠가 있는데 현재 군대에 갔답니다.”
오빠와 둘이 산다고? 그런 일을 겪었는데 동생을 혼자 두고 군대를 가?
“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돌아가셨답니다.”
“···············.”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황지영씨가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딸이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어떡하든 치료비를 대려고 지방에 내려가 일을 했는데, 공장에서 트럭을 몰다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왜 불행은 이렇게 한번에 여러가지가 들이닥치는 걸까?
“언제 그랬습니까?”
“6년 전입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고작 1년 후다.
“어머니는?”
“작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간암이었답니다. 그것도 딸 사건이 발생하고 안 먹던 술을 매일 마시다 그랬다는 것 같습니다.”
한 악마의 범죄로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솔직히 죽어도 싼 인간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경찰이다. 죽어도 싼 인간은 법으로 죽여야 한다. 유명무실한 제도지만 분명히 사형이란 제도가 있으니까. 개인의 복수를 허락하는 순간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황지영씨 전화번호. 입수했습니까?”
최영현이 담배를 문 채 물었다.
“전화번호는 왜요?”
김연주가 인상을 쓰며 끼어든다.
“황지영씨는 용의자이기도 하지만 일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입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면 정신적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에게 좋지 않아요. 최 경위님은 그것도 몰라요?”
최영현이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한다.
“모르기는··· 전화번호 입수했습니다. 여기.”
최영현이 전화번호를 넘겨준다. 나는 연주에게 토스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동성이 전화하는 쪽이 낫겠다.”
연주는 당연하다는 듯 번호를 받아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황지영씨 되시죠? 종로경찰서 강력3반 김연주 경사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방문 허가를 받고 있는 연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라보고 있는 베이지색 빌라. 저곳에 참혹한 일을 당한 여성이 아직도 두려움에 떨며 겨우 살아가고 있다.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차에 몸을 기댄다.
“진짜 저 사람이 범인일까요?”
“·····················”
“하, 범인이 아니었음 좋겠네요.”
나도 그렇다. 피해자가 그저 피해자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 함께 악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복수했다고 해도 나는 과연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최영현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다.
팔짱을 낀 최영현이 다시 새 담배를 문다. 불을 붙이려고 하다 멈칫한 최영현이 다시 한숨을 쉰다.
“하···씨발. 만약 범인이 황지영씨가 아니라면 더 복잡해지는 거 아닙니까, 이거?”
하··· 그렇다. 차라리 황지영이 범인인 편이 어쩌면 우리에겐 더 낫다.
“그렇겠죠.”
황지영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제3자가 범인이란 뜻이다. 만약 피해자 주변을 탐문 시 그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없다면? 정말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사회악인 범죄자를 직접 처단하고 있다면 사건은 커진다.
최영현이 빌라를 노려보며 코 끝을 찡그린다.
“만약 관우 놈 말처럼 애니메이션을 따라하는 정의의 용사라는 놈이 실존한다면.”
하··· 생각도 하기 싫다. 피해자 주변 조사를 아무리 해도 연관된 사람이 안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차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악귀가 한 명이 아니라고 했죠.”
최영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예, 뭔 1기인가, 2기인가 하면서 계속 악역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란히 함께 서서 노려보는 빌라. 나는 3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황지영이 범인이 아니라면 연쇄살인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악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정의의 용사라는 껍데기를 쓴 살인범은 자신의 가치 아래에서 계속 움직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