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4. 아델리나 왕국 (4)
* * *
“쓸데없이 바빠~”
풀석.
하늘 길드의 수장, 로즈는 몸을 씻은 후 침대에 풀석 앉았다. 늦은 시간 때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내일 할 일들이 제법 있었다.
“흐음… 아델리나 사전조사, 이건 했고… 도전자들 신상 확인도 내일부터…”
이번 일은 하늘 길드만이 실행하는 계획은 아니다.
다른 4대 길드들의 필요한 인원을 용병 형식으로 지원받았고, 하늘 길드가 왕국을 집어삼키는 대신 그 외의 자원들을 용병의 대가로 줄 것이다.
로즈는 여러 장의 특수한 종이들을 살펴보다 허공에 떠다니는 펜을 끄적거린 후, 그대로 인벤토리 속으로 집어넣었다.
“으아~ 진짜 자야지지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진 로즈는 잠시 생각했다.
앞으로의 계획들.
그리고 대몰살.
잘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만 탐탁지 않은 것은 여전했다.
대몰살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의 계획 대로라면 죽은 이들도 결국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을…
꼬르르륵…
“배고파.”
로즈의 특성인 ‘육체 조율’의 부작용.
로즈는 자신의 신체 나이와 강도를 자유자재로 조절 할 수 있지만 근육통과 필요 이상의 열량을 요구 하는 페널티가 존재했다.
그녀는 인벤토리에 미리 넣어놓은 식량들을 먹을까 생각하다, 기왕 비싼 곳을 예약한 김에 식당 음식을 먹기로 했다.
끼익…
지금 1층 식당으로 가면 음식이…
끼익.
“카린?!”
“...우연이네요.”
두 길드장이 서로의 방문을 앞에 두고 마주 보았다.
쿵!
쿵!
문이 닫히고 복도에 적막이 흐른다. 로즈는 어버버거리며 말했다.
“뭐, 뭐야. 혹시 일부로 여기를 예약…”
“마탑인 저희가 아델리나 최고의 호텔인 트라비아를 예약 안 할 이유라도 있나요?”
물론 카린은 이곳을 예약하지 않았다.
방을 얻은 건 김윤에게서 남은방을 대여받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린은 아델리나의 대전식에 참여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의 길드원 대부분은 여자이기에 결혼을 목적으로 싸울 수도 없다.
물론 여자여도 대전식에 참여는 가능하지만… 아무튼.
마탑중 일부가 아델리나를 노린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카린이 직접 온 것은 그녀의 독단이었다.
“그럼 너희가 이곳 절반을 다 예약한 거였어? 엔더랑 관련 있는건가?”
“엔더가 누구죠?”
“...아니야?”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카린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대하며 로즈를 내려다봤다.
둘 다 키가 작긴 해도 로즈에 비하면 카린이 훨씬 컸다.
“...마탑이 아델리나를 노려? 최근에 왕국도 많이 먹던데 배가 터지지 않겠어?”
“흠…”
로즈의 비아냥이 섞인 말에 카린은 피식 웃었다.
“로즈님은 배가 고프신 거 같은데 식사나 하러 가시는게 어때요?”
“...너. 각오하는 게 좋아.”
“왜요? 아카데미 때처럼 또 당하셔서 우시려고요?”
“...대진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내가 정상적인 장비만 갖추고 있었…”
“준비도 실력이랍니다.”
카린은 고개를 낮춰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똑같이 당하게 해드리죠.”
“해보든가.”
“......”
“왜, 뭐 할 말 있어?”
“...아뇨. 식사 잘하시라고요.”
“...? 그래.”
로즈는 카린의 표정에 이상함을 느낀 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카린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말해도 안 듣겠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다. 당연히 하지 말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
더 이상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 아닌, 길드장 카린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로즈의 앞길을 막는 것 밖에 없었다.
아데르 리나는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5일만 지나면 해마다 열리는 ‘대전식’이 진행되고 그중에서 100명만이 자신과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래, 수많은 강자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는 것이다.
리나는 왕국의 꽃이라고 불리는 공주지만 그 누구보다 싸움을 좋아했다.
대전식이 당일이 되면 그녀의 검은 항상 붉은색으로 가득 찼다.
치료사와 아카데미에서 쓸법한 대미지 저항 기기들을 깔아둔 대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사고는 항상 일어났다.
“흐응~”
리나의 강함.
리나는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봐주거나 하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 과장에서 필요 이상의 공격을 받아 죽은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었다.
100명중 5명 정도.
전부 그녀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상대적 ‘약자’ 들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면 포기하라는 게 세간의 말들이다.
‘아델리나의 공주는 손속을 절대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늘 시시한 상대만을 만나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의 검을 가볍게 막은 남자.’
그자라면 대결을 좀 더 재밌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리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식탁에 앉았다.
“흐응~ 오늘은 초코 케이크를… 히이이이익!!!!”
“맛있네.”
그런 그녀 생각을 읽은 듯 앞에 김윤이 앉아있었다.
...여긴 내 방인데?
“뭐, 뭐예요? 함부로 방을…”
“열어주던데. 하인이.”
“...뭐요?”
남자는 자기 먹으라고 놔둔 초코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저걸 먹으려고 오늘 일찍 일어난 건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건방져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용사라도 왕국의 공주에게 이런….
“단걸 좋아하는거 같아서.”
남자가 아공간에서 꺼낸 건 구슬처럼 생긴 아이스크림이었다.
형형색색의 구슬들.
불티나게 팔리던 엔도라시와 달리, 제법 거리가 있던 아델리나 왕국의 공주로서는 처음 보는 디저트였다.
“뭐예요?”
“아이스크림.”
“...이런다고 화가 풀릴 줄 알아요? 성내 무단 침입 죄 및, 공주 암살 미수로 감옥에 넣을 겁니다.”
“죽이려던 적은 없는데. 죽이는 맛이긴 하지만.”
“....”
리나는 아이스크림을 냉큼 집어 들었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지만 무를생각은 없었다.
이전에 정식적인 절차를 받아 왔던 때와 달리, 정말로 무단칩임을 한 행위는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냠.
“...!”
찡그리듯 사선을 그렸던 눈이 서서히 동그래진다. 형형색색의 구슬들이 신나게 입안을 해엄치고 달달하면서도 톡톡 튀는 맛이 혀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맛있다.
지금껏 먹어본 수많은 디저트들과는 차원이 다른 맛.
“...”
어느새 손은 다시금 아이스크림으로 향했다.
달그락. 달그락.
“...”
달그락.
탈탈…
“아…”
“맛있지?”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목으로 넘긴 리나는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봤다.
공주라는 체면에 안 맞게 허겁지겁 아이스크림을 입에 집어넣었고, 그릇을 통제로 먹을듯이 입으로 당겨, 녹은 시럽 한방울까지 핥아 먹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보였을 거다.
“....으읏.”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
이걸 노린 건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아쉽지만 한정판이라서, 다시 구해주기는 어렵겠네.’
“...이런다고 대전 때 봐주거나 하지 않아요.”
타악.
시럽 하나 남지 않은 그릇을 내려놓은 리나는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전이 아닌 나를 다른 쪽으로 유혹해서 이기려 하거나 혹은 이기지도 않고 결혼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결투가 아니면 결혼을 해줄 생각이 없어요.”
“...”
“이런 음식도 나한테 좋을 것 하나 없어요. 맛있게 먹었다. 그뿐이죠.”
“...”
“하물며 당신처럼 강한 사람이 왜 이런 요행을─”
“왕자가 곧 올 거야.”
멈칫.
“...누구요?”
“아델리나 왕국의 왕자, 아데르 레진.”
탁. 탁.
탁자 위에 놓인 그릇이 리나의 손에 의해 정신없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타악!
“무슨 속셈이에요?”
“뭐가?”
“무슨 속셈이냐고요.”
어느새 리나의 오른손에 들린 그릇은 사라지고 짙은 남색이 눈에 띄는 검이 들려있었다.
별을 담은듯한 자안(??)은 남자를 노려봤다.
“왕자의 첩자인가요?”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지.”
텁.
남자의 손이 검날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리나는 그 즉시 손을 베어내려 했으나, 검날은 단단히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용찰검(???)을…?’
용신의 비늘과 드래곤 하트가 일부 들어간 검이다.
그런 검을 아무런 장비나 마력강화 없이 맨손으로 잡다니.
“난 누구의 편도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몇 명 있긴 한데...”
“?”
남자는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조심은 해두라고. 너라면 괜찮겠지만.”
너라면 괜찮겠지만.
“...안 통합니다.”
“뭘?”
“흥.”
타악.
리나는 용찰검을 남자의 손에서 빼어냈다. 남자는 갑작스러운 힘의 증폭에 놀란 듯 보였으나 이 정도도 못하면 어찌 매해 100명씩 상대해왔겠는가.
리나는 바닥난 자존심을 참지 못하고 칼을 들이밀었다.
“나오세요.”
“후회할 텐데.”
“후회는 당신이 이제부터 해야죠.”
사람이 없는 대전장.
5일 뒤에 도전자들과 시민들로 가득 찰 대전장이지만 지금은 단둘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나의 용찰검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대전장 전부를 덮을만한 거대한 막이 씌워졌다.
아마 밖으로 퍼져 나오는 기운과 충격을 상쇄하는 막이겠지.
나는 ‘찬란한 빛’을 뽑아들었다.
“여기서 이기면 부탁을 들어주는 건가?”
“물론입니다.”
리나는 용찰검을 길게 늘어트리며 상대를 바라봤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바로 싸움을 걸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절차 라는게 있고 1년에 한 번 씩인 만큼 제대로 할 생각이었지만…
두번.
무려 두 번이나 무시를 당한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절차 없이 진행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애초에 주최자이자 대전식의 실질적인 보상이 진행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선수는 양보해 드리죠. 오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사양하지 않고.”
저 남자가 가진 ‘진짜’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