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우연
나는 밥을 먹고 곧바로 월슨 할아버지 댁에 가지 않았다.
우선 어제 새벽 내내 내렸던 눈을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눈을 치우는 건 군대에서 징그럽게 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마당에 있는 눈을 치우고 있으니 두껍게 차려입은 다이애나도 한 손 거들겠다고 나왔다.
“그냥 쉬고 계세요. 어차피 금방 해요.”
빈말이 아니라 어차피 걸어 다닐 수 있게만 청소하면 되기에 거의 다 한 상태였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신가요?”
“네. 슬슬 일어나실 거예요.”
선생님은 밥을 드시고 머리가 어지럽다며 조금 더 숙면을 취하신다고 방에 들어가셨다.
그 사이에 눈을 치우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근데 여긴 강아지가 없네요?”
“개요?”
“네. 보통 시골이라고 하면 개가 많이 있던데..... 이곳에 와서는 못 본 것 같아요.”
“아마 추우니까 집으로 들인 걸 거예요. 고모부 집에는 원래부터 개가 없고요.”
“원래부터요?”
“네. 어렸을 적에는 있었는데 개가 곰한테 잡혀가는 걸 실시간으로 봐서 그 이후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아......”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 대한 방비가 그리 좋지 않았어요. 코요테 같은 것도 마을에서 심심찮게 봤고요. 그때만 해도 아이들은 무조건 어른들과 함께 다녀야 했으니까요.”
방벽을 쳐놓은 지금도 가끔가다 들어오기는 하는데, 방벽이 없었던 과거에는 어떻겠는가.
“강아지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하하. 월슨 할아버지 집에 가면 고양이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전에 갔을 때 강아지도 있었는데 가서 실컷 보세요!”
“네!”
동물을 좋아하는 다이애나는 꽤나 설레 보였다.
‘그나저나 개라......’
고양이라면 몰라도 내가 키우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동물이었다.
***
선생님이 잠에서 일어나시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월슨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월슨 할아버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울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널드 월슨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허허.....역시나 자네였군.”
“......응? 에드?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도널드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에드워드 선생님의 얼굴에 놀랍고도 반가운 얼굴을 하였다.
“쯧쯧. 기어코 찾아 왔구만 그래.”
“찾아온 적 없네. 내가 스토커도 아니고. 우연이 겹친 것이지.”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놀란 건 찰나일 뿐, 곧 대수롭지 않게 대화했다.
“월슨 성을 가지고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에드워드 선생님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다이애나도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월슨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네에..... 어릴 적부터 집에 자주 오시던 할아버지 친우분 중 한 분이세요. 속세와 연을 끊고 사신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도시 할아버지 느낌이 강하게 나서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차피 은퇴한 노인이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선생님과 이런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월슨 할아버지는 증권 회사에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증권 회사에 다니시던 월슨 할아버지가 어째서 에드워드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거지?
머릿속에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이내 들려오는 도널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선 다들 들어오게. 어이구야..... 다이애나 많이도 컸구나.”
“헤헤! 안녕하세요 도널드 선생님!”
“예끼!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야?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게. 은퇴한 늙은이한테 선생님이라는 말은 독이랑 같아.”
“네! 할아버지!”
도널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이애나 옆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봤다.
“제임스? 어째서 자네가 에드하고 같이 있는 건가?”
“그야...... 제가 저희 집으로 초대했거든요.”
“이런... 어떻게 나를 찾아왔나 했더니만, 쯧. 일단 전부 들어오게.”
오랜만에 들어가는 도널드 할아버지 댁은 변함이 없었다.
한 마리의 야생 짐승도 마당 출입을 허가할 수 없다는 듯 사방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으며, 우리 집과는 다르게 마당 구석구석까지 눈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날씨가 많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마당에는 고양이와 강아지 몇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다.
여름에 왔을 때보다 마당에 있는 동물들이 적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 안으로 들어가니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많네.’
추위를 타는 동물들은 현관부터 시작해서 거실, 부엌까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우와......”
다이애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동물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에드워드는 거실에 있는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꿈을 이뤘구먼.”
“정확히는 아내의 꿈이지. 끌끌.....”
우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안쪽에서 쉬고 계시던 배티 부인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오셨다.
“어머? 에드워드?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초대한 거예요?”
“저 나이 먹고 날 스토킹했나 했더니 그건 아니더군.”
“이야기하면 길어지지. 그보다 오래간만입니다 배티 부인.”
“오랜만이에요 에드워드.... 혹시 저쪽에 있는 아가씨가......”
“손녀입니다.”
“아아! 다이애나가 벌써 저렇게 컸나요? 어머나......”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다이애나. 어머. 내 정신 좀 봐. 소파에 잠시 앉아 계세요 차를 가지고 올게요.”
우리는 배티 부인의 말대로 일단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그보다 자네하고 저 녀석하고 무슨 사인가?”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자 도널드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팡이를 내가 보낸 거라네.”
“아..... 그 중성화한 녀석?”
“중성화를 했나?”
“어제 했더군. 그것 때문에 저 녀석이 자네를 찾아온 거네.”
도널드 할아버지가 그렇냐는 듯이 바라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어제 중성화를 했는데 애 상태가 뭐랄까...... 너무 우울하다고 해야 할까요? 조금 느낌이 그래서 다른 고양이들은 중성화를 하면 어땠는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흐음..... 그럼 에드하고는 무슨 사이인가?”
“음..... 비즈니스?”
“비즈니스?”
“네. 제 작품이 영화화가 되는데 거기서 음악 감독을 맡아주셨어요.”
그 말에 도널드 할아버지는 놀랍다는 듯이 선생님을 바라봤다.
“자네가?”
“새삼스럽게 뭘 그러나?”
“아니 자네 이제 슬슬 은퇴한답시고 교수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킁. 그런 게 있으니 그냥 넘어가게.”
“이야.....”
도널드 할아버지는 다시 봤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 생각보다 글을 잘 쓰나 보군? 에드는 그 작품이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프로듀싱을 해주니까.”
“그냥 뭐.... 적당히 쓰죠.”
“적당히가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래서 에드 어떻게 이곳에 온 건가?”
에드워드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네가 몬태나 어딘가에서 산다고 했는데 나도 슬슬 은퇴할 때가 되었으니 몬태나 쪽도 알아보려고 했지. 근데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났었는데, 이 녀석이 마침 몬태나주에 산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겸사겸사 휴식도 취할 겸 온 거네.”
‘그래서 몬태나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신 건가?’
어째서 그때 몬태나에 가보고 싶다고 하신 건지 드디어 알게 됐다.
아직 두 분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허물없는 말투만 봐선 두 분이 굉장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두 분은 무슨 관계세요? 직장 동료로 보이지는 않아서요.”
“고향 친구네.”
“아.....”
그러면 이해가 되네.
“아무튼 오랜만에 봐서 좋구먼. 다이애나도 훌쩍 커버렸으니 원..... 예전에는 목마도 태워줬었는데.”
“헤헤. 엄청 어릴 때죠. 저도 기억나요.”
“그러고 보니 다이애나가 동물을 굉장히 좋아했지? 근데 헬리아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키웠었나?”
“네..... 맞아요.”
“그럼 온 김에 동물들 실컷 보고 가거라. 착한 아이들이니 금방 친해질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은색 빛이 도는 고양이 한 마리가 다이애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꺄아.....!”
다이애나는 그런 고양이가 좋은지 연신 턱을 쓰다듬어 주었다.
보통 고양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머리부터 쓰다듬을 테지만, 그러면 고양이들이 무서워할 수 있으니 안전한 턱부터 쓰다듬는 편이 좋았다.
물론 성질 더러운 녀석한테 턱부터 쓰다듬으면 물리겠지만.
“그래서 자네 고양이가 어떻다고?”
“어제 중성화를 했는데 뭐랄까.....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아서요. 밥은 그래도 잘 먹어요.”
“자네 같으면 갑작스럽게 있던 게 사라졌는데 멀쩡히 있을 수 있겠나? 그래도 중성화 시기는 잘 잡았으니 상관없을 걸세. 밥도 잘 먹고 있다고 하니 별일 없겠지.”
“근데 표정이 조금.....”
“팡이는 애기 때부터 표정이 이상할 때가 많았어. 그냥 밥이나 잘 먹이게나.”
“네. 그럴게요. 아. 참 이거 선물이에요. 항상 도움을 주셨는데 빈손으로 오기에 뭐해서 가져왔어요.”
나는 주섬주섬 가지고 온 선물을 꺼내 도널드 할아버지한테 건넸다.
“이건.....?”
“제 소설인데 한 번 읽어보세요.”
“박스 케이스는 봤어도 철로 된 케이스는 처음이군...... [드래곤 마스터]? 이게 자네가 쓴 소설인가?”
“네. 심심하실 때 읽어보시면 괜찮을 거예요.”
“흐음.....”
별 흥미가 없어 보이는 도널드의 반응에 에드워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그 책이 얼만지는 아나?”
“얼만데?”
“못해도 $3,000는 받을 걸세.”
그 말에 시큰둥하게 양장본을 들고 있던 도널드가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게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그렇다네. 나도 어이가 없어서 원..... 아무튼 조심히 다루게나.”
“.....끄응. 고양이들이 없는 곳에 놔둬야겠구먼.”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배티 부인이 커피를 가져와 주셨고, 우리는 따뜻한 커피잔을 잡고 서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전화로만 이야기하던 에드워드 선생님과 도널드 할아버지의 입에선 몇십 년 전의 과거 얘기부터 안 들어도 될 tmi까지 주저 없이 나오고 있었다.
다이애나와 내가 고양이들과 놀다가 지친 것도 모르실 정도로 이야기에 흠뻑 빠져 계셨다.
‘언제 끝나시려나?’
아무래도 시간이 한 참 걸릴 것 같았다.
***
한편 빌에이든 미디어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임스 작가의 [블랙 & 월드] 영화화 확정과 캐스팅된 배우들이 공개되자,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더 뜨거웠다.
그에 힘입어 판매 부수가 더욱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로건은 공장을 몇 군데 더 계약하여 [리턴 패션 디자이너]까지 찍고 있다 보니 회사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띠링!
“.....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에밀라의 모니터에 새로운 메일 알람이 떠올랐다.
“뭐지?”
메일을 확인한 에밀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