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프로듀서 (2)
군대에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짓이 눈을 치우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글을 업으로 삼은 지금 가장 싫은 건 가사를 적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3분 정도 되는 가사를 적는 게 소설책보다 더 골치 아팠다.
그런데 같이 작업이라니.
솔직히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흥미는 생겼지만 휴식을 취하러 온 지금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죄송하지만 작사는 웬만하면 안 할 거라고 다짐해서요.”
“한 번 이야기라도 들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옆에서 다이애나가 고기가 잔뜩 담긴 접시를 잠시 내려놓고 말했다.
“작가님은 작사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세요. 그것 때문에 음악과 관련된 작업은 안 하시는 편이죠.”
다애이나의 말투가 마치 ‘나하고도 안 했는데 아줌마하고 하겠어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신가요? 작가님의 실력에 작사가 어려울 리 없는데...... 아무래도 작사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제가 조금 가르쳐 드릴까요?”
“작사 방법은 제가 가르쳐 드리면 돼요. 키라나 씨가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으세요.”
“작가님하고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작가님의 재능과 실력이시라면 금세 터득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작가님은 [일곱 개의 죄악]을 집필하시고 그 피로를 풀기 위해 고향으로 오신 거예요. 이곳에서 작품을 같이하자는 얘기는 굉장한 실례죠!”
-찌릿!
두 여자 사이에 낀 나는 뻘쭘한 얼굴로 젓가락을 잠시 내려놔야 했다.
그렇게 1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르고 키라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도 여긴 놀러 온 목적이 크니 제 말은 그냥 한 번쯤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네. 뭐.....”
“저도 여기 몬태나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제 말은 크게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쉬세요, 작가님.”
키라나는 싱긋 웃더니 다시 루니아 누나 곁으로 갔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키라나가요?”
“네. 몇 번 만난 적이 있거든요.”
다이애나의 말을 들어보면 키라나는 재능이 넘치는 여자라고 한다.
어린 나이부터 음악을 만들었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아 뮤직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음악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나다 보니 여기저기 손을 뻗었고, 최근에는 클래식 음악 시장까지도 발을 들였다고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다이애나는 키라나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키라나는 과연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여기저기 다양하게 명성을 높이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키라나의 얼굴에는 만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뚜렷한 사람들은 단순한 편이라 쉽게 믿을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작가님도 웬만하면 다가가지 마세요. 웃는 얼굴 뒤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흐음......”
다이애나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느낌보다는 조금 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기나 더 먹죠.”
“네!”
나는 키라나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본 뒤에 술을 마셨다.
***
BBQ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해가 뜨기 전인 새벽이지만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간만에 집에 와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푹 쉬어서 그런가..... 아니면 소설을 완결 내서 그런가, 몸에 피로가 없네.”
이상하게 한 권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몸에 대한 피로가 풀리고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한테 적절한 휴식은 필수인 것 같았다.
그렇게 거실로 내려가니, 거실 소파에 뜻밖의 사람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그러자 선생님은 잠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점심에 그렇게 잤는데 잠이 오겠나?”
“하긴, 그렇긴 하네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끄응..... 그보다 술을 해장할 만한 음식 없나?”
“엄마가 해장국을 끓여놓긴 했거든요. 콩나물국밥인데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SPA에서 몇 번 먹어봤네.”
“그럼 그거 데워 드릴게요.”
“아니, 그건 아침으로 먹도록 하고..... 이온 음료는 없나?”
미국에서는 숙취에 시달릴 때 이온 음료나 피자를 먹는다.
최근에는 쌀국수같이 국물이나 숙주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영국식 아침 식사나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이온 음료였다.
“그건 없는데..... 아. 이거 드셔보실래요?”
어제 아시안 마트에서 사 온 Idh라 적힌 음료를 선생님한테 건네 드렸다.
“이게 뭔가?”
“제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이걸 마시니까 술기운이 풀린다고 하더라고요. 한국 과일로 만든 음료에요. 드셔보세요.”
선생님은 의심의 눈초리로 음료를 바라보다 이내 내 손에서 가져갔다.
-꿀꺽꿀꺽.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몇 모금 드시더니, 마음에 드셨는지 남아있는 음료를 전부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으셨다.
“크으..... 이게 이름이 뭐라고?”
“배 음료에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시네요.”
한국에 있을 때 해장으로 라면을 먹었었다.
군대 월급으론 해장국도 상당히 큰 지출이었다 보니 그냥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게 최고였다.
거기에 외박 나가는 곳에 있는 해장국 집은 다른 곳보다 이상할 정도로 비싸서 웬만하면 먹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나?”
“딱히 없었어요. 굳이 있다면 키라나라는 사람이 저희 누나 친구라서 놀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음.....”
“아세요?”
“알지. 몇 번 만나본 적도 있고, 학교에서 초청받아서 강연을 한 적도 있으니까.”
“어제 다이애나가 상당히 경계하더라고요. 약간.....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이 나네요.”
그 말에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의견이 충돌해서 그런 거네.”
“아..... 왠지.”
“눈치채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 말이죠.”
어제 키라나와 대화하면서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든 게 이 이유 때문이었다.
말투부터 성격까지 다이애나하고 느낌이 달랐기에 은근히 둘의 대화가 핀트가 나가 있었다.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고 꼼꼼하다면 키라나가 진취적이고 불도저 같은 느낌이랄까?
“둘 다 천재라서 그런 거네. 둘 다 뛰어난 재능이 있기에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데, 그 생각이 서로 다르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냥 무시하게나.”
“그러려고요.”
나한테만 피해가 안 오면 되니까.
“그나저나 자네 집 고양이..... 왜 아까부터 날 저렇게 노려보는 건가?”
“네?”
선생님의 시선에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팡이가 마치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팡이는 선생님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선생님을 본다기보다는 눈이 죽어있는 것 같았다.
“눈빛이 죽었는데 무슨 일 있나?”
“아...... 어제 중성화 수술을 했거든요.”
“이런..... 쯧쯧.”
선생님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일어나서 팡이한테 다가갔다.
-냐아......
인간처럼 앉아있던 팡이는 자신을 위로해주러 오는 선생님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은 그런 팡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환은 스스로 지키는 거다 이놈아.”
“......”
-.....켁.
고양이를 기르고 나서 처음으로 팡이의 얼굴이 썩은 듯 보였다.
***
팡이가 중성화를 하기 전에 발정기의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너무도 힘들었다.
여기저기 오줌을 싸지르니 가족 전체가 팡이가 오줌 싼 곳을 따라다니며 닦아야 했고, 침대나 이불에도 많이 싸다 보니 빨래 거리가 많아졌다.
거기에 저녁마다 놀아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모자라, 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지금까지 팡이를 중성화시키지 않은 이유는 딱히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고환을 잃은 팡이의 상심이 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발정기가 심하지 않았기에 조금 참으면 살 만했지만, 겨울이 다가오니 발정기가 더욱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시킨 것이다.
“어이구......”
엄마와 아빠는 중성화를 하고 내시가 되어버린 팡이를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애 얼굴이..... 에휴. 그러니 중성화를 시키지 말자고 했잖아.”
“하는 편이 얘한테나 우리한테나 좋아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평소 팡이가 좋아하는 닭가슴살맛 츄르를 가지고 갔다.
그러자 그릉그릉거리며 츄르를 맛있게 먹긴 했지만, 이내 또 시무룩해졌다.
“......먹을 건 잘 먹네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주겠죠.”
“에휴.”
발정기 때도 애교를 부리던 팡이가 지금은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있으니 괜히 안쓰러웠다.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 팡이를 내버려 두고 아침을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도 술을 많이 마셨기에 아침은 끓여놓은 콩나물국과 선생님이 편하게 드실 수 있게 빵도 함께 준비했다.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2층에서 다이애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왔다.
“아. 다이애나. 잠자리는 편하셨나요?”
“네에..... 편안했어요.....”
아직 비몽사몽한지 다이애나는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내려왔다.
“세수나 하고 오거라.”
“네에..... 하암.....”
보통 때라면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던 다이애나지만, 아직 졸려서 그런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에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쌀로 드실래요? 빵으로 드실래요?”
“빵으로 부탁하네.”
식탁에 앉은 선생님은 앉자마자 콩나물국을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매운 걸 싫어할 수 있으니 맑은 탕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속을 풀리게 하는데 저것보다 좋은 건 없었다.
“크으...... 시원하구만.”
아침부터 얼굴 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활짝 폈다.
SPA에서 콩나물국밥을 몇 번 드셨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콩나물에 대한 거부감은 없으신 것 같으셨다.
“선생님 오늘은 뭐 하고 싶으세요?”
“여기 구경할 게 있나?”
“딱히 많진 않아요. 마당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산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으실 거예요. 그럼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맑아지다 못해 얼어붙겠지.”
“그것도 그렇죠?”
“에잉..... 그럼 자네는 뭘 할 건가?”
“음..... 우선 월슨 할아버지네 집에 가볼까 해요.”
그 말에 선생님의 얼굴이 묘해졌다.
“월슨.....이라고?”
“네. 은퇴하신 분인데 집에 고양이를 잔뜩 키우시거든요. 중성화에 대한 조언도 좀 듣고 팡이 키울 때 도움받은 게 많아서 선물도 드리려고요.”
“은퇴라..... 흐음. 그럼 나도 함께 가세.”
“고양이 좋아하세요?”
“다이애나가 좋아하니 같이 가려는 게지.”
“하하......”
여전히 못 말리는 손녀딸 사랑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