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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5화 (295/328)

살인의 기억 295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9)

순간 욕지거리가 목구멍을 뚫고 바깥 공기를 맡을 뻔했다.

나는 지금 놈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어떡하든 다독여서 수사에 협조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녀석이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말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끈 나는 최대한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높이면 나도 모르게 분노에 찬 음성이 나올까 싶어 그런 것이다.

“탈옥 후에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지? 그건 맞나?”

놈이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말했다.

“넌 탈옥 후 특별히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아, 절도 사건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원죄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수사에 협조해. 어차피 무기징역이라 형이 감소되진 않겠지만 지금 협조하면 나중에 가석방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장진수가 내 쪽을 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감옥에서 40년쯤 있다가 나이가 80쯤 되면 말입니까?”

“아니, 90일 수도 있고.”

“하하.”

뭐지?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은 뭐란 말인가? 난 이놈과 대화해 본 적이 있다. 아니, 현직 경찰 중 이놈과 이토록 오래 말을 섞어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마치 예전의 연쇄살인마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보통 사람과 같은 느낌이랄까?

“감옥에서 요셉 신부님께 고해성사했다는 거 알고 있다.”

“…….”

“뭐라고 했냐?”

“…….”

“뭐라고 했길래 요셉 신부님이 미카엘 신부의 파면 요청을 하게 만들었냐 이 말이다.”

“…….”

내 입에서 미카엘 신부의 이름이 나오자 눈썹을 꿈틀거리는 장진수. 당장 입을 열 듯 입술을 뒤틀었지만 놈은 끝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당신이 싫지 않습니다.”

“뭐?”

“비록 날 감옥에 보낸 장본인이지만 그건 내 잘못이었으니까 당신을 탓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거다. 자기 스스로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 이게 예전의 이놈과 지금 놈의 차이다. 내가 느꼈던 생경한 느낌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교화라도 된 거냐?”

“교화라…… 글쎄요.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이놈. 뭔가 있다. 나는 장진수를 내려 보며 물었다.

“너, 미카엘 신부를 처음 만났을 때 무슨 가르침을 받은 거냐?”

“…….”

“대놓고 사람 죽이라고 했을 리는 없고. 뭐라고 했던 거지?’

“…….”

“대답하기 싫냐?”

“…….”

“그럼 다른 질문을 하지. 넌 내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내게 요구한 건 네 일기장을 찾으라는 거였고. 그거 찾아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장진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 슬퍼 보이는 녀석의 눈빛.

나는 다시 한번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은 한동안 내 눈빛을 바라보다 말했다.

“진실의 불은 연옥의 불보다 훨씬 많은 정화를 약속합니다. 일기장을 찾으면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았던 화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 게임이란 거. 계속해 주지. 일기장을 찾아온다. 그 후에 다시 찾아오지.”

놈의 얼굴을 더 보고 있으면 화를 낼 것 같다. 그럼 난 다시는 이 병실에 출입할 수 없는 신세가 되겠지. 지금은 돌아서는 편이 옳다. 일기장만 찾아봐라, 아주 척추를 접어줄 테니까.

화를 참으며 뚜벅뚜벅 병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뒤에서 장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한복음 15장 5절.”

멈칫한 나는 돌아보며 물었다.

“뭐?”

장진수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일기장에 대한 힌트일까? 아니면 그전에 대화했던 것들에 대한 대답?

나는 한참 놈을 노려보다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스쳐 놈을 체크하러 들어간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팀원들이 날 발견하고 다가온다.

“연주야.”

“네.”

“성경 구절 하나 검색해 봐.”

연주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네, 어느 구절이요?”

“요한복음 15장 5절.”

“네, 잠시만요.”

연주가 핸드폰으로 검색을 돌려 결과를 찾아낸 후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왜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하지만 나도 모른다. 다짜고짜 맥락도 없이 요한복음 15장 5절이란 말을 하고 입을 닫은 저놈 탓이다.

“나도 몰라, 장진수 놈이 그 구절을 이야기했어. 어떤 구절이야?”

연주가 핸드폰을 내밀어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관우가 팔을 쓰다듬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아니, 앞뒤 내용이 잘려서 그런가? 성경에 이렇게 소름 끼치는 내용이 많았습니까?”

나는 화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놈이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미카엘 신부에게 배운 것.”

미카엘이 자신을 신격화했다. 어린 장진수에게 자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세뇌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세뇌의 매개체, 즉 아이가 자신을 믿게 한 일은 어쩌면 살인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구원한 살인. 그것은 놈의 부모 사건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아무 증거가 없다.

나는 팀원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놈의 일기장을 찾는 것이 급선무야. 관우야, 너 장진수 탈옥 후 동선 계속 따고 있지?”

“예, 이번에 아지트가 발견되어 그쪽을 시작 기점으로 이동한 동선을 따로 보고 있습니다.”

“아지트에서 일기장이 나오지 않았어. 분명히 어딘가 있다. 놈이 이동했던 동선 중에 미심쩍은 부분은 전수 확인하도록 해.”

“예, 과장님.”

나는 팀원들에게 방금 장진수와 했던 대화를 전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오진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쇄살인마가 교화된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놈은 탈옥 후 여러 날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미카엘 신부를 죽이려 시도했을 뿐이다.

“저도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정 부분 그럴 확률이 생기겠죠.”

연주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쉰다.

“편지지에 묻은 시멘트 가루는 아지트가 있던 절 주변의 공사 현장에서 묻은 것으로 확인이 됐으니 일기장 위치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거네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해야 될 판이네.”

연주가 발로 관우 엉덩이를 살짝 차며 말했다.

“그런 고로. 너한테 달린 거네.”

관우가 찾아내 줘야 한다. CCTV 추적에 녀석만큼 뛰어난 이는 없다.

관우가 자기 가슴을 팡팡 치며 말한다.

“당연하지! 내가 찾아낸다, 싹 뒤져서 반드시 찾아오지.”

그래, 믿는다. 나는 오진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오진규가 씩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아, 걱정 마세요. 성당 쪽 경호는 확실하게 해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사하고 싶으실 텐데.”

오진규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장님.”

“예.”

“우리가 나쁜 놈 잡는 이유가 뭡니까?”

“…….”

“좋은 사람들 맘 편히 살게 해주려는 거 아닙니까? 좋은 사람들 지키는 일인데 수사 못 한다고 징징거릴 놈이면 애초에 경찰이 되면 안 되는 겁니다.”

“…….”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생각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납니다. 맨날 냄새나는 범죄자 새끼들만 상대하다 순수한 아이들 눈빛을 대할 생각을 하니 당장 보육원으로 달려가고 싶네요, 하하.”

역시 이 사람은 뼛속까지 경찰이다. 어쩌면 강혁 아저씨와 가장 닮은 사람이 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아이고, 뭘 그렇게까지. 그나저나 일기장을 찾으면 거기 단서가 있겠죠?”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기장을 매개로…….”

오진규가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본 뒤 속삭인다.

“기억을 읽어낼 수 있을까요?”

팀원들에게 내 비밀을 말해주었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다. 이러한 대화로 수사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글쎄요, 제가 읽고 싶다고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노력해서 읽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오진규가 입맛을 다시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뭐, 못 읽는다고 해도 일기장을 찾으면 뭔가 나오겠죠. 관우야! 잘 부탁한다? 너만 믿고 있는 거 알지?”

관우가 엄지를 들며 말했다.

“햄버거 시켜주시면 찾아드리죠.”

“하하! 야, 좋아하는 프랜차이즈 하나만 딱 정해. 거기 있는 모든 버거 종류별로 사준다. 콜?”

“콜!”

모두가 의지를 다지며 힘을 내는 현장. 나는 그들과 함께 서서 행복함을 느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어둠의 밑바닥을 보며 사는 우리. 그런 우리가 믿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팀원들밖에 없다.

* * *

다음 날 단양 상진 성당.

성당 앞에 차를 주차한 나는 커다란 성당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비어 있는 성당 내부는 아무도 없지만 무척 경건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

성당 제일 구석에 있는 단상 위에 놓인 꽃을 다듬고 있는 노 수녀님이 보인다.

뚜벅뚜벅 걸어가 단상 앞에 서자, 작은 꽃 가위를 들고 가지를 치던 수녀님이 날 바라보신다.

“저 기억하십니까, 율리아 수녀님?”

“아,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몇 년 전에 성당을 수색했던 형사입니다. 저쪽 와인 창고를 뒤졌죠.”

율리아 수녀님은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얼른 가위를 내려놓고 단상에서 내려오신 후 허리를 숙이신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기억을 못 했네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얼마 전에 112 신고센터로 신고하셨죠? 장진수가 여길 방문해 미카엘 신부님을 찾았다고.”

“아, 맞아요. 정말 그 사람이 토마스였나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장진수가 이 성당을 다니는 내내 여기 계시지 않았나요? 왜 못 알아보신 겁니까?”

율리아 수녀님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가까이 있는 의자에 천천히 앉는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요. 최대한 절 안 보려고 하더군요. 고개를 푹 숙이고 질문만 했어요.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미카엘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그렇군요.”

수녀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토마스 그 아이가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지르다니.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 성당을 옮겨 다니는 신부님들에 비해,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도 하는 수녀님들은 오히려 장진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실 수도 있다.

“장진수가 여기 온 게 언제입니까?”

“정확히 기억나진 않아요. 아마 고3 때였거나,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을 겁니다.”

“혼자 왔습니까?”

“처음 성당에 나올 때 말인가요?”

“예.”

율리아 신부님이 잠시 옛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젓는다.

“아뇨, 어느 날 미카엘 신부님이 그 아이 손을 잡고 성당으로 데려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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