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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44)화 (44/90)

<제44화>

다행히도 그녀가 내민 명함은 멀쩡했다. 심지어 보란 듯이 처음 보는 회사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이활이 명함을 받고 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 하는 회사냐고 물었는데.”

“그냥 뭐, 평범한 회사죠. 여러 가지 작업하는 회사? 2주 전엔 너무 바빠서 하늘 씨를 집에 못 보냈어요. 그건 미안해요.”

“그런 식으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마시고…….”

“하하, 얘가 왜 이래, 정말!”

이하늘은 은근슬쩍 제 앞에 서서 이세현과 대화하려는 이활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제발. 알겠어. 걱정한 거 알겠는데 이거 민폐라고, 이 자식아.

이하늘은 당장 이활의 머리통을 쳐서 기절시키고 싶었다.

게이트에서 정말 머리가 깨지는 바람에 기절한 이력만 없었어도 실행에 나섰을 거다.

그때, 이세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남매가 하나도 안 닮았네요?”

하도 들어서 지겨운 말이었다.

이하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슬그머니 쌍둥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나마 이공은 괜찮아 보였지만 이활은 아니었다.

이하늘은 흥분한 개를 진정시키는 느낌으로 이활의 등을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진정해, 진정. 한두 번 들어?

“그 말 자주 들어요.”

이하늘이 대충 대답했다. 이세현이 뭐라 말을 더 하려는 찰나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임여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박하늘. 너 나 좀 봐.”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박하늘 아니고 이하늘.”

어젠 김하늘이라고 하더니. 얘 일부러 이러나?

뭐가 됐든 임여명은 자리를 피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하늘은 불안한 눈빛으로 쌍둥이, 특히 이활을 보다가 임여명과 이동했다.

그렇게 목줄이 쥔 사람이 없어지자 이활이 바로 이를 드러냈다.

“초면에 무례하네, 씨.”

“이활.”

“뭐. 말리지 마.”

“어차피 누나 거기 관둘 거야. 일일이 신경 쓰면 우리만 힘들지.”

같잖은 거에 신경 쓰지 말라는 어조.

지금 자리를 비운 사람이 쥐고 있었던 목줄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나마 유한 표정이었던 이공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이세현은 작게 감탄했다.

표정 관리 수준급이네?

“그건 우리가 곤란한데……. 근데 정말 하나도 안 닮았어요. 둘은 똑같이 생겼는데.”

이로써 두 번째.

이활은 정말 뒤집어엎고 싶었으나 그렇게까지 단순 무식하지 않았다.

여기서 날뛰면 이하늘만 곤란해진다.

흥분을 가라앉힌 이활이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짜증스레 말했다.

“그야 나랑 얘는 쌍둥이고 쟤랑 우리는 쌍둥이가 아니니까.”

“으음, 그렇구나.”

영혼 없이 대꾸하던 이세현은 방긋 웃고는 하늘 씨와 잠깐 대화 좀 하겠다며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뭐라 중얼거렸는데 하필 그게 두 사람의 귀에 들렸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왜 모자이크가 안 지워졌을까.”

모자이크?

이공과 이활이 서로 눈을 마주했다.

‘저거 우리한테 하는 말이냐?’

‘글쎄. 들으라고 중얼거린 거 보면, 아마.’

하지만 영문 모를 소리였다.

모자이크?

눈썹을 와락 구긴 이활이 두 사람과 대화하는 제 누나를 보다가 팔짱을 꼈다.

“어떡할까.”

“일단 두고 봐. 회사 위치 이제 아니까 좌표 찍기도 수월하잖아, 너.”

“영 꺼림칙한데.”

“그것보다 넌 뭐야. 왜 기절을 해? 머리는 또 뭐고.”

아, 맞다.

이활이 아침에 휘말린 게이트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떠올리고 비딱한 시선을 이공에게 던졌다.

“야. 너 이공인 거 아는 사람 많냐?”

서로에게 겨우 들릴 만한 크기. 이공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알아듣게 말해.”

“무궁이 이공인 거 아는 사람 많냐고.”

“몇 없는데.”

“그럼 이공인 거 알면서 너랑 적인 새끼는?”

“다 죽었을걸.”

이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불법 헌터인 거 내 앞에서 자랑하냐? 이 새끼 ×나 막 나가네.”

“이걸 묻는 이유가 뭐야.”

“한 가지 더. 그럼 네가 데빌 테이머인 건 몰라. 그런데 네가 헌터인 건 알아. 있어?”

이공이 침묵했다. 과거를 되짚는 듯했다.

그게 오래 이어지자 이활은 덧붙였다.

“더해서 너랑 나랑 이하늘이 남매인 걸 알아. 하는 짓 보면 적인 것 같고 내 스킬이 안 통해. 무엇보다 이하늘을 들먹이며 협박을 했어. 누군지 짐작이 가? 난 안 가. 그래서 묻는 거야.”

이공의 나른했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누나로 협박?”

“그래.”

이활이 빠르게 게이트에서 봤던 양아치에 대해 설명했다. 이공은 묵묵히 듣다가 한 가지 대목에 집중했다.

“네 스킬이 안 통한 거 확실해?”

이공도 안다. 이활의 스킬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다른 건 다 납득이 되어도 그것만큼은 믿기지 않았으니 말 다 했다.

이활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었다.

“어. ‘리스트’에 등록조차 안 됐어.”

성신과 언약한 이후로 이활의 머릿속에는 서적 하나가 생성됐다. 그곳에 기록되는 건 오로지 인간의 이름 또는 얼굴뿐.

이활은 그것을 리스트라 불렀다.

그걸 어디에다가 써먹느냐. 바로 추적에 사용한다.

이활은 리스트에 등록된 인간을 목표로 삼으면 목표물이 어디에 있든 ‘알 수’ 있고 ‘갈 수’ 있었다.

그게 그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 리스트에 인간을 등록하는 조건은 단 두 가지.

첫째, 마력을 소지한 생명체여야 할 것.

둘째, 신상을 알거나 목에 접촉할 것.

“그런데 왜 그 새끼가 등록이 안 됐냐고.”

분명히 목을 움켜쥐었는데.

이공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헌터가 아닐 수도.”

“아니. 일반인도 가능하다니까. 몇 번을 말해. 이하늘 등록된 거 알잖아, 너도.”

마력을 소지한 생명체는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해당됐기에 리스트에 등록할 수 있다.

다만 일반인은 헌터와 달리 마력을 운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반인을 추적할 때는 헌터보다 더 세세하게 찾아야 했다. 헌터와 달리 마력을 내뿜는 범위가 무척이나 좁았기 때문.

세세하게 찾으려면 한 번에 한 지역 정도가 최선이다.

그래서 2주 전에 이하늘을 찾아 나섰을 때 이활이 한국 곳곳을 쏘다닌 것이다.

“뭣보다 그 새끼 이동 스킬 썼어. 헌터가 아니고서 그게 가능한 일이겠냐?”

“어쨌든 둘 중 하나라는 거잖아.”

이공의 말에 이활이 짜증스레 그를 쳐다봤다.

둘 중 하나긴 뭐가 둘 중 하나라는 거야?

“마력이 없거나.”

“…….”

“실제로 접촉한 게 아니거나.”

마력 소지 생명체는 마력이 사라지면 죽는다. 즉, 마력이 없는 인간이란 없다.

그러면 역시 접촉한 게 아니라는 뜻인데…….

“아니라고. 접촉했다고, ×발.”

“애새끼처럼 우길 거면 계속 그렇게 우겨. 안 말리니까.”

고저가 없는 평이한 어조였지만 이활은 심한 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이공은 그의 표정 변화에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리스트에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고 사실이야. 네 스킬이 쓰레기가 된 게 아닌 이상.”

눈을 내리깐다. 생각에 잠긴 듯한 이공은 조용히 읊조렸다.

“넌 인간의 목을 잡은 게 아닌 거지.”

“그럼 뭔데. 귀신?”

이활이 빈정거렸다. 이공은 짜증을 담아 쳐다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허구, 허상. 그런 것.”

“아……. 너한테 말한 내가 병신이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는 이활을 향해 이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생겼는지나 자세히 말해. 나도 찾게.”

“웃기지 마. 내가 찾아.”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아, 왜요? 3절까지 참으셔서요?”

“…….”

이공이 말없이 이활을 쳐다봤다. 근육 하나 미동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런 게 어떻게 나랑 쌍둥이지? 감정 따위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굴면서 어떻게 이하늘 앞에서만 표정이 막 바뀌냐는 말이야.

이런 모습을 이하늘도 봐야 하는데.

그의 가증스러움에 평소처럼 이활은 구역질을 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걘 내가 잡아. 죽여도 내가 죽일 거고. 넌 신경 꺼.”

“그럼 나한테 왜 말을 꺼내.”

“어, 너 답답해서 뒈지라고.”

막 각성했을 당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를 받았던 이활은 그중에서 특진과를 선택했다.

애국심도 딱히 없어 보이고,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정의감도 없어 보인다. 그럼 궁금한 것이다.

넌 대체 특진과에 왜 들어왔냐?

그럼 이활은 늘 지겹지도 않냐는 듯 대충 대답했다.

‘헌터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어서.’

그게 진정한 이유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만 농담이 아닌 건 다 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활은 세상만사 관심이 일절 없었지만 가족이란 틀을 건드는 새끼들은 하나같이 족쳐야 기분이 풀렸다.

만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특진과를 선택한 보람이 있게 행동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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