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에일리의 과거
신은 무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덜컥 임신을 했을 때 편히 찾을 수 있는 건 가족이 아닌 신이었다.
‘하느님.....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어느 신이 그렇듯, 에일리는 답을 들을 수 없다.
신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할 뿐, 그 해답을 찾는 건 인간의 몫임을 에일리는 깨달았다.
‘지워야하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이를 지우는 것이었다.
아직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전이라서 지우는 건 큰 수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에일리는 남자친구를 찾아 갔다.
해답이 그 녀석한테 있을 줄 알았다. 아니, 그 녀석이 제발 이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콘돔 끼고 했잖아?’
‘중국산이었나봐.’
‘......그럴 리가.’
예상대로 남자친구는 혼란스러워했다.
‘잠시.....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충격받아하는 모습이 실망스러웠지만, 애써 자리를 비켜줬다.
둘이서 소중히 꿔왔던 꿈을 이룰 시기에 애를 가지게 되었으니 남자친구의 불안한 마음을 이해해보려 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 새끼.....’
그날 밤부터 남자친구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갔으나 있지도 않았고, 남자친구의 부모님한테까지 전화를 해봤지만 차단되어 있었다.
‘나..... 버림받은 건가?’
처음 며칠은 남자친구가 생각할 게 있다고 믿고 싶었다.
며칠 있으면 연락 주겠지..... 그래, 며칠 있으면 다시 연락하겠지.
남자친구가 다시 올 때까지 아기를 지우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 며칠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배는 점점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꺄아아아아악! 싫어! 싫다고오오오!’
-와장창!
지금까지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살아왔었다.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남들처럼 열심히 돈을 벌며, 꿈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그 노력이라는 결정체가 한순간에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에 에일리는 이성을 잃고 방에 있는 것들을 던지며 분노를 표출했다.
‘괜찮아?’
‘......응. 미안해.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기숙사 친구에 의해 진정되긴 했지만.....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다.
에일리도 알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는 동기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말이다.
에일리는 그 길로 대학교를 자퇴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
“흐음.”
에일리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이지만 어림짐작해볼 수 있었다.
‘대학교도 GED로 갔었지?’
한 학년 늦게 대학교에 들어갔을 정도로 그녀는 꿈을 이루고 싶었다.
“뭐. 아이가 좀 크면 그때라도 다시 꿈에 도전해보면 되니까.”
“긍정적이네?”
“부정적인 생각하면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에일리는 내가 사준 생과일주스를 빨대로 빨아먹었다.
“그리고 어제 네가 한 말, 집에 가서 많이 생각해봤어.”
아이를 가지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에일리는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나는 궁금한 눈빛으로 에일리를 바라봤다.
“한참을 생각해 봤는데.....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응. 난 임신을 한 거지, 아직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으니까..... 다만, 외롭지 않을까?”
“왜?”
“나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임신을 하니까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 내 배에 한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청난 위안이 돼. 그래서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듯한 느낌일 것 같아.”
“신체의 일부.....”
“그리고 감정의 일부도.”
“흐음.”
나는 에일리의 말을 전부 노트에 적었다.
“어제 남자친구 부모님 집으로 찾아갔었어.”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으니 남자친구 집 또한 몬태나 주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망설였거든. 찾아가는 걸 말이야.”
“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아이를 뒤늦게라도 지우지 않은 건 내 선택이었고, 이걸로 매달리고 싶진 않았어.”
“부모님은 뭐라 안 그러셔?”
“말만 하면 대신 가주겠다고 하셨는데...... 이건 내 문제지, 부모님의 문제는 아니잖아.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기다려주신다고 하셨어.”
“......좋은 부모님들이네.”
“내 자랑이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들어가니까 여전히 그 자식은 없었지만 부모님들은 계시더라. 근데 걔 부모님은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어.”
“.....뭐?”
“그 자식이 말 안 한 거야. 그냥 갑자기 내 번호를 차단하라고만 연락하고 그 이후로 연락도 잘 안 된대.”
“잘 안 된다는 건.....”
“아주 가끔 연락이 되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겠대. 그래서 나는 내가 겪었던 모든 이야기를 그 녀석 부모님한테 얘기했어.”
남자친구 부모님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얼이 나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도 전했지.”
“어떤 말?”
에일리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지우자고 나랑 합의를 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로 뒤꽁무니를 뺄 정도면 어지간히 책임지기 싫었나본데, 그렇게 싫으면 양육비라도 내놓으라고. 양육비 안 내놓으면 소송 들어간다고.”
“잘했어.”
아무리 갑작스럽다고 해도, 에일리보다 갑작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에일리보다 더 큰 충격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홀로 견뎌왔을 외로움을 그 녀석은 같이 견뎌주지 않고 이기적이게도 도망을 택한 것이다.
“고마워.”
“뭐가?”
“어제 네 얘기 들으니까 뭔가 좀 생각이 바뀌더라고.”
“내가 한 건 고작 과거로 돌아가면 어떻겠냐고 말한 것 뿐인데, 뭘.”
“아니, 그 말 덕분에 내가 포기한 꿈이 얼마나 가치있는 건지를 깨닫게 됐어. 그 자식이 양육비를 보내주면 나도 양육이랑 꿈을 적절히 타협해서 두 가지 다 이뤄봐야지.”
“에이. 그건 너무 꿈보다 해몽 아니야? 하하. 정 고마우면 인터뷰나 마저 해줘.”
“뭐든지 물어봐! 대신 너무 과한 건 금지야.”
나는 에일리한테 지금까지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물어보았다.
학창시절부터 시작해서, 패션디자인에 대한 것들까지 모두 말이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에일리는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근데 너 글 쓰는 거 필명이 뭐야?”
“필명? 굳이 듣고 싶어?”
“응.”
“뭐어...... 너도 알 거야. 드래곤 원이라고.”
“아! 그 필명을 그대로 가져간 거야?”
에일리도 내가 적은 습작을 읽어본 적이 있었기에 필명을 알고 있었다.
“응.”
“유명해?”
“글쎄? 오늘 아침부터 차기작 출판을 시작하긴 했는데..... 한 권 줄까?”
“태교에 좋은 책이야?”
“아니. 태교에는 절대 읽지 마.”
나는 집으로 온 책에 사인을 한 다음 에일리한테 내밀었다.
“돈이 궁해지면 팔아야지~? 그래도 돼?”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20년 뒤에 팔아.”
그동안 가치를 더 올려놓을 테니까.
****
그 이후 에일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 헤어졌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네.’
나는 서둘러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아침부터 찾아왔던 이사벨과 캐서린이 요지부동으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얘네들 왜 아직도 여깄어요?”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라고 했어. 오늘 저녁은 불고기하고 갈비하고, 김치찌개인데 괜찮지?”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인데요? 진수성찬이네요. 아. 옷 갈아입고 올게요.”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이사벨과 캐서린이 무언가를 나눠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더니, 어떻게 이런 식으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대나무 갈대를 스치자 쓸쓸한 바람이 퍼져 나왔다. 모든 것을 좌절시키는 악마의 말처럼 바람은 너무도 고독한 향기로 나를 스쳐갔다.] 이 부분은 어째서 이런 식으로 쓴 걸까요? 주인공의 좌절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나도 몰라. 왜 바람을 맞는데 고독하다고 하는 거지? 으아! 미치겠어! 근데 뭔가 알 것 같기도 해!”
“막 그런 거 아닐까요? 앞에 주인공 에나가 고스트 헌터를 죽였는데 그 사람이 ‘인간’이었잖아요. 얼마전까지 인간이었으니까 변한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는 대목 아닐까요?”
“감정이라는 말도 그럴 듯 하지만, ‘고독’이라는 말이 거슬려, 악마의 말은 본래 ‘유혹’과 ‘좌절’의 순환이잖아? 유혹을 한 뒤에 좌절시키는데 여기는 곧바로 ‘좌절시키는 악마’라는 말을 사용했어. 그러니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
내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너네들 뭐하냐?”
내 말에 집중하고 있던 둘의 고개가 번쩍 들어올려졌다.
“오빠!”
“너! 잘왔다! 여기 어떻게 생각했는지 좀 알려줘!”
“나도! 나도!”
“.....묻지 마라.”
나도 모르니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대충 어느 내용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에나가 고스트 헌터라 불리는 사령술사를 죽이는 게 이야기의 시작이니 초반 부분이 맞을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몬스터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죽여야 하는 현실에 저런 식으로 적은 것뿐이다.
“아이잉~ 알려줘어~”
“역겨우니까 그만해. 그보다 그런 건 알려주면 소설의 재미가 더 줄어드는 거야.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고, 적어가면서 차근차근 생각해봐.”
“치이..... 오빠는 안 그러면서.”
“아무튼 안 가르쳐준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이제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팡이가 있었다.
“예전에 TV에서 고양이가 식탁 위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면 ‘짐승 주제에 식탁 위에 올라와? 건방지게’라고 했으면서 팡이한테는 그런 말 왜 안하세요?”
“팡이는 짐승 아니야.”
“그럼요?”
“야수야.”
“.....”
“야수는 괜찮아. 걔네들이 뭘 알겠니?”
“야수면 식탁을 부수겠죠.”
“팡이는 심장을 부수지 않니? 그보다 할 것 없으면 식기나 날라라.”
“네에.”
나는 팡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엄마의 일을 도와드렸다.
“근데 아빠는요?”
“동료 집에서 일 끝났으니 소소하게 파티 즐기고 오신대. 우리끼리 먹으래.”
아마 일이 다 끝난 건 아닐 것이다.
한 작물만 끝냈다는 것이겠지.
나는 만들어진 음식들을 식탁 위로 가져가며 아직까지도 책을 탐독하고 있는 캐서린과 이사벨한테 소리쳤다.
“밥 먹어 이것들아!”
그제야 그녀들은 몸을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식단은 불고기와 김치와도 같은 한식이 주를 이뤘지만 캐서린은 한식을 좋아했고, 이사벨은 자주 먹기에 상관없었다.
식사가 시작되자 캐서린이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오빠 웹소설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오늘 막 구상이 끝났어.”
“그럼 오늘부터 적는 거야?”
“1~2화 정도만 적고 자보게.”
“진짜? 장르는?”
“회귀”
“.....회귀 그 과거로 가는 거? 그럼 판타지 소설이야?”
“아니, 일반 장르 소설인데 우연찮은 계기로 과거에 가는 것뿐이야.”
“일반 장르.....? 그거 인기 없다고 말했잖아?”
“너랑 내가 같냐? 네가 내 웹소설을 기대하는 거 보니까 SNS에 올리면 독자들 이목을 순식간에 끌 것 같은데?”
“우우!”
캐서린이 항의의 표시로 입을 삐죽 내밀고 웅얼거렸다.
“차라리 그럴 거면 SNS에 글 써라! 내 순위 빼앗을 생각하지 말고!”
“순위도 있어?”
“그럼 없겠어? 이 바닥이 원래 경쟁이 치열한 바닥이잖아.”
“그렇긴 하지.... 하긴, 웹소설은 접근성만큼은 좋다보니 종이책보다 경쟁이 심하긴 하겠네.”
“그나저나 오빠. [블랙 & 월드] 양장본은 어떻게 됐어?”
“아, 너 말 잘했다. 엄마 나 며칠 뒤에 캘리포니아 또 가야 할 것 같아요.”
“어머? 또?”
“네. 양장본 사인이 있어서요. 엄마도 하나 드릴게요.”
“그럼 좋고.”
그 말에 캐서린과 이사벨이 눈을 빛냈다.
“나도 줘! 나도!”
“나도! 오빠 나도 줘! 내가 앞으로 말 잘 들을게! 나도 줘!”
그 둘의 모습에 나는 불고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생일 아는 사람 손.”
“생일?”
“응. 생일.”
내 말에 둘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 이사벨이 아차 싶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8월 12.....일.”
“오늘 며칠?”
“12...일.....”
“각자 $1,000씩 가져와. 그럼 생각해볼게.”
내 말에 캐서린과 이사벨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