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18. 불청객
* * *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폭신한 매트릭스의 감촉을 느끼며 소소한 행복감에 잠겨 있던 찰나 몸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경쓰지 않았더라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미미한 감각이었지만, 용족 특유의 마나에 민감한 신체 덕분에 설치해 두었던 결계로 흐르던 마나의 흐름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본래라면 위협적인 유저들이 집 근방 100m내를 지나갈 때마다 울리는 경계용 결계. 만일의 습격을 위해서 설치해둔 결계가 완벽히 해체당한 상태였다.
‘...그걸 간단히 해체했다고?’
나는 재빨리 내 몸에 연결되어 있어야 할 다른 마나의 흐름을 확인했다. 어느새 집을 두르고 있던 결계 대부분이 해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계 마법은 특정한 직업군 유저들을 제외하면 파괴는 가능할지 몰라도 해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함정 해체 스킬이 있는 도적 및 궁수, 혹은 같은 계열의 마법을 배워 둔 마법사 정도가 아니라면, 단순히 칼이나 무기로 부수거나 무시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상대가 도적이나 마법사 같은 특정한 직업군의 유저더라도, 내 결계 마법은 적어도 실력이 혜원이 정도는 되어야 해체할 수 있는 까다로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기척을 숨겨 결계를 제거할 수 있는 실력자라면,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마 그들 중 가장 이런 짓을 할 확률이 높은 사람은...
나는 그 즉시 탐색 마법을 통해 기감을 확장하고, 집 주변을 싹 훑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잡히는 건 전혀 없었다.
그쯤에서, 나는 확신했다. 이런 짓을 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상대방 역시 결계를 해체한 일이 들켰다는 걸 알아챘는지 자연스럽게 기척을 드러냈다.
“...역시.”
마치 나를 부르는 듯, 수백 미터 바깥의 높은 빌딩 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 유저.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지인의 모습과 완벽히 똑같았다.
솜처럼 새하얀 토끼 귀, 밤중에도 붉게 빛나는 눈.
‘예진이와 예림이는... 잘 자고 있네.’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코를 골고 있는 예진과 이불을 멀리 차버린 예진이의 콜라보 덕에 거실의 잠자리는 난장판이었다.
원래라면 어떤 손님이 찾아왔든 그녀들이 잠을 자는 동안은 내버려둘 생각이었지만, 이번 손님은 조금 특별하니 두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간단한 마법 하나를 그녀들의 귀 곁에 친히 설치해 둔 나는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밤공기로 가득한 밖으로 뛰어내렸다.
푸른 마법진이 발아래에 형성되며 마법이 영창되었고, 나는 마나의 흐름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 수백 미터 상공의 건물 옥상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그, 이젠 생물학적으로 그녀가 된 수인 여성은 새하얀 달빛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응, 안녕.”
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며,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에 속으로 침음했다.
불과 몇 년 전엔 서로 걸쭉한 목소리로 욕이나 박던 사이였는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는 기분이란, 역시 이상했다. 희대의 인싸이자 관종이었던 상대방도 입을 꾹 닫고 볼을 긁적이는 걸 보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오랜만이네. 찾아온 이유가 뭐야?”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어색한 침묵을 깬 쪽은 나였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온 건 군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경로였다.
추정되는 원래 목적대로 거슬리는 유저들을 전부 죽이면서 수도로 올라오려 했다면, 아마 다음날 쯤에서야 이곳에 당도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유? 별 것 없어. 그냥 오랜만에 과거에 알고 지냈던 친구를 보고 싶어서.”
어깨를 으쓱이며 친한 척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그녀에게, 나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경고했다.
“거기서 다가오지 마. 수상해도 정도껏 수상해야지, 옛 친우라고 해서 봐줄 것 같아? 넌 지금 범죄자라고. 그것도 살인자.”
“이런, 옛 친우라니. 우린 지금도 친구 아니었나? 조금 섭섭하네.”
어깨동무나 하자는 듯 손을 허공에 휘적이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저런 손짓에 내가 가까이 다가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난번의 경험들을 통해 아무리 오래 본 친구라도 쉬이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내게는, 눈앞의 그녀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가. 너랑 싸울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그 무대에서 놀라고.”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그녀를 막아세울 예정이었던 예진이와 예림이, 혜원이의 얼굴을 순차적으로 떠올리며 말하자, 대답 대신 껄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일반적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노이즈가 낀 괴이한 웃음소리.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애써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목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젠 정말 더 봐주긴 힘들어. 아무리 이시현 너라고 해도 이런 새벽에, 몰래 결계를 해체하려 들다니. 쥐새끼마냥 살금살금 남의 집에 들어와서 뭘 하려고 했는지 말해.”
내 신랄한 비난이 섞인 추궁에, 그녀는 웃음을 뚝 멈추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우리 사이에 ‘너’라니, 정 떨어지게. 시아라고 불러. 이시아. 그이가 내게 새롭게 지어 준 이름이야.”
“...그이라니, 그 금발태닝남이랑 붙어먹었다는 게 정말이었나 보네.”
“그게 뭐 어때서? 너도 한 번 박혀 봐. 그 맛을 못 잊는다니까?”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를 맞대 동그란 모양을 만들고, 검지 손가락을 마구 쑤시는 천박한 손모양을 한 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여자가 더 좋아.”
“나도 박혀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지. 각설하고, 본론을 이야기하자면... 일단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어.”
“...뭔데?”
“이걸 볼래?”
“...뭐야?”
시아는 그림자 속에서 웬 타블렛 하나를 꺼내더니, 사진 하나를 띄웠다.
내 가족, 정확히는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청태이프로 묶여 울먹이는 사진이었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아하니 가족의 신변을 구실로 협박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줄 알았나 본데, 나는 그런 허술한 사람이 이젠 아니었다.
전번의 일을 경험삼아,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누나와 몇 없는 친한 지인들을 청와대 및 온건파 소속 유저들의 비호 아래에서 살아가도록 조치해 두었다. 그 증거로, 사진 속에는 누나가 없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서울 한가운데의 안전가옥에서 수준 높은 유저들의 경호를 받은 채 편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즉, 사진 속의 저 사람들은 이젠 나와 별 연도 없는, 저번에 한 번 도움을 준 것으로 충분히 가치가 다한 남이란 소리였다.